‘나만의 삶’을 찾는 게 가슴 뛰는 인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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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치서 다가온 그와 처음 마주쳤을 때, 악수를 나누고 첫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을 때,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건 ‘작은 거인’이라는 하나의 상징어였다. 그와 대화를 마치고 돌아와서 두루 검색해 보니, 그와 관련된 모든 만남의 글에선 똑같이 ‘작은 거인’이라는 표현이 새겨져 있었다.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다는 뜻이 된다. 모든 이들의 가슴에 같은 이미지와 인상을 심어놓는다는 건, 그가 자신의 삶을 ‘하나의 길’과 ‘하나의 모습’으로 일관되게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이미 수많은 언론에 그의 모습이 비춰졌지만, 이번에는 <함께걸음>의 시선으로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얼마 전 저서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를 출간한 국제사회복지사이자 선교사인 김해영 님을 이 지면에 초대한다. ‘있는 척, 아닌 척’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삶 이야기가 ‘김해영’이란 이름 아래 진솔하게 새겨지게 됨을 <함께걸음> 또한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손자 아닌 손녀라는 이유 하나로
“여러 매체를 통해 저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진 상태여서, 무엇은 얘기하고 무엇은 얘기 안 하겠다는 생각을 저는 갖지 않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저는 사회복지사이기 때문에 제 인생에서 일어났던 경험들까지도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래서 제 삶의 이야기가 건강하게 전해지고 좋은 영향을 남기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죠.”
아주 ‘단단한’ 사람과 마주앉았다. 육체적인 굳은살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꽉 채워진 그 무엇’으로 이뤄진 인물임이 분명했다. 그런 첫인상은 쉽게 접하지 못하던 인상적인 여운을 길게 남겼다. 대화를 모두 마칠 무렵 김해영 씨도 비슷한 언급을 스스로 꺼냈다.
“미국에서의 7년, 특히 아프리카에서의 14년이 긴 시간의 고난이었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 모든 게 원석(原石)이 다이아몬드가 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커팅 프로세스(세공) 과정을 거기서 거친 거죠. 제가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가 서른여덟의 나이였어요. 손에 돈 한푼 없었죠. 그런데도 기가 죽는 것 하나 없이 자신감으로 충만했어요. ‘나 같은 사람 있으면 나와 봐. 아프리카에서 14년 무보수로 산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나 같은 고통을 견딘 사람 있으면 나와 봐. 사막에서 이렇게 생존해서 살아난 사람 있으면 나와 봐.’ 이런 자부심이 제 안에 가득 있었던 거예요.”
그는 1965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원래 건강한 몸으로 태어났단다. 그런데 손자가 아닌 손녀가 태어난 점을 극도로 못마땅해 하신 할아버지가 ‘쓸데없는 계집애’가 태어났다며 대놓고 불만을 터뜨리셨는데, 그 와중에 술을 드신 상태였던 아버지가 순간 ‘욱’하는 우발적인 반발로 생후 사흘밖에 안 됐던 아기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단순한 일과성의 소동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아기 등의 척추가 이상하다는 걸 어머니가 깨닫게 된 건 3개월이 지난 후였단다. 남아선호사상이 절대적 기준이었던 당시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집안의 풍경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저도 몇 년 전에야 겨우 막내이모한테 그때 정황을 전해 들어서 알게 됐어요. 사는 동안 제가 왜 이렇게 된 건지를 저도 모르고 있었다는 거죠. 제 몸이 그렇게 되니까 어머니는 그게 한(恨)이 될 게 아니에요.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애가 자라면서 몸이 점점 이상해지니까, ‘갖다 버려라. 쓸데없는 계집애, 몸도 이상하게 되어버렸으니까 갖다 버리’라고 계속 불만을 토로하셨대요. 그때부터 저의 어머니는 어머니 방식대로 저를 키우셨대요. 더 야단치고 더 구박을 하셨죠. 낳은 사람이 더 야단을 치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야 할 게 아니에요. 저를 더 심하게 야단치는 게, 역으로 저를 보호하기 위한 어머니의 장치였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더라고요.”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척추장애를 얻게 된 셈인데, 어린 김해영에겐 예정에 없던 청천벽력(靑天霹靂)이 새롭게 닥쳐든다. 그가 7살 때 어머니가 사고로 인해 머리를 크게 다쳐 정신이상 증세를 갖게 되셨다는 것이다. 시아버지의 학대가 너무 심했고 첫째 딸의 장애 같은 여러 가지 상황들이 뒤엉켜 심한 정신장애를 갖게 되셨다 했는데, 그 와중에도 새로운 동생들이 태어났지만 극심한 우울증까지 덮친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돌보는 건 고사하고 일상생활까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셨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키우는 건 어린 김해영의 몫이 되어버렸단다.
“저만 보면 저를 때리셨죠. 어머니의 믿음은 이제 이렇게 된 거예요. ‘네가 태어나서 집안의 모든 불행이 다 생겼어. 정신이상을 갖게 된 것도 너 때문에 그렇고, 네 명의 동생들이 무슨 일만 생겨도 다 너의 잘못 때문’이라는 거죠. 저는 제가 잘못 태어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름 정말 열심히 살림하며 집안을 돌봤는데, 잘하면 잘하는 대로 욕먹고 혼나고… 정말 많이 맞았어요. 저의 아버지도 결국 완전히 지치셨죠. 엄마하고는 하루가 멀다 하며 싸우셨는데, 집이 다 부서질 정도로 대단했죠. 저는 맞기 싫어 도망 다녀야 했고, 집안 전체가 올바른 생활이 전혀 되지 않았던 거예요.”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한 달이 지나가던 3월 어느 날, 결국 아버지는 다섯 남매를 방에 뉘어놓고, 그렇게 재워놓고 나서 새벽에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셨단다.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게 된 그 원망까지, 이젠 모든 화살이 어린 김해영에게 쏟아졌다고 한다. 모든 게 ‘김해영의 죄목(罪目)’이 됐단다. 사람으로 태어난 죄, 여자로 태어난 죄, 장애인이 된 죄, 동생들이 많은 것도 결국 그의 죄, 어머니의 정신이상도 그의 죄, 최종적으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도 그의 죄였다는 것이다.
결국 ‘9월 어느 날’로 기억되는 그 어느 날에 어머니의 물리적인 폭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틀에서 완전히 도피하기 위한 가출을 실행하게 됐단다. 동네 아는 이의 소개로 어느 집에서 8개월 동안 식모살이를 하게 됐는데, ‘아,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반성과 함께 스스로의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한 뒤 기술을 배우기로 결정하게 됐다고 한다. 그가 직업학교에 들어가 배운 건 편물기술이었고, 직업학교 수료 후 경기도 용인의 한 하청공장에 취직해서 들어가게 됐단다. 그게 15살 때의 일이란다.
‘나’를 인정하는 세상 속으로
그런데 그가 만19세가 됐을 때, 김해영 씨는 당시 대통령한테 철탑산업훈장을 수상 받은 기능인이 되어 있었단다. 그 몇 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 기간 동안 그가 출전한 7회의 기능대회에서 모두 입상했고, 특히 전국기능대회와 장애인기능대회에선 모두 금메달을 받았으며, 1985년 세계장애인기능대회에서도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고 한다.
같은 기간 중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하나님께 귀의한 신앙인이 되었으며, 스스로를 ‘공자의 제자’라고 칭할 만큼 중국의 고전을 탐독하며 그 정신세계 안에 빠져들었단다. 단 몇 년 사이에 한 인간의 삶이 이만큼 반전될 수가 있는 걸까? 자기 인생의 길을 깨닫고 한 우물 파는 일에 매진하면, 이 짧은 기간에도 이만큼의 새 세상을 개척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몸소 실천과 성취로 직접 드러낸 셈이 된다.
“제가 20대가 됐을 때는 더 이상 가난하거나 힘든 건 없었죠. 기술을 배우고 익히면서 가족들과 다시 합쳤어요. 6년이란 기간 동안 중고교생이 된 동생들을 뒷바라지했죠. 제가 금메달을 따고 사회적으로 성공한다 해도, 이렇게 망가져 있는 집안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제가 먼저 깨달았거든요.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제가 먼저 실천해야 했던 거예요. 물론 신앙인으로서 가족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 또한 함께 했고요.”
편물기술에 있어선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가 된 그는 새로운 목표를 찾아 대학 진학에 도전했지만, 연이어 두 차례나 실패를 맛봐야 했단다. 실패 후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그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재조립하게 만든 광고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고 한다. 아프리카 보츠와나라는 나라에 자원봉사자로 갈 직업학교 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였단다.
“그 광고를 보자마자 ‘아주 심플리(simply, 간단하게)’ 지원을 했어요. 안 되는 대학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을 게 아니라, 잠깐 쉬는 셈치고 ‘나를 필요로 하는 거기에 가서 편물기술을 가르쳐 주고 오자.’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며 1년 예상으로 갔죠. 대단한 결심이나 어떤 목표를 갖지 않고 간단하게 갔던 길이었는데, 그게 14년이란 긴 시간으로 늘어나게 된 거죠. 처음 1년 동안에는 왜 거기 가서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건지를 잘 알 수 없었어요. 그런데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깨우치게 됐던 거죠.”
지금 돌아보면 세 가지 이유로 인해, 14년의 긴 기간 동안 ‘인간 김해영’이 보츠와나에서 살게 됐던 것 같단다. 첫째로 보츠와나 정부에서 기술 전수를 위해 자국을 방문한 이들을 상당히 환영해 줬다고 한다. 일을 할 기회와 여건을 아주 잘 만들어 줬기 때문에, 큰 보람을 얻으며 일을 할 수 있었단다. 두 번째로는 보츠와나 사람들의 격의 없는 인간관계가 너무 편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제가 기능대회에서 그렇게 금메달을 많이 따고 성공했다 할지라도, 제가 얼마나 잘하느냐를 떠나 그냥 장애인이었던 거죠. 큰 업적을 쌓아도 ‘장애인’이라는 이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보츠와나 사람들은 제가 기술이 좋다, 뭐다, 이런 걸 몰라요. 그냥 김해영인 거고, 한 사람인 거고, 저기 외국에서 온 조그마한 여성인 거고, 경쟁이나 비교에 의해서 저 자신이 정의되지 않던 그런 인간관계가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저를 편하게 대하고 제 기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게, 제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줬던 거죠.”
세 번째 이유는 직업학교를 통한 교육사업이다 보니까, 단 1년 2년으로 마무리를 짓기가 어려웠단다. 게다가 극히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그 나라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듣다 보니까, 그 아이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이 유독 많이 눈에 보였다고 한다. ‘아, 네가 그래? 나도 그랬는데 어떡하지?’ 그래서 몇 차례 우애곡절이 있었지만, 같이 갔던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서 혼자 남게 됐지만, 기술을 계속 가르쳐달라고 하는 학생들을 보며 김해영 씨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단다. ‘나는 떠나지 말자!’
나의 오늘 삶에 최선을 다한다
“제가 보츠와나에서 14년 일을 마칠 즈음에,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의 꿈이 생겨났어요.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전문가가 되어 더 큰 일을 해야겠다!’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어요. 복지사업이 뭔지, 직업학교 훈련교육이 뭔지,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는 동안 눈이 떠진 거죠. 그래서 사회복지교육을 제대로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뒤, 바로 뉴욕으로 가게 됐어요. 사회복지학 학사과정을 마치고, 콜롬비아대학에 가서 사회복지학 석사를 마쳤죠. 그게 7년 걸렸어요. 기간으로만 본다면 한국에서 24년 살고 보츠와나에서 14년, 미국에서 7년을 산 것이죠.”
2010년 10월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그는 부탄 정부와 연계된 ‘부탄 개발 프로젝트’를 2년 정도 진행하던 중 다시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2012년 10월부터 본격적인 케냐에서의 삶이 시작됐단다. ‘밀알복지재단 아프리카 권역 본부장’이라는 직함이 그의 명함에 새겨진 것이다. 복지재단의 아프리카 본부가 케냐에 있고, 그는 현지사업을 개발하고 10여 개국에 이르는 아프리카 권역을 아우르면서 연구조사를 주된 임무로 맡고 있다고 한다. 원하던 자리에서 원하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래서 그에게 인생의 다음 계획이 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없어요.’
“사람들은 제가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포기할 줄 모르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런 게 없어요. 그냥 기술을 우연히 배우게 됐는데 그거 열심히 하다 보니까 기술자로 잘 됐고, 아프리카에 자원봉사로 갔는데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니까 직업학교 교장이라는 경력을 얻게 됐죠. 또 미국에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공부하러 갔는데, 정말 다행이죠. 좋은 대학원에서 공부를 잘 마칠 수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금메달 따기 위해서 기술 배운 게 아니고, 교장 하기 위해서 자원봉사 간 게 아니고, 콜롬비아대학 석사학위를 위해서 유학 간 게 아니라는 거죠. 인생의 목표가 있어서 거기에 맞춰 걸어온 게 아니라, 제 인생 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하나 그날그날 성실히 하다 보니까 지금까지의 모든 결과가 나오게 된 거예요. 뭐가 될 건지를 준비하는 건 하나도 없어요. 대신 무언가가 다가올 거라는 확신은 분명하게 가지고 있죠. 그런 당연한 거예요. 지금 하는 일을 어렵거나 힘들다는 이유로 변명하지 않고,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거의 40년째 진행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힘들었던, 어떤 면에서는 전후(戰後) 대한민국 민초의 집안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시대적 질곡이 모두 다 일어난 가정사(史)를 어린 나이에 직접 겪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마음다짐이 강건해진 게 아닌가 물으니, 그건 맞다고 한다. 십대 중반에 신앙인이 됐지만, 너무 아픈 몸과 더 나빠질 수 없는 환경 때문에 ‘죽음’을 떠올린 적이 많았단다. 그런데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 앞에서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는데, 그때 그가 내린 결론은 ‘정당하게 죽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정당하게 죽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건 ‘죽을 만큼 사는 것’이에요. 고통과 고난 앞에서, 그 어려움 앞에서 변명하지 않는 거예요. 편물작업을 하다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죽으면, 그게 정당하게 살다가 죽는 거잖아요. ‘해야 할 일을 하다가 죽자!’ 이게 30년 이상 저를 붙잡은 내면의 힘이었죠. 저는 키가 작고 겨우 초등학교만 나온 공장의 여공이었죠. 15살짜리 여공인데 아무런 희망이 없었어요. 몸은 너무 아픈데, 인생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평생 초졸 여공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었죠. 그때 마음을 다잡았어요. 논어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잘못된 것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더 큰 잘못이다.’ 맞아요. 그때 다짐했어요. ‘그래,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내가 장애인이 된 거 내 잘못 아니야. 엄마가 아팠던 거, 그래서 나를 많이 때린 것도 내 잘못이 아니야. 엄마도 아팠잖아. 아빠가 그렇게 돌아가신 거, 내 잘못이 아니야.’ 그래서 저는 십대 이전에 제 인생에서 일어난 많은 일들에 대해서 저한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거예요. ‘내 잘못이 아니잖아. 내가 선택해서 된 게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었잖아. 그럼 지금부터는 어떡해야 하는 거지?’ 그때부터 살아갈 일에 대해서,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제 책임인 거예요. 제가 변명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기술을 배우든, 기능대회를 치르든,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에도, 유학 가서 공부를 할 때도, 지금 아프리카를 담당하는 일도 최선을 다했던 거죠.”
역사에는 ‘만약에(if)’가 없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마치며 이런 상상을 떠올려 봤다. 만약에 그 당시 그때 ‘보츠와나 직업학교 교사’를 부르는 광고지를 그가 보지 못했었다면, 그리하여 그의 삶이 대한민국 어느 한 지역에서 ‘금메달 출신 기능인’이라는 이력을 갖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면, 그의 현재는 이 땅에서 어떤 인생으로 진행되고 있었을까? 혼자만의 상상을 살짝 흘려냈더니, 대답은 그가 이었다.
“아프리카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는 계속 이 한국 사회에 살면서 제가 늘 하듯이 열심히 살며 뭔가 한 분야에서 전문인이 되어 있겠죠. 그러나 참된 저 자신을 만나진 못했을 거라는 가정(假定)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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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대학생님의 댓글
청각장애대학생 작성일정말 좋은 글입니다. 현재 대학생 4학년으로 장애인으로써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 이것저것 방황을 했지만, 이분 글을 보니 하나의 실마리가 보이는것 같아요. 좋은 기사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