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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자립생활운동 활동가 황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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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엔 말이 없다. 그런데 중요한 집회현장에 그가 빠진 적은 없다. 언어보다는 행동으로 발언한다. 가장 앞장서는 활동을 하는데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수줍은 청년의 모습이다. 주변의 지인들이 말하는 인물평가에선, 항상 A+(에이플러스, 최고점)의 의견이 모아진다. 뭔가 확실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주변에서 먼저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동안 수록했던 <함께걸음>의 수많은 집회 관련 화보에 그의 모습은 항상 중심인물로 기록되어 있고, 개인적인 사회생활 여기저기에서도 그와의 마주침은 계속됐다. 그의 넘치는 에너지는 어떤 의미로 분출되는 걸까?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자리에서 만나고 싶었던 ‘1인’을 드디어 붙잡아(?) 마주앉게 하고 긴 대화를 나눠 봤다.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활동가인 황인현 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 글을 접하는 아주 많은 이들이 ‘아, 이 사람!’ 하며 반길 것 같다. 이 ‘사람 사는 이야기’ 지면에서 그를 함께 마주대하기로 한다.

 

호기심, 궁금증, 세상 속으로

웃는 모습이 호탕하다. 그건 가릴 게 없다는 의미가 된다. 자기 자신을 얘기할 때도 ‘A라면 A’, ‘B는 B’ 하며 의견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 이건 눈치를 보듯 이런저런 줄다리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서로가 얼굴을 이미 알고 지낸 건 8년이 훌쩍 넘은 것 같은데, 정작 명함을 교환하며 정식인사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인연이라는 건, 그와 처음 만났던 2008년 서울시청 앞 노숙농성 때가 ‘탈시설’의 희망을 품기 시작하며 그가 이 세상 안으로 처음 등장했던 시기였다는 거다. 그러니까 8년 전, 그 이전에는 그를 만날 길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시설의 틀 안에서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에 시설에 들어가 25년을 살았어요. 1990년 1월 2일부터 25년 동안, 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지냈던 거죠. 나오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올 방법을 몰랐어요. 그래서 싸웠어요. 모든 게 ‘안 된다’, ‘하지 마라’뿐인 그 좁은 공간을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황인현 씨의 경우는 매우 독특한 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시설에서 아침 일찍 나와 저녁 늦게 되돌아가는, 다시 말해 바깥의 세상으로 출퇴근하는 방식을 나름의 선택으로 쟁취해냈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방식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원인이자 결과는 결국 부양의무제로 귀결된다. 연결이 거의 끊긴 세상 안에 1촌 관계의 가족이 있고 그 가족에게 일정한 재산이 있다고 하니, 국가는 수급비 등의 지원을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설 밖으로 나와도 국가는 아무것도 안 해주겠다는 입장이고, 그게 아쉽다면 연락도 안 되던 가족을 찾아가라는 것! 참 멋진(?) 대한민국이다. ‘부양의무제 폐지!’의 외침이 왜 피맺힌 절규로 울려 퍼져야 하는지는 이 대목에서도 절절하게 확인이 된다.
“시설 측에서도 내심 골치 아픈 문제가 풀린다 싶었는지, 저의 출퇴근 생활을 허가했어요. 그 시설에서는 제가 처음으로 이 방식을 시도한 거죠. 외출사유를 적는 장부에 사인을 하고, 시간과 외출 장소를 대강 적은 뒤 매일 나왔어요. 시설 안은 너무 답답했고, 바깥의 세상은 너무너무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특정한 계획이 없어도 무조건 밖으로 나왔어요. 처음 나왔을 때는 길 자체를 몰랐고, 지하철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몰랐죠. 외부 생활 적응에 대한 그 어떤 훈련도 안 되어 있으니까, 모든 게 시행착오였고 마주치는 것 전부 다 장벽이었어요. 그래도 무작정 나왔어요. 세상을 향한 저의 호기심이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만들었거든요. 그때부터 시설은 제겐 단지 하숙집에 불과했어요.”
집회 현장이나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도, 황인현 씨의 얼굴은 언제나 약간 찡그린 듯 무덤덤한 표정뿐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언가를 뚫어지게 주시할 때가 많고, 이동이 시작되면 속도가 정말 빨라진다. 나름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을 내린 뒤의 행동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건, 매번 그와 마주칠 때마다 느끼던 그의 생활방식이 분명한 것 같았다. 투쟁의 현장에서도 가장 먼저 거리로 돌진하는 건 황인현 씨다.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인 대응이 아니라, 뭔가 미리 준비한 생각과 결론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집회나 기자회견을 하다 보면, 제 안에서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어요. 아닌 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거든요.”


만들어진 장애

“예전 시골집에서 제가 잘 놀며 지냈는데, 돌 즈음의 어느 날 제가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있었대요. 그래서 아기가 좀 이상하다 싶다면서, 할머니께서 병원에 데리고 가라 하셨대요. 그런데 아기였던 제가 병원에서 눈을 뜨면서, 몸에 꽂히는 주사바늘에 놀라 경기(驚氣)를 일으켰대요. 그 경기가 심했던가 봐요. 그래서 병원에선 해결이 안 돼서 한의원으로 갔는데, 한의원에서는 그 아기 몸 전체에 침을 놨대요. 조그만 아기한테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침을 가득 놨다는 거죠. 나중에 한의사가 아기의 몸을 만지며 확인하니까, 아기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대요.”
뇌병변장애 1급이 현재 그의 장애등급 명칭이다. 그런데 잠을 좀 오래 잘 수도 있는 아기의 상황을 그대로 놓아두었더라면, 병원과 한의원의 치료와 처방이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정말 그랬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에게 당시의 상황을 직접 듣게 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자문자답해야 했던 궁금증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기가 어느 날 유별나게 피곤해서 오래 잘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누가 잘못하고 누구의 과실이라는 점을 굳이 따지자는 건 아니다. 다만 안타까운 사실은 그의 최초 장애명칭이 소아마비로 판정 났다는 점이다. 오진(誤診)이 분명한 진단으로 인해, 실제 장애가 더욱 심각하게 진행된 분들을 그동안 너무 많이 만나봤기 때문에 민감해지는 것 같다. 황인현 씨의 경우를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애써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대답은 음성 없는 말줄임표로 대신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이건 아니다!

그는 7살 전후가 돼서야 앉는 자세가 가능해졌단다. 언어를 사용하게 된 건 그 이후란다. 시골집 아주 조그만 마당에 작은 돗자리를 깔아놓으면, 그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지내던 게 그의 세상 전부였다고 한다. 농사일에 바쁘던 부모님은 당시 ‘국민학교’로 불렸던 초등학교에 자식을 보내라는 통지서를 받고 아주 많이 흐느끼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를 학교에 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집안은 정말 생계 자체가 힘겨운 상황이라서 초등학교 입학은 떠올릴 여유마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좁디좁은 세상뿐이던 그를 실제 세상으로 불러낸 계기가 두 차례 있었다고 한다. 17살 때 그리고 20살 때였는데, 결과의 옳고 그름은 본인 이외엔 판단할 문제가 아닐 듯싶어 사사로운 부연설명은 줄이는 게 나을 것 같다.
“열일곱 살 때 같은데, 시골 옆집에 저보다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OO재활원에 다닌다면서, 그 집 어른들이 저의 부모님께 거기에 한번 데리고 가 보라 하신 거예요. 버스를 타고 처음 세상을 보게 된 거라서, 그때는 솔직히 너무 기뻤어요. 멀리 밖으로 나간다는 게 정말 신났거든요. 강화에 살면서 서울까지 엄마 등에 업혀서, 엄마가 안 되면 아빠 등에 업혀서 1년을 그렇게 재활원에 다녔죠. 너무 비싼 기숙사는 아예 생각도 못하고, 매번 통학으로 다녔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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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월, 제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로 향하던 황인현 씨가 경찰의 방패막에 가로막히고 있다.

목발을 잡고 걷게 해준다는 재활원의 권유에 따라 그 힘든 먼 길을 다니기는 했는데, 너무 먼 길에다가 재활치료에 드는 비용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부담이 돼서, 결국은 1년 만에 그만두게 됐다고 한다. 목발을 잡고 걷는다는 건 물론 해보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당시 아버지께서 저한테 계속 더 하고 싶은지 물어보셨어요. 저는 더 하고 싶다는 말씀을, 그 의견을 차마 꺼내지 못했어요. 당시는 정말 먹고사는 자체가 힘든 집안이라는 걸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두 번째 제안은 20살 때 일이다. 인생 자체가 뒤바뀔 제안은 매형이라는 분이 하셨단다. 시설이라는 게 있다고 말이다.
“한 번 가서 구경해 보라고 해서 가 봤어요. 구경하고 사흘 후에 짐을 싸고 들어가게 됐죠. 당시까지만 해도 집안이 저 때문에 풍비박산이 났다는 마음의 부채감이 있었고, 시설에 대한 특별한 거부감 같은 건 크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단 들어가자고 했던 건데…, 그게 25년이라는 세월을 묻어버리게 만든 거죠.”
‘1990년 1월 2일’이라는 시설 입소일자를 아직까지도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집안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는 건 당연한 결론이겠지만, 그날 이후로 어떤 인생이 펼쳐지게 되는지에 대한 예상은 전혀 못했다는 게 아닌가.
“똑같이 정해진 시간표대로 살아야 했어요.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똑같은 시간에 자야 했죠.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밥을 매일 먹었어요. 밥이 형편없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이런 삶이 매일매일 반복된다는 사실이 더 서글펐어요. 개인적인 별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요.”
그러다가 시설 직원들이 몰래 귀띔을 했단다. 시설에 비리가 있어서 이걸 캐기 위해 싸워야 하는데, 자기들만의 힘으로는 힘들다고. 그러니까 같이 도와주면 이길 수 있을 테니까 함께하자고. 그런데도 의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황인현 씨는 확인하는 차원에서 되물었단다. 끝까지 할 거냐고. 물론 그들은 끝까지 할 거라며 굳은 다짐을 해 보였단다.
게다가 또 한 가지 기름에 불을 지르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시설 수용인들은 집에서 수용비용을 입금해야 했다는데, 시설 자체가 개별적으로 비용을 받고 입소를 시키는 구조였던 것 같다. 황인현 씨 집 상황이 워낙 어려웠던 탓에, 얼마간 입금이 지연되는 상황이 반복됐던 모양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로비라는 곳에 다 모여 있는데, 시설장이라는 사람이 황인현 씨를 특정해서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너 집에 가. 넌 필요 없어!”
어쩌면 그 불합리한 외침 하나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게 아마 2005년 전후였을 거예요. 집에서 입금이 안 되고 뭐, 그런 일이 있었다면 개인적으로 조용히 불러서 얘기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사람들이 다 모여 있던 로비 한가운데 자리에서 그런 폭언을 듣고 나선… 아, 방으로 올라가서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런 막말을 듣고도 무조건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그 폭언에 즉각 반응하고 대응하며 다음 대안을 찾느냐의 여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간다. 황인현 씨의 반응은 단순하게 정해졌다고 한다. ‘이건 아니다. 이건 절대 아니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그 시설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시작했던 게 서울시청 앞 노숙농성이었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라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조직이 그 지난한 농성의 진행을 음양으로 도와주면서, 그는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세상을 처음 직접 만나게 됐단다. 그 농성조차도 황인현 씨는 시설에서 출퇴근을 하며 꾸준히 동참했다고 한다. 시설을 아예 벗어날 방법은 없지만 농성에 참여함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2년이 넘는 기간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출퇴근 방식으로 농성장에 함께했다는 것이다.
“시설비리가 너무 많아요. 비리가 없는 곳이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인데, 그걸 다 밝혀내는 게 저의 활동 목표예요. 동료상담도 열심히 하고 있죠. 시설에 있다가 자립해서 나온 분들을 상담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들을 제가 도와드리고 있어요.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정말 보람이 크죠. 시설로 직접 찾아가서 자립하려는 분들에게 다양한 정보를 주고, 저희도 그 분들한테서 시설에 관한 정보를 얻고 있어요. 그 분들의 탈시설을 도와드리고, 실제 탈시설에 성공하면 사회적응까지도 책임을 지며 지원하고 있죠.”
개인적인 소망은 시설이라는 게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거란다. 수많은 자립홈과 체험홈들이 생겨서, 모든 이들이 밖으로 나와 함께 사는 세상이 꼭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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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7월, 진도 팽목항에서 올라온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서울광장에서 처음 시민들과 만나게 된 현장 한가운데 황인현 씨의 모습이 보인다.

앞서 2008년 황인현 씨와의 첫 만남을 ‘희한한 인연’이라고 표현했었는데, 그 표현을 한 번 더 써야 할 발언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딱 한 달 전에 황인현 씨 스스로 탈시설을 직접 실행했고, 지금은 영등포구 모처의 체험홈에서 독립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국가의 지원 같은 건 아예 바라지도 않고, 직접 일하며 벌어서 진정한 자립생활을 누리겠다는 결심 끝에, 출퇴근에 묶여 있던 시설을 영원히 벗어났다는 얘기였다. 이건 마치 그의 탈시설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일부러 이번 만남이 이뤄진 듯, 시간상으로도 절묘한 인연이 된 셈이다.
“시설에 갈 때마다 수많은 정보를 제공해요. 특히 어느 자립생활센터에서 이런 행사를 하고, 어느 인권단체에서 이러이러한 모임을 하게 되니까 참석하라며, 세상을 향한 문을 계속 열어주는 것이죠. 처음엔 그런 정보를 의구심의 눈으로 바라보던 분들이 많았는데, 이젠 저한테 연락이 먼저 올 정도가 됐어요. 좋은 행사 같은 게 있으면 꼭 소개해 달라고요.”
그는 혼자 있을 때도, ‘시설에 계신 분들을 어떻게 세상으로 이끌어낼까?’ 하는 생각을 깊게 한다고 한다. 집에 있건 길에 있건 공원에 있건 어디서든지,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그 생각이 중심을 이루며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탈시설에 성공한 분들이 계신데, 집에서 나와 복지관과 자립생활센터를 오가면서 사회에 적응해 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낀단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만족감이 아주 크다고 한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거, 그것 이상 행복한 인생이 또 어디 있을까?
공식적인 사회활동 말고, 개인적인 꿈 또는 목표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혼자만의 생각을 되새기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임대아파트에 들어가서 사는 게 꿈이란다. 나만의 집을 갖는다는 것! 그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물론 충분한데, 다만 시간이 좀 지나야 실현될 것 같다고 한다. 완전한 사회인이 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신청우선순위에서도 한참 뒤로 밀려 있을 테지만, 반드시 실현될 꿈을 가슴에 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상의 모든 역경을 딛고 일어서게 만드는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저는 한번 ‘이거다’ 하면, 그게 될 때까지 그걸 해요. 어릴 때부터 그랬고, 시설에 있는 동안 이 생활방식이 완전하게 굳어진 거죠. 많은 동료들이 저를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신다는데, 아마도 저의 그 성격을 인정해 주시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닌 걸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 가장 단순한 건데도 가장 어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전국의 수많은 시설 이용인들이 자유를 되찾는 그날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할 거예요. 될 때까지 계속 할 거예요. 그게 바로 제가 해야 할 일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와 만나는 자리를 지켜보던 제3의 ‘1인’이 ‘인간 황인현’에 대해 하고픈 말이 많다고 했다. 돌출상황과 같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그 제안을 즐겁게 받아들이며 함께 들어봤고, 그의 진솔한 의견을 아래에 첨부하고자 한다. 제3의 시선으로 바라본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그 ‘1인’의 마음 그대로 황인현 씨 또한 즐겨듣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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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란 씨(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자립생활주택 코디네이터)

이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체험홈 담당 코디네이터로 인현 씨를 만나게 됐다. 신체적으로는 중증의 몸이지만, 인권에 대한 의식이 정말 높고 자기존중감이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다. 그래서 그런 의식을 생각에 머물지 않고 실천하려고, 항상 인권운동 현장 맨 앞에 인현 씨가 자리 잡는 것 같다. 언제나 인권운동의 현장 안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당사자주의 제일 앞의 선봉에 서서 자기의 주장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이음센터라는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다 보면, 자립을 하는 데 있어서 주거지원도 좋고 다른 어떤 복지도 중요하지만, 당사자가 자기결정권과 자기선택권을 어느 정도 가지고 가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늘 확인하게 된다. 인현 씨는 그런 역량이 온 몸에 다 꽉 채워져 있다. 그렇기에 제가 이렇게 인현 씨를 만나고 알게 되면서, 체험홈의 담당 코디네이터로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인현 씨한테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고, 우리 이음센터가 인현 씨를 통해 장애운동의 목소리를 훨씬 더 크게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역할을 인현 씨는 최고의 적임자로서 가장 잘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이음센터 안에서 인현 씨가 함께하게 된 걸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

작성자채지민 기자  natalir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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