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하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사람 사는 이야기


노력하며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사람사는 이야기]작가 노선영

본문

애써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사람은 잠시 반짝 눈에 띌지 모르지만, 이내 무관심의 늪 속으로 여운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아주 천천히 주변인들에게,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인식되면서 호기심과 궁금증,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원인(原因)을 만들어내곤 한다. 이번 호 주인공이 바로 그런 인물이라 믿어지는 건,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위한 도전을 이미 시작했다는 고백을 그에게서 직접 듣게 됐기 때문이다. 

여러 방송 프로그램과 많은 강연을 통해 익숙해진 얼굴이지만, 우리는 <함께걸음>의 시선으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지난 4월 첫 에세이집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을 출간하며 작가로서의 삶에 첫 발걸음을 내딛은 노선영 씨를 만났다. 100%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지만, 장애와 비장애의 영역을 떠나 모든 대화를 스스럼없이 눈빛과 입 모양만으로 나눌 수 있었다는 건 큰 의미를 안겨준 소중한 기억으로 남게 됐다. 수화통역을 위해 자리를 함께했던 선영 씨의 오랜 ‘절친(가장 친한 친구)’ 전혜영 씨한테도 이 지면을 통해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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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야 알게 된 장애

노선영 씨는 100%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100%’라는 의미는 아무리 귀를 막고 있다 해도, 가장 고요한 시간이라는 한밤중에 이만치 많은 소음들이 사방 전체에 존재한다는 걸 새삼 깨달은 이후에도 제3자의 입장에선 감을 잡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선영 씨는 대화 내내 싱글벙글, 즐거움과 긍정의 미소를 가리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통일대장정 참가, 아테네국제마라톤 참가, 혼자서 떠난 중국 여행 그리고 청각장애인으로는 최초로 세계지식포럼에 참가 등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의 지난 삶은 환경이 가장 중요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환경이 정말 많이 열악했어요. 그래서 모든 게 부족했고 저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저 자신을 표현하는 게 많이 늘어났어요. 친구들을 갖게 됐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저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갖게 됐죠. 그때부터 세상에 도전할 생각을 간직하게 됐어요. 저는 듣는 것 빼고는 다 할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는 거죠. 다른 사람들이 가진 편견들을 저의 능력으로 다 깨버리고 싶었거든요.”

1987년생이니까 우리의 나이 계산으로는 28살, 하지만 생각하는 방식과 추진하는 능력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직접적이고 직선적이었다. 하겠다고 결정하고 다짐하면, 어떤 역경이 닥친다 해도 그대로 밀고 나간다는 것!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야 스스로에 대한 희망을 처음 갖게 됐다면, 그 이전의 삶이 어떠한 모습이었기에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과거를 아직도 기억하는 걸까.

“제겐 두 살 터울의 언니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언니도 저와 똑같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참 드문 경우라는데… 원인은 엄마가 드시던 약이 문제였대요. 언니를 갖기 전부터 드시던 약이었고 언니가 태어난 이후에도 계속 드셨대요. 저를 갖고 제가 태어날 때까지도 같은 약을 계속 드셨다고 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두 아이한테 청각장애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셨대요. 그런데 장난감 딸랑이 소리 같은 것에 큰 애가 반응을 안 하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작은 애까지 반응이 없는 게 염려스러워 뒤늦게 병원을 찾게 됐고, 두 자매 모두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최종 진단을 받게 됐대요. 엄마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셨어요.”

특별히 이상한 약이 아니라 어머니 몸을 위해 드시던 약이었는데, 의사가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아서 임신 중에도 복용을 계속하셨다는 얘기였다. 태어난 아기들이 뒤집기를 하고 걷기 시작하는 게 제각각 시기가 다르듯, 듣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큰 딸의 모습에 큰 걱정은 하지 않고 ‘늦는가 보다’ 하며 계셨는데, 둘째 딸마저 소리에 대한 반응이 전혀 없자 상황이 심각함을 그제야 깨달으셨다는 것이다. 선영 씨가 두 살 때 장애를 알게 됐다 하니, 언니는 네 살이 될 때까지 장애를 모르는 채 지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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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한가운데 혼자 떠 있는 느낌

“원래 살던 곳은 전남이었는데, 언니를 특수학교에 보내기 위해 서울로 이사 왔어요. 살던 지역에는 특수교육을 받을 데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저도 다섯 살 때 청각장애 전문 특수학교에 들어갔죠. 가톨릭에서 운영하며 수녀님들과 생활하는 학교였는데, 수녀님들께 참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요. 그리고 모든 게 자연스러웠어요. 수화를 배우고 수화로 대화를 나누며, 그 어떤 불편도 느끼지 않으며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했죠. 소통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서로가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학생들을 가르쳐 주시던 수녀님들한테 선영 씨가 특히 귀여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단다. 공부를 잘해서 장래희망이 학교선생님으로 정해졌고, 글을 특히 잘 써서 나중에 작가가 되라는 응원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님과 작가가 당시 꿈 많은 소녀의 미래로 새겨지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생각은 조금 다르셨던 모양이다. 특수학교 안에서만 계속 생활한다는 건 우물 안 개구리로 끝날지도 몰라서, 마침 공부를 잘하는 딸이었으니까 일반학교로 전학하는 결심을 하시게 됐단다. 그 시기가 어린 선영 씨한테는 엄청난 시련의 시작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자신이 있었어요. 공부를 잘했거든요. 더 많은 사람들과 친구들을 만나며 지내려고 일반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저는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아야 했어요. 수녀님의 입 모양을 보면서 충분히 공부할 수 있었는데, 일반학교 교실에선 선생님의 입을 아예 볼 수가 없었죠. 수화로는 모든 대화를 다할 수 있었지만, 청각장애인 입장에서 실제 발음이라는 건 ‘어, 어, 어.’ 정도밖에 나오지 않잖아요. 같은 반 친구들이 저의 발음과 반응에 충격을 받았나 봐요. 그때부터 따돌림이 시작됐죠. 바다 한가운데 혼자 떠 있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부터 ‘아, 내가 청각장애인인가 보다.’ 하는 거,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그제야 절실하게 깨닫게 된 거죠.”

가장 힘든 건 농담을 잘하는 선생님이 수업하실 때였단다. 무슨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는지 교실 안 모두가 크게 웃는데, 혼자서만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고 한다. 빙 둘러봐도 아무도 웃는 이유를 말해주는 이 없고, 같이 웃으며 어울리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힘들었단다.

“저 혼자만의 완벽한 외로움이었어요.”

새로운 환경이 그렇게 힘들었다면,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다시 특수학교에 가겠다고 요청하면 해결되는 게 아닌가 싶어 그 대목을 되물었다. 일반학교에 간 뒤 한 달 정도 지난 다음, 처음으로 그 문제에 대한 말씀을 드렸었단다. 이후로도 넋두리하듯 몇 차례 더 말씀드린 적이 있기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든 힘든 환경들을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않게 됐단다. 혼자 해결하고 견뎌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또한 부모님께서 더 힘들어지실 것 같아, 학교에서의 방황을 집에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지내게 됐다는 것이다. 2년 먼저 언니도 일반학교로 전학을 했었다고 했다. 그럼 언니의 경우는 어땠을까.

“서로 힘든 거… 공감을 많이 해서 대화를 많이 했어요. 언니한테 장애가 없었다면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했겠죠. 그런데 장애증상이 같았기 때문에, 공감을 가장 많이 하고 정말 친하게 지냈어요. 저는 언니가 저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다는 게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을 해요. 언니는 제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이거든요. 좋은 친구 같은 언니예요.”

 

성장을 위해 도전하고 싶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친구가 없었어요. 소통의 방법을 서로 몰랐던 거죠. 저한테 배려를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사실 청각장애인한테 어떻게 해주는 게 도와주는 건지, 그 방법을 아무도 몰랐던 거죠. 그래서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어요. 혼자서 모든 걸 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지내다 보니까 수화동아리가 있는 거예요. 거기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죠. 그때부터 세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세상의 문 또한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어요. 중고교 시절까지 저는 제가 누군지 잘 몰랐어요. 방황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대학의 수화동아리에선 마음껏 소통할 수 있는 친구들과 선배들이 있는 거예요. 이 친구도 거기서 만나게 된 거죠.”

선영 씨는 수화통역을 위해 곁에 함께 앉아 있던 ‘절친’ 전혜영 씨를 가리켰다. 혜영 씨의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수화에 관심이 있어서 수화동아리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선영이를 처음 만나게 됐어요. 제 인생에서 장애를 가진 첫 친구가 된 거죠. 게다가 저희 대학 역사상 첫 번째로 청각장애인 신입생이 들어온 거라서, 학교의 시스템도 일정한 변화가 생겼어요. 강의 내용을 노트북으로 대필해주는, 다른 학생들이 순서를 정해 선영이를 위해 도우미가 되는 시스템이 생겨난 거예요. 수화동아리도 20년의 역사를 가진 모임이었는데, 동아리 안에 실제 청각장애학우가 가입한 건 선영이가 처음이었어요. 그랬기에 동아리 구성원들과의 유대관계가 확실하게 돈독해졌죠.”

‘절친’이라 그랬는지, 혜영 씨를 쳐다볼 때마다 선영 씨의 입가엔 커다란 미소부터 피어올랐다. 친구의 설명을 선영 씨가 다시 이어갔다.

“청각장애학우를 위한 노트북 대필 서비스를 처음 받게 됐어요. 대학 차원에서도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많은 부분이 부족하긴 했지만, 저는 제 옆에 대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어요. 중고교 때에 비하면 너무 좋아진 환경이잖아요. 특히 교수님이 재미있는 말씀을 하실 때, 저도 같이 웃을 수 있게 된 게 너무 행복했어요. 첫 수업 때 대필 서비스가 제 곁에서 진행되는 걸 보며, 너무 감격스러워서 혼자 울었던 게 생각나네요.”

선영 씨의 전공은 패션디자인이었는데, 컴퓨터에도 관심이 많아서 두 가지를 동시에 전공처럼 공부했단다. 그런데 패션디자인을 직업으로 하기엔 그 분야의 특성상 의사소통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 같아, 전공으로써의 디자인은 포기하고 컴퓨터 기술로 사회생활을 준비하게 됐다고 한다. 졸업 후 취업을 위한 노력의 과정은 굳이 여기에 일일이 옮기지 않아도 어떻게 진행됐을지 독자 여러분 모두 짐작하실 것 같다. 장애인 채용은 늘 생색내기 수준에서 머무는 게 2014년 현재까지도 과거와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선영 씨는 모 대기업의 정보통신 담당회사에 ‘당당히’ 입사를 했다.

“저는 듣는 것 빼고는 다 잘할 수 있어요. 얼마 전 출간된 저의 에세이집 제목을 원래는 ‘도전하는 열정에 장애는 없다’라고 정했었거든요. 저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이에요. 책 본문에도 적었지만, 관상어(觀賞魚, 보면서 즐기려고 기르는 금붕어 같은 물고기) 코이(koi)는 어항에서 자라면 최대 8센티미터밖에 자라지 못한다고 하죠. 그렇지만 연못에서 자라면 25센티미터가 되고, 큰 강물에서 자라면 120센티미터까지 성장한대요. 만일 한 마리의 코이가 ‘내게 장애가 있기 때문에’라는 꼬리표에 묶여 지내왔더라면, 작은 틀 안에서 스스로를 작게 만들며 성장했을 거예요. 제가 늘 도전했던 거, 특히 중국여행을 혼자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던 이유는 큰 강물에서 자라는 120센티미터의 코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한편으로는 저의 장애가 뛰어넘을 수 없는 장애물인지 직접 시험하고 싶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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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위해 ‘한다면 한다!’

“아테네마라톤에 참가하고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해서 공식적으로 발언을 했다는 거, 저는 그 모든 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청인(聽人, 귀가 들리는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들보다 더 큰 재산을 제가 가진 게 뭔가 하면 열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열정이 저를 키운 것 같아요. 열정은 단번에 생기는 게 쉽지 않아요. 저는 8년 동안 조금씩 점점 더 크게 자라났던 것 같아요. 하나씩 하나씩 성장을 더해갔다는 거죠. 조그만 열정 하나를 더하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면 그 열정이 더 커지고, 그렇게 이루어가면서 더 키우고, 더 커지는 열정의 과정이 저의 현재 삶인 것 같아요.”

그럼 다음번에 폭발할 열정이 무엇인가 물으니까 세계 일주란다. 어디를 가장 먼저 가고 싶은지 다섯 군데만 말해 달라 하니까, 선영 씨는 약간 들뜬 표정으로 바뀌더니 아프리카・네팔・히말라야・남미・모든 오지(奧地, 문명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 결국 남극까지 줄줄이 언급을 이어갔다. 왜 하필 문명의 혜택과 동떨어진 지역들이 먼저 거론되는 것일까? 듣지 못하기 때문에 더 많은 걸 보고 싶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누구나 흔히 얘기하는 런던・뉴욕・베를린・파리・로마, 이런 곳들은 왜 언급되지 않는 걸까?

“아, 6월 29일에 유학을 가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작가 수업을 받기 위해, 2년 내외의 과정을 준비하며 런던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얘기였다. 본격적인 에세이 작가가 되기 위해, 문학의 나라라고 자신이 선택한 영국의 런던으로 혼자만의 유학을 떠나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가도 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읽고 쓰는 걸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요. 언제 어디에 있든 극복을 하는 거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사실 회사를 그만 뒀어요.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니까 결심을 했죠. 시간은 돌아올 수 없으니까 항상 뜨겁게 살고 싶거든요.”

이 말을 듣는 동안 솔직히 ‘대단한 사람’이라는, ‘정말 확고한 열정을 지닌 사람’이라는 확신이 머릿속을 휙 스쳤다.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위한 혼자만의 유학을 이만큼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었을까? 곁에 있던 ‘절친’ 혜영 씨가 귓속말을 하듯 나지막이 한마디를 몰래 전했다.

“저도 전혀 몰랐어요. 어떻게 혼자서 유학수속을 다 마쳤는지,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됐거든요.”

한마디로 멋진 사람이다. 무조건 저지르고 본다는 식이 아니라, 자신이 감당할 수 있고 도전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곧장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것! 이건 단지 ‘젊다’는 의미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될 일은 아닐 것 같다. 선영 씨가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건 무언가를 이미 이루고 완성했다는 게 아니라, 모든 걸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K. 롤링이 자신의 멘토라서, 런던에 가면 그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독자 여러분과 ‘내기’ 하나를 하고 싶다. 2년 내로 선영 씨의 인터넷 블로그 같은 여러 공간 안에 조앤 롤링과 어깨동무하며 촬영한 그의 사진이 올라올 게 확실하다는 것 말이다. 그의 멋진 도전과 멋진 성취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굳이 ‘내기’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한다면 하기’ 때문이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aery727@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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