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그 자체를 기록하고 싶다
본문
자신을 ‘창작을 즐기는 사람’이라 소개해 달라고 했다. 개인 소개를 영화감독으로 하면 되느냐고 간단히 물었는데, 자신을 표현할 한마디를 찾기 위해 그는 한참이나 고민을 반복했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단 한 음절로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밝히는 짧은 음성과 눈빛, 그리고 ‘말판’이라고 부르는 A4지 형태의 자판이 전부였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의견을 하나씩 짚어 가면, 곁에 있는 이들이 한 글자씩 발음으로 따라하며 그의 의견을 알게 되는 방식이었다. 그의 이름을 표현한다면, 손가락으로 이렇게 하나씩 짚어 가면 된다. ㅇ·ㅣ·ㅊ·ㅏ·ㅇ·ㅎ·ㅗ·ㅏ·ㄴ.
지난 4월 8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제13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 <그래! 내가 사랑한다!>, <소란> 두 편의 단편영화를 제작 출품한 이창환 씨가 이번 '사람 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왼손 손가락으로 말판을 힘겹게 짚는 것 이외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의 생각은 투명하고 긍정적이었으며 두 눈빛은 유난히 맑게 빛났다. 특히 툭툭 던지는 농담으로 대화 분위기를 이끄는 힘도 인상적이었다. 이제 그의 인생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기로 한다. 대화의 진행을 위해 그의 곁에서 도움을 준 강내영 씨(베리어프리 영화위원회 화면해설작가)와 대학 후배 김준근 씨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손끝으로 나를 말한다
이번에는 글로 풀어내는 표현 방식도 다르게 해야 할 것 같다. “이러이러했죠.” “그랬어요.” 하는 음성의 언어가 아니라, 그의 손가락 끝에 닿는 문자 그대로 받아 적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큰 따옴표 안에 “이랬다.” “저랬다.”라고 적는 게 낯설고 어색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이창환 씨의 언어표현이기에 그 방식 그대로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예를 든다면 이런 식이다. 그의 신상을 알기 위해 물었던 질문의 대답은 이랬다.
“뇌병변이란 용어(가) 없던 시절(이니까) 지체장애 1급, 선천성장애, 79년(생) 양띠, (태생은) 대구, (사는 곳은) 대구 수성구, (형제는) 남동생 둘, 장남.”
이렇게 딱딱한 언어로 글을 정리한다 해도, 독자 여러분은 자음과 모음을 하나씩 짚어가는 그의 손길을 떠올리며 편안한 음성처럼 받아들여 주시면 좋겠다. ‘말판’이라는 평면 위에서 만들어지는 언어의 힘은, 말 잘한다는 이들의 유창한 달변보다도 훨씬 더 가슴에 직접 와 닿았기 때문이다. 선천성장애라 함은 비장애의 경험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떤 기억이 어떤 형상으로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부모님이 굉장히 밝고 열린 사고로 키우셨다.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고, 너무 사랑 받고 자랐다. 그냥 똑같이 평범하게.”
그럼 세상을 만나게 되는 시점은 언제였을까?
“입학 전에는 완전히 가족끼리만 (있었는데), 학교를 간 다음부터 너무 좋았다. 친구들을 만나게 돼서. 초중고 모두 특수학교 (다녔다). 그래서 선생님과 친구들 모두 가족 같다. 12년 동안 같이 있어서.”
옆에 가까이 앉아 그의 손길에 따라 음성을 더하고 문장을 만들던 두 명의 길동무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이창환 씨와 인간관계를 맺게 됐느냐고 말이다. 여성인 강내영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애인재활협회에서 주최한 장애청년드림팀이라고, ‘6대륙에 도전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거기에 저희가 2006년 2기로 참가했었거든요. 그래서 미국 시카고에 가서 장애인직업재활을 주제로, 시카고에 있는 관련 기관들을 돌아보고 왔어요. 그때 같은 팀으로 처음 만나게 된 거죠. 사실 창환이는 제가 태어나서 만난 최중증장애인이었거든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던 것 같아요. 몸이 더 굳어 있었던 것 같고, 이 친구가 말을 못하니까 대화가 안 되잖아요. 게다가 처음 접한 장애유형이어서 선뜻 가까이 하지 못했는데, 그때 교수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얘가 몸은 이렇지만 굉장히 스마트한 친구’라고 말이에요.”
강내영 씨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그때까지는 이해 못했단다. 그런데 과제를 같이 작성하기 위해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자료를 함께 만들다 보니, 생각과 성향이 서로 아주 많이 닮은꼴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됐고, 더 편하게 마주할 수 있는 친구가 된 것이란다. 그 설명을 듣던 이창환 씨의 손끝이 곧장 말판으로 옮겨졌다. ‘절친(절친한 친구)’이란다. ‘베프(베스트 프렌드, best friend)’라면서 얼굴 가득 큰 웃음을 지었다. 대화를 시작할 무렵의 긴장 같은 건 모두 사라진, 아주 편안해진 마음이라는 눈빛이었다.
후회한 적 없는 선택의 삶
특수학교 시절이던 고2 때, 이창환 씨는 그때까지는 없던 학교 축제를 최초로 만들었단다. 어떻게 그런 도전이 가능했을까? 자신이 학생회 회장이었기에 제안하고 실행했던 거란다. 거창한 행사무대나 문학제 같은 프로그램 없이 카페 같은 분위기 속에 작은 공연과 시화전 정도를 하는 수준이었지만, 그 행사를 치르면서 그는 처음으로 미래의 꿈을 갖고 간직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손끝이 말한 그 꿈은 ‘피디’ 즉, 프로듀서의 삶이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 전공을 언론매체학부로 선택한 건가? 그건 아니란다.
“수능 치고 (나서) 전공에 대해 고민했다. 원서 마감 몇 시간 전까지. 12년 특수학교를 다녔으니까, 대학까지 특수학교를 가긴 싫었다. 너무 숨 막혀서.”
그래서 일단 사회학부로 진학을 하긴 했는데, 그의 표현 그대로 ‘기적’이 일어났고 ‘운명’ 같은 일이 벌어졌단다. 1학년 후반기가 되던 무렵, 학교에 언론매체학부가 신설된다는 게 아닌가. 세부전공을 선택하는 2학년 때부터, 그는 그토록 원하던 피디의 꿈이 갑자기 손에 잡히게 된 셈이다. 시기상으로도 정말 운명 같은 환경이 펼쳐졌기에, 당시를 회고하던 이창환 씨는 전공이 적성에 맞았느냐는 질문에 곧장 대답을 이었다.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피디의 꿈이 영화제작으로 표출되며 이어졌다는 걸까? 2007년에 장애인복지관에서 미디어 강좌를 듣고, 과제로 만들었던 15분짜리 동영상이 자신의 첫 작품이 됐다고 한다. 제목은 ‘재미없게 봐 주세요’. 외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로 집 안에 머물러야 하는 자신의 하루 일상을 담은 내용이었단다. 그렇다면 과제가 아닌, 자신의 기획으로 직접 만든 첫 작품은 무엇인지 물으니까, 그 작품의 제목은 ‘재미있게 봐 주세요’란다. 첫 작품이 너무 우울하다는 의견이 많아서, 일상생활이 재미없고 우울한 면만 있는 건 아니라는 의도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세 번째 작품은 장애인식개선 동영상이었는데, 그 작품은 장애인근로자문화제에 출품한 결과 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맞기도 했단다. 그렇게 한 편씩의 영화를 새로 제작해가면서, 이번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 출품한 두 편까지 모두 일곱 편의 작품을 그동안 만들게 됐다고 한다.
이번 두 편의 출품작 중 <소란>은 말을 하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 겪는 어려움과 에피소드를, 무성영화시대의 대가인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구성으로 제작해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래! 내가 사랑한다!>는 항상 무슨 얘기든지 “응!” 하나의 발음만 할 줄 아는 중증장애인의 사랑이야기를 그렸다. 누가 보더라도 이창환 씨 자신의 삶이라는 게 느껴지는 내용구성이다. 이 작품을 부연설명하기 위해, 이창환 씨가 직접 보내 준 이메일의 내용 일부를 아래에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다.
“글쎄요. 힘든 부분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힘든 부분은 한 단어로 ‘사랑’인 것 같아요. 저 자신과의 사랑, 부모님과 동생과의 사랑, 하나님과의 사랑, 친구들과의 사랑, 이성과의 사랑까지 말이에요. 어릴 때는 마음이 순수한 터라, 사랑이 지금보다 쉬웠던 것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저의 장애를 감사했었고 사랑했었고, 가족과 주위의 사람들하고도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지냈어요. 그래서 저의 장애가 아주 심해도, 밝고 명랑하게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고 저 자신과 맞닥뜨리는 현실 속에서 이해관계가 복잡해지고 때론 방황도, 때론 낙심도 하면서 욕심과 이기심 등으로 인해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어요. 저는 영화를 잘 만들어서 유명해지는 것보다는, 참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사랑을 베풀고 겸손하며 배려 깊은 그런 내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힘들지만 항상 노력하는 중이고, 놓쳐서는 절대 안 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핵심은 인간 그 자체를 그리는 일이다
지금 당장 가장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물으니 여행이란다. 그럼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은 언제였느냐고 다시 물으니, 첫 번째는 부모님 없이 친구들과 처음으로 떠났던 고교 수학여행이었고, 두 번째는 강내영 씨와의 우정이 시작됐던 미국 시카고 여행 때 호텔 수영장에서 난생 처음 공개적으로 수영을 했던 때가 가장 큰 추억으로 남아 있단다.
그럼 지금 당장 떠난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섬이란다. 섬에 가서 그 곳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한다. 섬사람들의 삶이 궁금하고, 정말 가능해진다면 휠체어로 혼자 해외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꿈도 간직하고 있단다. 가능과 불가능 여부만 따지고 있다 보면, 실제로 이뤄지고 진행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여러 섬들을 찾아간다는 거, 혼자만의 해외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것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내일의 실천 아닌가.
어쩌면 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기획을 한 뒤 제작과 편집까지 도맡는다는 건, ‘이창환’이라는 개인이 가진 또 하나의 꿈을 완성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길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 걸어가겠지만, 개인적인 목표나 구상 같은 게 있는지 물으니, 그는 고향인 대구에 장애인문화커뮤니티 같은 공간을 만들어 활동하고 싶다고 한다. 대학 후배인 김준근 씨의 엄지손가락이 이창환 씨 얼굴 앞에 펼쳐졌다. 꼭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이 전해지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가 미리 적어두었다며 보여 줬던 메모의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저는 장애인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영화만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장애인 이전에 장애가 있는 인간을 표현하고 싶거든요. 한 인간의 욕망적인, 삐뚤어져 있는, 이기적인, 일탈적인 내면과 모습들을 그려나갈 거예요. 당연히 우리의 밝은 모습도 그릴 거고요. 때론 진솔하게, 때론 낙원처럼, 때론 배를 잡고 뒹굴 정도로 재미있게 묘사하는 것이죠. 모든 것의 핵심은 인간 그 자체를 그리는 거예요.”
영화제에 출품한 자신의 영화가 관객 앞에 상영될 시간이 되어, 우리의 대화를 마쳐야 할 때가 됐다. 개인 소개를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되느냐는 질문은 이때 나왔다. 뜻밖에 그는 매우 난감한 표정으로 심각해지더니, 말판 위의 손끝을 어떤 자음과 모음에도 대지 못한 채 정지화면이 되어버렸다. 몇 개의 첫 글자만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여러 차례, 그는 회심의 미소 같은 표정으로 바뀌더니, 딱 한마디를 남기고 웃으며 돌아섰다.
“창작을 즐기는 사람.”
글 채지민 기자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