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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배우로 살고 싶다

[사람사는 이야기] 배우 길별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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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무대 위의 그를 보며 ‘연기를 참 잘한다.’는 실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런데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너나할 것 없이 크게 놀라는 건 공연이 다 끝난 뒤란다. 배우 아닌 자연인으로 다시 나타난 그를 보며, 이런 수군거림과 대화를 제각기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어머, 저 사람 장애인이었어?” “뭐? 그렇다면 장애인인데 지금 직접 연기를 했다는 거야?”

이 얘기는 이 땅의 대다수 아니, 절대다수가 ‘장애’를 바라보는 인식의 수준을 드러내는 씁쓸한 실제 예가 된다. 장애인이 배우라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는 거… 왜 놀라야 할까? 장애인의 예술 활동을 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바라보지 못한다는 걸까? 장애・비장애 구분을 떠나 한 인간의 사회활동이고 한 사람의 자아실현이라 받아들이면 모든 게 자연스러운데, 왜 굳이 ‘장애’라는 선입견과 색안경을 들이대며 먼 세상 얘기처럼 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모든 부조리함 앞에 단순한 몇 가지 몸짓과 표정만으로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그’를 만났다. 아주 편하게 대화를 나누며, ‘검색’으로는 접할 수 없었던 그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그의 이름으로 일일이 검색해도 찾을 방법 없던 커다란 빈 퍼즐 하나가 이 글로 채워지리라 기대된다. 최근 한 TV 드라마 출연으로 다시금 그의 이름 석 자를 많은 이들이 기억하게 된 배우 길별은 씨가 이번 만남의 주인공이다. 미리 밝혀두지만, 대화 내내 마주본 그의 표정은 정말 ‘살아 있음’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나의 재활 선생님

“처음엔 드라마 초기 몇 회 출연하고 죽는 아버지 역할이었는데,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고 연기력이 좋다는 호평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까, 계속 회상(回想) 장면으로 촬영이 이어지고 있어요. 일단 죽었으니까 다시 살아날 순 없잖아요. 그래서 과거를 돌이켜 떠올리는 장면이 새롭게 계속 생겨나는 거죠.”

한 종편의 드라마 출연으로 다시금 대중의 시선을 집중 받게 된 길별은 씨. 뇌병변 2급의 장애라 했지만, 그런 느낌은 거의 받지 못할 정도의 편안하고 낙천적인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만남의 시간 내내 대화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고 갔다. 자신감이 없다면 이뤄지지 않을 모습이 계속 이어지는 게, 마주보는 입장에서도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왜냐, 그 자신감이란 게 참으로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집에만 있었어요.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해서, 가만히 드러누워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돌아눕지도 못하는 채로, (전신이 굳어 있는 자세를 취하며)이렇게 경직된 채로 누워 있기만 했으니까요. 밖에 나갈 때는 어머니가 저를 업고 다니셨어요. 고등학교에 갈 때까지 어머니가 업거나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다녔죠. 특히 초등학교 때는 제가 혼자 앉지 못하니까, 6년 내내 저를 앉는 자세로 부축해 주시면서 수업 시간 내내 같이 옆에 계셨어요. 6년 동안 계속 곁에 계셨던 거죠.”

그렇다면 언제 보행이 가능해졌다는 걸까? 기면서 다니는 것도, 홀로 서는 것도 어려웠던 당시, 첫 걸음은 발등으로 걷는 게 가능해졌다고 한다. 발목이 너무 심하게 휘어서 발등 부위로 걷게 됐다는 건데, 그나마 억지라도 바깥으로 자신을 끌고(?) 다니려 애를 쓰셨던 어머니 덕분에, 지금은 발바닥으로 걸을 수 있게 된 게 참 고마운 어머니의 치료법이 아니었나 싶다고 한다.

“고1 때 비로소 혼자 걸을 수 있었어요. 저희 집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재활병원에 다닌다는 것 같은 건 아예 꿈도 못 꿨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일반학교를 나왔거든요. 그런데 저를 계속 세상 속으로 이끌어낸 어머니 덕분에, 결과적으로 어떻게든 제가 걸을 수 있게 된 거잖아요. 그렇기에 저의 어머니는 저한테 세상 그 누구보다 훌륭한 재활의학 의사선생님이세요. 저를 걷게 만들어 주셨잖아요.”

참 멋진 표현이다. 의대에 다닌 적도 없는 엄마가 자신에게는 세상 최고의 재활의학 전문의라는 것! 지금 이 시간 아들의 삶을 만든 건 어머니의 절대적인 정성이 분명하다는 점에 동감하게 된다. 그게 바로 ‘모정(母情)’이라는 생생한 힘이기 때문이다.

 

나도 영화 속 주인공이 되고 싶다

어렸을 때의 동네 풍경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몸 전체가 경직된 상태로 천장만 바라보던 삶이었다 했기에, 어머니 등에 업힌 상태의 기억 아닌 개인적 추억이 있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답은 엉뚱하게 어린 시절 집 앞에 있던 어느 공장 얘기로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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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인근의 아주 가난한 동네에 살았어요. 전형적인 달동네였는데, 저희 집 바로 앞에 ‘크라운’ 브랜드의 조선맥주 공장이 있었어요. 공기 자체가 알코올 기운이 섞여 있던 동네였죠.”

어디쯤인지 알 것 같았다. 영등포 지역은 지금처럼 부도심으로 발전하기 이전에는, 서울시 외곽 변두리의 공단 지역 비슷하게 구도가 잡혀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구로공단’이라는 용어 자체가 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의 시대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아니었던가. 별은 씨가 당시 거주하던 지역도 그 인근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제가 몸이 마비가 되어 있던 시절이었는데도 그 마비가 풀린 건, 그렇게 알코올 공기를 계속 흡입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술 취한 사람처럼 걷고 있잖아요. 하하하.”

이 사람…, 정말 낙천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자신의 장애증상을 이만큼 간단한 한마디로 정리해 버릴까?

“어린 시절에 가장 기억나는 건, 저의 어머니가 저를 업고 극장에 한번 데려가 주셨거든요. 동네극장이었는데, 그때 생전 처음 봤던 게 ‘원더공주’라는 영화였어요. 당시 ‘원더우먼’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TV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던 시절이었잖아요. 그걸 약간 패러디해서 국산영화로 만든 거였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아, 배우들이 저런 사람들이구나!’ 하는 실감을 얻게 됐었죠.”

그럼 TV는 못 봤을까? 같은 영상이 흐른다면 TV도 충분히 도움이 됐을 법한데, 브라운관의 추억은 없다는 걸까? 당연히 있단다. 당시의 TV는 엄청나게 큰 브라운관과 조그만 화면 그리고 텔레비전 앞을 닫아놓는 양쪽 서랍장 문 같은 게 있었다는 게 기억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한 동네 전체 사람들이 몰려와서 TV 앞에 진을 치며 앉아 열광하던 시절, 별은 씨는 누워 있어야 했던 탓에 화면을 보기보다는 TV 앞에 앉아 있던 동네 사람들의 뒷모습만 봐야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극장에 가면 스크린이 정말 엄청 큰 거예요. 물론 지금보다는 훨씬 작죠. 하지만 당시 어린 시절의 저의 눈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던 거예요. 그런데 그 많은 관객들이 그 한 사람만 보는 거예요. ‘아,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저 사람만 보고 있지? 야, 이거 정말 신기하다. 그런데 저 주인공은 우리가 보일까?’ 어린이 나름대로의 생각이잖아요. 그런 생각을 내내 하다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던 것 같아요.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그때가 배우라는 꿈을 떠올리던 첫 계기가 된 게 아닐까 싶다는 거죠.”

 

영상 속에선 나는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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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는요. 당시의 3류 극장이라는 게 있었는데, 5백 원만 내면 영화 두세 편을 볼 수 있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살던 동네에 재개봉관이 네 군데가 있었는데, 정확한 계산은 아니지만 삼 년 동안 150편 넘게 봤던 것 같아요. 그럴 정도로 영화를 본다는 게 너무 좋았거든요. 그때까지는 배우가 되겠다 같은 생각은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못하고, 그냥 영화 그 자체가 좋았어요. 극장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도 제가 장애인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걸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기분이 정말 그랬어요.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주위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오로지 영상 속으로만 빠져들게 되는 거예요. 장애를 잊고 몰입하는 거죠. 어떨 때는 제가 그 영상 안에 있는 거예요. 자유롭게 걸어 다니고,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자유롭게 주인공 친구가 되어 제가 그 안에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배우가 정말 되겠다는 꿈은 언제 실행했을까? 2004년의 일이란다.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는데, 지하철역 입구에서 무료로 나눠주던 신문이 선반 위에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어, 그걸 꺼내들고 이리저리 읽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여러 지면의 내용 중 한 대목이 눈에 확 띄었다고 한다. ‘서울예술단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뮤지컬을 공연할 건데, 장애인 객원배우를 다섯 명 뽑을 예정이다. 지원하실 분들은 지원해라.’ 라는 광고 내용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전화를 걸어 대화하다가 언어장애 때문에 떨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어머니께 대신 지원하는 전화를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마감이 오후 7시까지, 집에 도착한 건 오후 5시 전후였단다. 천만다행으로 접수처였던 예술의 전당까지는 마을버스로 15분 거리였기에 어떻게든 서둘러 접수를 하고, 오라고 했던 다음날 오전 9시에 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뭔가. 방송 화면 등을 통해서 익숙해진 장애인 활동가들이 전부 다 모여 있는 게 아닌가. 저 정도의 사람들이 같은 시험을 본다면 통과하는 건 불가능이 분명한데 어떡해야 하나 하며, 절반 정도는 마음을 접은 상태로 시험장에 들어섰단다.

“세상에나! 방송용 대형 카메라 두 대가 떡하니 저를 비추고 있고, 총감독님과 단장님과 여러 등장배우들이 전부 저를 주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미리 제공했던 악보와 대본을 중심으로 연기해 보래요. 저는 그런 걸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받은 적 없다고 하니까, 무슨 말이냐 하시더라고요. 곁에 있던 직원들이 워낙 바빠서 깜박 잊고 못 준 것 같다고 해명을 하니까, 총감독님이 그럼 그냥 할 수 있는 걸 해보래요. 머릿속이 하얗게 바뀌는데, 제가 그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겠어요. 제 마음대로 대사를 만들어서 무작정했고, 노래는 전영록의 ‘불티’를 그냥 불러댔죠. 몸이 가는 대로 불러대니까, 앉아 계시던 심사위원들이 킥킥대며 웃는 거예요. ‘아, 떨어졌구나.’ 하는 생각부터 직감처럼 앞서게 됐죠.”

‘감사합니다!’ 하며 인사하고 나왔지만, 결론은 이미 느껴졌단다. 탈락! 그래서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도 받지 않고 있다가 켜보니, ‘서울예술단’이라고 소속을 밝힌 전화가 왔단다.

“이 예술단은 탈락한 지원자들한테도 이렇게 전화로 알려주는가 보다 하며 시큰둥하게 받았죠. 그런데 합격이래요. 제가 대뜸 물었어요. ‘왜요?’ 저도 전혀 예상을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의 질문에 전화를 건 분도 당황하셨던 모양이에요. ‘그건 저도 모르죠. 합격했다니까 저도 전화를 드리는 거예요.’ 그 전화를 끊는 순간부터 저의 배우 인생이 시작된 셈이 되는 거죠.”

첫 무대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이었단다. 말 그대로 ‘세상에나!’가 맞다. 토월극장이라 함은 대한민국 모든 연극인과 지망생들이 꼭 오르고 싶은 궁극의 무대 아닌가. 그런데 별은 씨는 그 무대가 최초의 데뷔무대였다고 한다. 게다가 두 번째와 세 번째 무대가 국립극장의 해오름극장 같은 자리였고, 전국 각지에 있는 예술의 전당은 오르지 않은 무대가 없다고 한다. 남들은 평생 걸려 오르고 싶어 하던 무대를 이미 다 올라가 봤다는 말이 아닌가. 이 대목을 놀라움과 함께 되물으니까, 별은 씨는 약간 겸연쩍은 표정과 함께 머리를 긁다가 금세 환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크게 내질렀다.

“제가 눈이 좀 높잖아요. 하하하!”

 

자연스러움이 저의 삶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고, 또한 어떤 개인적인 삶을 살고 싶냐고 말이다. 그런데 나름 기대했던 ‘화끈한’ 대답은 없고, 가장 인간적인 언어들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저는 저보다 더 아프고, 저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이 저를 보며 행복해 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이들이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있는데,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렇게 지내고 있는 거지?’ 하는 거, 그러니까 ‘저 사람만큼 나도 열심히 살고 당당히 살아야겠다.’는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돈과 명예는 그 다음의 일이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돈과 명예가 따르는 거지, 그걸 먼저 추종하면서 매달리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저는 믿고 있어요. 모든 배우들의 꿈은 똑같겠죠? 죽을 때까지 배우‘짓’을 하다가 죽고 싶다는 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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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라는 직업과 인생이 천직인 것 같은지를 물었다. 갈수록 고통스럽고 힘들단다. 이번 연기를 마치면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은데, 막상 끝나고 나면 새로운 역할이 뭔가 하며 찾아보게 된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모든 답이 다 나왔다. 그는 배우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저는 연기를 잘해야지, 이런 건 없어요. 왜냐? 항상 모든 걸 아주 자연스럽게 하자는 일념 하나로 움직이고 있거든요. ‘그냥 자연스럽게 하자!’ ‘더 잘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 배우가 제게 던져주는 에너지를 그만큼의 힘으로 다시 던져주자!’ 하는 다짐으로 연기자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상대 배우의 눈빛을 정말 진지하게 바라보게 돼요. 그 눈빛의 힘을 저도 그만큼, 그 배우의 힘만큼 저도 전해줘야 하기 때문이죠.”

앞으로 정말 하고 싶은 역할이 뭐냐 물으니, 로맨틱 코미디 같은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드라마나 영화에 자신의 역할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단다. 오케이(OK)! 이건 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충분히 검증이 된 것 같다. 이 정도의 낙천적인 성격이라면, 또한 그 성격을 그대로 내보일 정도라면 그의 희망은 분명히 현실로 이뤄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저를 소개할 때, 장애인 배우라는 표현은 안 하셨으면 해요. 저는 ‘배우’라는 호칭 자체로 저를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100% 동감한다. 살아가면서 가장 싫은 표현이 ‘장애가 있는가 없는가’의 구분이다. 모두가 다 ‘사람’이다. 다 ‘인간’이고, 다 소중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별은 씨가 우리 독자들 앞에서 ‘무언가’를 선물로 보여줄 일이 무엇이 있을까? 같이 고민하다가 답이 보이면, 그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어서 빨리 이리 와서 모두 모인 자리에 함께하자고 말이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aery727@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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