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쉼표, 나는 그 다음을 꿈꾸고 있다 > 사람 사는 이야기


인생의 쉼표, 나는 그 다음을 꿈꾸고 있다

청각장애 발레리나 고아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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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정해지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연한 과정처럼 인터넷 검색을 사용하게 된다. 역시나…, 이번 역시 똑같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정보는 거의 보이는 게 없고, 그 사람이 세상 안에서 보여준 화려한 ‘얘깃거리’들만 눈에 띄는 게 대부분이다. 이번 호 주인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계 4대 미인대회라는 월드미스유니버시티대회에 나가 ‘성실상’이란 큰 상을 받았고, 미스데프(deaf)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진(眞)으로 선발되어 체코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출전해 42명의 참가자 중 9위로 선발됐다는 소식은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확인이 된다. 축하할 일은 축하하는 게 당연하지만, 우리가 만날 사람은 ‘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표면적인 삶이 아닌, 그의 진짜 인생 얘기를 직접 듣고 싶은 것이다.

발레리나 고아라 씨가 이번 호의 얼굴로 등장한다. 그가 어디서 무슨 상을 받았는지는 묻지도 않았고, 인생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질문에 그가 약간은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함께걸음>의 ‘사람 사는 이야기’, 그 존재 이유가 된다. 대화 중간에 눈시울을 적셔야 하는 심정마저 그대로 드러낸 그의 인생 이야기를 이 지면에 정리하고자 한다. 외면적인 화려한 경력이 아닌, ‘인간’ 고아라 씨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독자 여러분과 만난다.

 

수화 아닌 구화로

“장애 중에서도 특히 청각장애인들은 소리로 전달되는 정보를 수용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청각 대신 시각적으로 보는 것에 상당히 민감하게 발달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청각장애를 가진 저의 친구들도 미술 분야로 많이 진출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귀로 들어야 하는 분야에 도전한 거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 같아요. 잘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가 음악 중심의 발레를 한다는 것이 특별한 이야기가 되는 것 같은…. 어쨌든 저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참 잘 선택한 인생길이라고 생각해요.”

고아라 씨는 청각장애 3급, ‘감각신경성 난청’을 생후 4개월 때 얻게 됐단다. 1988년생 용띠라면 어느 정도 의료혜택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강원도 홍천의 고향집에서 맞이한 고열과 몸살은 여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단 며칠’의 방심이 평생의 장애를 불러오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아기가 반응을 해야 하는데, 고열과 몸살을 앓고 나서 반응이 전혀 없으니까 이상하다 싶어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야 난청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되셨대요. 지금까지 오른쪽 귀는 아예 안 들리고요. 왼쪽 귀는 박수소리 정도? 보청기를 끼면 그보다 잘 들리긴 한데, 어렸을 때부터 똑같은 그 상태로 계속 유지가 되고 있어요.”

귀가 안 들리면 당연히 음성발음의 문제가 뒤따르게 된다. 발음이 제대로 안 되다 보니까, 주위에서 이런저런 지적을 많이 듣게 됐단다. 그건 당연한 스트레스로 남게 될 뿐이다.

“제가 3살이 됐을 때, 서울에 있던 청각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의 부설 유치원에 다니게 됐어요. 거기서 저는 수화교육을 받지 않고, 처음부터 구화수업(口話 : 교사의 입술 모양을 따라 그대로 발음 연습을 하는 교육)을 받게 됐죠.”

그렇다면 수화교육은 아예 안 받았다는 건가? 그렇단다. 교육열이 워낙 높으셨던 어머니의 판단에 따라, 수화 대신 구화에 전념하게 됐다는 것이다.

“구화교육을 받고 나면, 오후에 귀가한 뒤에 그냥 아이들을 집에 풀어놓고 지낼 게 아니에요.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그랬대요. 그런데 저의 엄마는 달랐어요. 제가 집에 오면 잠들 때까지, 깬 이후에도 계속 구화교육을 시키셨죠. 그 덕분에 제가 이만큼 편하게 말을 하게 되지 않았나 싶거든요. 실제로 같이 지내던 친구들보다는, 제 발음이 훨씬 빠르게 사회성을 갖게 됐으니까요.”

맞는 말 같다. 청각장애를 가진 입장에서, 수화 아닌 구화로 이만큼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뭐랄까, 고아라 씨한테 불편한 표현이 될지도 몰라 조심스럽기는 한데, 그의 발음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미국인들의 발음과 억양 같았다. 키가 크고 몸의 균형도 탄탄하게 잡혀 있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으로 인식되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실제로 만남의 자리였던 커피전문점에서, 아라 씨의 주문을 돕던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영어 단어를 떠올리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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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발레야!

“제가 어렸을 때 워낙 밥을 많이 먹었대요. 그래서 제가 뚱뚱해지는 게 싫으셨던 엄마는 체중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딸이 앞으로 뭘 잘할 수 있을지, 무얼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개인적으로 잘하는 건 하나쯤 있어야 하는데 그게 뭔지를 고민하면서 이것저것 다 학원에 보내며 저의 재능을 알아 보셨대요. 피아노, 서예, 컴퓨터, 무용 그리고 발레까지, 정말 안 다녀 본 학원이 거의 없었다고 말씀하시거든요.”

그렇다면 그게 즐거웠을까? 왜냐하면 부모의 강요(?)에 의한 학원 출입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요즘 학생들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건 아니란다. 아라 씨는 그 과정 중에 발레가 가장 흥미로웠고, 특수학교에서 일반 학교로 옮긴 이후에도 발레는 가장 적성에 맞는 분야로 계속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발레가 자기 인생의 길로 정해졌다는 걸까? 그때까지는 아니었단다. 단지 가장 좋아하는 취미였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재미가 있었어요. 그런데 중학교 진학 이후의 과정부터는 점점 더 어렵게 느껴졌거든요. 정식으로 발레를 하려면 뼈와 근육의 상태를 인위적으로 바꾸듯 조정해 가야 하고, 그런 틀 안으로 자신의 몸을 맞춰야 하는데, 저는 그게 너무 힘들었던 거예요. 아마도 발레를 그만두게 됐다면,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데 반전은 또다시 ‘엄마’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어머니께서 어느 월간지를 읽으시다가,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발레학교(이전 볼쇼이 발레단)의 객원교수였던 우리나라 어느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수소문 끝에 그 분께 직접 연락을 하게 됐단다. 결론은 ‘서울로 와서 보자’는 대답. 그 다음엔 러시아의 그 발레학교로 단기연수를 갈 한국의 발레 지망생들이 있는데, ‘같이 갈 수 있다면 같이 가자’는 제안이 뒤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고아라 씨는 중학교 2학년 나이에 세계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그 공간에 찾아가서, 진정한 세계 최고의 실력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가슴 뜨겁게 느끼게 됐다고 한다. 단지 보름 남짓한 기간이었지만, 그 곳에서 받은 감흥은 정말 남달랐다는 것이다.

“당시 전 세계에서 유학을 온 제 또래의 학생들 모습을 보며, 정말 큰 충격을 받고 일면의 자격지심까지 느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랑 같이 갔던 십여 명의 우리나라 연수팀의 실력도 저보다 월등히 뛰어났거든요. 지역 안에 머물며 발레를 연습하던 저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났던 거죠. 제가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인식될 수밖에 없을 만큼, 정말 다들 최고로 잘하는 사람들밖에 없었어요.”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발레의 인생, 이 길을 가자!’ 그게 결론으로 내려졌단다. 세계 최고의 현장을 직접 보고 왔으니, 눈높이가 껑충 높아졌을 건 분명한 일 아닌가. 당연히 유학을 가고 싶다고 부모님께 졸랐지만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유학은 접게 됐고, 그 대신 유니버설 발레단이 부설한 서울 모처의 아카데미에서 기초부터 다시 다지기 시작했단다. 조금 늦긴 했지만, 진정한 기초를 다지는 작업부터 다시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매순간이 위기였다는 거

가장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발레를 제대로 배운다는 건 엄청난 비용이 지속적으로 필요할 텐데, 그 비용을 감당하며 집안의 지원이 계속됐다는 것일까? 정말 많이 힘들었단다. 지역의 강의 비용보다 몇 배가 더 드는 서울에서의 강의는, 결과적으로 집안 재정이 힘들어지는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는 그의 고백이 이어졌다. 어머니께서 남몰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이제야 ‘그게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하는 답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어머니께서는 후회 같은 건 하지 않으셨을까?

“무조건 절대, ‘절대’라고 말씀하시거든요. 지금도 저의 엄마는 절대 후회하지 않고 잘한 결정이라고 말씀하세요. 제 나이가 이십 대 중반을 넘어섰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엄마 앞에서는 아기일 뿐이잖아요. 엄마한테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드린 적이 있었어요. 왜 집안의 부담을 짊어지면서까지, 저를 이렇게 발레를 시켰느냐고 말예요. 엄마는 ‘네가 하고 싶으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거를 다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한 거’라는 말씀만 하세요. 단지 그 생각밖에 안 하셨다는 거예요. 부모의 마음이야 누구든 다 똑같겠지만, 저는 지금도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는 무조건 ‘감사합니다!’ 그 표현 이외에, 그 어떤 다른 표현도 떠오르지가 않아요. 그냥 무조건 말씀드리고 싶어요. ‘엄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요.”

청각장애는 현실이고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불편함과 좌절 비슷한 게 반복됐을 텐데, 개인적으로 인생의 위기는 언제였다고 기억되는지를 물었다. 첫 번째는 중학교 시절이었단다. 요즘 용어로 흔히 말하는, ‘왕따’가 아닌 ‘은따(은근히 따돌림)’가 늘 존재했다고 한다. 그의 발음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된 것 같은데, 당시엔 쌍시옷(ㅆ)과 쌍지읒(ㅉ)의 발음을 제대로 못했거든요. 이것도 구분 못하느냐고 놀리는 친구들이 있었고, 어떤 친구들은 제가 듣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로 제 이름을 계속 부르며 장난을 치는 애들도 있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이제야 처음으로 고백하는 거지만, 너무 힘들어서 엄마한테는 학교에 갔다는 거짓말을 하고, 하루 종일 밖에서 배회하며 숨어 있다가 집에 들어간 적도 있었어요. 그만큼 학교가 싫었거든요. 학교 자체가 아니라 친구들이 싫었던 거죠. 어차피 가도 친구들이 놀릴 테고, 저는 그걸 극복할 방법을 당시까지는 찾지 못했어요. 지금과는 달리 너무나 소극적인 아이였거든요.”

성인이 되어 고향인 홍천의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깜짝 놀란단다. 어떻게 성격이 이만큼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었는지를 이해 못할 만큼, 완전히 다른 성격이 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얘기였다. 중2 시절을 ‘첫 번째 인생의 위기’라고 표현했으니, 그 다음은 ‘두 번째’로 존재하는 위기가 따로 있었다는 걸까? 이 질문을 받은 고아라 씨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네, 매순간이 위기였지 않았나 싶어요. 정말 위기였던 순간이 언제였냐 하며 딱 하나만 말하라고 해도, 저는 솔직히 그걸 집어내지 못하겠어요. 정말 모든 순간순간이 위기였거든요. 예를 든다면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나 마찬가지로, 수업에 들어가면 강의 내용을 100% 다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요. 그 자체가 위기였죠. 또 발레를 할 때도 음악에 익숙해져야 하는데. 비장애인 친구들은 한두 번 듣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맞춰가는 게 가능하지만, 저는 눈치를 봐가면서 거의 들리지 않는 음악소리에 집중하며 동작을 맞춰야 했고…. 그렇게 매순간이 위기 그 자체였어요.”

그렇다면 공연하거나 연습하던 과정 중에, 음악을 놓쳐서 실수를 한 경우가 많았을 것 같다고 물으니, 고아라 씨는 크게 미소 짓는 표정으로 바뀌며 대답을 이었다.

“무용하는 사람으로서 음악을 못 듣고 실수하는 것보다는, 제 실력이 부족해서 내는 실수가 더 많았어요. 진짜예요. 아다지오(Adagio, 느린 곡)처럼 악센트가 없는 느슨한 음악은 잘 못 들어요. 대신에 비트가 있고 악센트가 확실한 알레그로(Allegro, 빠른 곡)는 잘 따라할 수 있죠. 왜냐하면 박자가 정확히 들리니까요. 박자가 확실한 음악은 제 마음속으로 박자를 세어가며 하는 편인데, 아다지오는 정말 많이 들어가며 진지하게 준비를 해야 돼요.”

그렇다면 음악 자체를 거의 외우는 수준까지 반복해서 익혀야 한다는 건가? 그렇단다. 그냥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비장애와는 다르게, 서너 배 정도를 음악 듣는 시간으로 투자해야만 같이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된단다. 그럼 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됐던 연습이나 공연은 언제였을까? 대학교 2학년 때 공연의 주인공이 됐을 때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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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아닌 쉼표

“교수님께서 저한테 주인공을 시켜주셨어요. 주인공은 무대 중앙에서 혼자 무대를 장악해야 하는 역할이잖아요. 여럿이 같이 하는 군무는 눈치껏 보고 들으며 동작을 맞춰 가면 되거든요. 교수님께서 ‘너 혼자 해라, 이거 해 봐라’ 하며 그 주인공 역할을 주셨을 때, 아마도 음악을 가장 열심히 집중해서 들으며 준비했던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전까지는 솔로로 혼자 하더라도 저 개인 작품의 음악이었으니까 부담이 적었는데, 대학 전공으로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이잖아요. 정말 밤새도록 듣고 또 들었어요. 처음엔 도무지 무슨 음악인지, 어느 음악에 어떤 동작을 해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거든요. 적응하는 데만 2개월 넘게 걸렸던 것 같아요.”

대학시절 그의 이름 옆에는 항상 ‘성실’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고 한다. 당연히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렇게 몇 배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남들과 같이 설 수 없는 입장에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학원에서 발레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 대목에서 궁금증 하나가 떠올랐다. 왜 대학원을 갔을까?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사회로 곧장 진출하는 게, 더 많은 기회를 만나게 되는 지름길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제가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에요.” 그는 양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대학교 4학년 때 국립발레단의 오디션을 보려고 했거든요. 처음에 인턴 오디션을 봤고, 그 다음 정(식)단원 오디션이 있었어요. 그래서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오디션 일주일 전에 오른쪽 아래 갈비뼈가 골절이 난 거예요. 부러진 건 아니고 심하게 금이 간 거죠. 심적으로 계속 부담감 속에 있었고, 반복적으로 부딪치거나 무리한 스트레칭을 했던 게 원인이었던 것 같은데, 춤 동작이 나오지 않을 만큼 아픈 거예요.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아플 정도니, 정말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린 거죠.”

의사 선생님은 오디션을 보지 말라고 권했단다. 지금 생각하면 뼈가 부러지더라도 오디션을 봤어야 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고아라 씨는 며칠 동안의 깊은 고민 끝에 타협 아닌 타협을 결론으로 내려야만 했다고 한다.

“갈비뼈 골절로 동작 자체가 어려운데, 심사위원들이나 다른 지망생들은 제가 동작도 제대로 못해서 떨어졌다고 생각할 게 아니에요. 그게 자존심으로 용납이 안 돼서, 그래서 오디션을 포기했어요. 꼭 갔어야 했던 길이었는데…, 원치 않던 부상으로 인해 제 인생의 길이 달라진 거죠.”

날씬한 몸매와 뽀얀 살결이 먼저 떠오르는 발레리나지만, 저렇게 큰 동작을 원숙하게 반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상에 시달렸을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봤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물었더니, 고아라 씨는 고교 시절부터 워낙 많은 부상을 당해 그 후유증이 몸 여기저기에 지금껏 남아 있단다. 가장 심했던 부상은 고등학교 때였는데, 작품 연습을 하면서 점프를 하다가 그대로 미끄러져서, 공중에 위치하던 무릎을 맨바닥에 정면으로 찧고 말았을 때였다고 한다. 지금도 아프단다. 왜냐, 하루 종일 발레 연습에 몰입해야 했던 예술계열 고등학교였기에, 병원을 제대로 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기 때문이란다. 대학교에 가서도 뼈가 아프고 근육이 아프다는 얘기는 누구 앞에서도 꺼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엄마한테도 말을 안 하고, 저 자신을 꾹꾹 눌러가면서 무용을 해왔어요. 그렇게 20년 가까이 무용 인생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던 거죠.”

그런데 석사학위를 받은 이후로 발레를 잠시 쉬고 있단다. 아주 그만두는 게 아니라, 앞만 보며 달려온 20년의 무게감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여러 곳에서 들어오는 공연 제의를 받아들이며 지내는 중이라는데, 무게감을 내려놓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물으니 여행이란다.

“진부한 표현인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살아오면서 생각해 봤던 게 있어요. 사실 꿈이라는 건 목표잖아요. 그런데 원하는 직업이 목표인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게 목표인 사람, 세상은 그렇게 나눠지는 것 같아요. 저는 대학을 다닐 때까지는 직업과 진로를 추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사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일까요? 지금 많이 행복해요. 활동을 잠시 안 하고 있고 그냥 프리랜서로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대학 다닐 때보다는 많이 편해졌더라고요. 꿈을 잠시 내려놓으니까 편해진 거죠.”

계속 앞만 보며 달려온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안식년이다. 1년 생활에서는 휴가가 될 것이고, 일주일의 생활에서는 주말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고아라 씨는 스스로 만든 안식년 한가운데 머물러 있는 셈이 된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도, 생의 어느 한 순간에는 잠시 쉼표를 찍고 가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 쉼표를 찍고 있는 상태이고, 그 쉼표가 너무 길어져도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음 생의 결정 또한 어서 내려야겠죠. 열심히 사는 많은 분들은 그 쉼표를 언제 적재적소에 잘 찍느냐에 따라, 그 이전보다 더욱 더 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떤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 해도 전 자신 있어요. 더 성실하게 더 열심히 해내면 되니까요.”

먼 인생길로 볼 때는, 고아라 씨의 현재 나이는 출발선에서 조금 앞으로 나와 있는 정도가 아닌가. 발레든 무엇이든, 최종 결정이 그의 선택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기대 이상의 멋진 모습으로 그가 다시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지금 가장 하고 싶다던 여행길에서 돌아온 그가 손가락 브이(V)를 내보이며 활짝 웃는 모습을 곧 보여주리라 기대한다. 진정한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가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그와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는 반드시 증명해 낼 것 같다.

 

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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