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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 해와달 밴드 드러머 김하람
윌리엄스증후군(Williams Syndrome)이라고 한다. 그 낯선 명칭보다 익숙한 증후군인 다운증후군은 21번 염색체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한다는데, 이 증후군은 7번 염색체의 일부가 결손 되어 특징적인 외모와 함께 심장질환 및 정신지체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혈중 칼슘 농도가 올라가고, 작은 턱의 외모에 쉰 목소리를 내며 걷는 자세가 구부정하다고 한다.
읽고 쓰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수학적 능력도 떨어지지만,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타인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 그런데 독특한 특징이 따로 있다는 게 눈에 띈다. 비록 집중하는 시간은 짧지만, 음악을 잘 듣고 악기 연주를 잘한다고 한다. 악보를 읽을 순 없지만 멜로디를 정확하게 기억한다고 하니, 이번 송년호의 주인공을 소개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 돼야 할 것 같다.
공중파 방송으로도 만난 바 있는 해와달 밴드의 드러머, 지적장애로 분류되는 증상을 가진 이들 중에 최초로 인권강사가 된 김하람 씨가 해맑은 함박웃음으로 독자 여러분들을 마주한다. 그의 그 웃음이 여러분의 얼굴에도 그대로 ‘전이’되리라 기대한다. 본문의 대화 모두는 ‘하람이의 엄마’ 이상림 씨와 함께했다.
1시간 48분.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수도권 내 어중간한 위치에서 만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셈이 된다. 전 구간이 개통됐다던 서울(용산)과 광주송정역 간의 고속철도(KTX)를 뒤늦게 처음 타봤다. 3시간 남짓 걸리던 그 이전과는 다르게, 정말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전 구간이 개통된 광주행 KTX를 타고 보니, 오래 전부터 자주 이용하던 경부선 방면 KTX와의 차이점이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단순히 승객 1인이었던 입장으로 느낀 소감 한마디와 함께, ‘김하람’이라는 인물과의 만남을 시작하고자 한다. 부산 방면으로 갈 때는 창밖에는 ‘내내 산’이다. 광주 방면으로는 ‘내내 논’이었다.
엄마의 직감
“장애는… 제 뱃속에서 처음 애가 나왔을 때부터 저는 알았어요.”
하람 씨의 엄마인 이상림 씨(이하 엄마)의 그 첫마디 여운이 뭐랄까, 상당한 타격감이랄까? 전해지는 무게감이 너무 달랐다. 어떻게 자기 아이를 낳는 그 순간에 그런 직감을 얻게 됐다는 걸까? 신생아의 몸 자체가 첫눈에도 인식이 될 만큼 이상한 형태를 보였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니고요. 저는 미혼 시절부터 오랜 기간 장애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했었어요. 매주 금요일마다 방문하는 활동을 오랫동안 하다 보니까, 대충 느낌으로 감지되는 직감이라는 게 생기게 되더라고요. 전문적인 이론으로 설명해야 하는 ‘이런 형태, 저런 형태의 장애’ 이런 내용은 전혀 모르지만, 대충 얼굴 생김새를 보면 ‘아, 장애가 있구나, 없구나.’ 이 정도는 알게 될 입장이 됐던 거죠.”
지난한 산통의 과정 끝에 출산한 신생아를 품에 안자마자 그런 느낌을 떠올렸다는 거, 하지만 이후 긴 시간 동안 지역거점인 전남과 영남의 대형 종합병원을 전전해도 ‘장애는 아니!’라는 판정만 받았다고 하니, 뭐랄까, 엄마의 직감 자체인 그 정확함 앞에선 놀랄 수밖에 없다는 아득함만 맴돈다. 이건 본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저는 그냥 얼굴 형태만 봐도 맞는 것 같은데, 의사들은 여러 검사를 하면서도 없다고, 괜찮다는 말만 했어요. 저는 뇌병변 계열이 아닐까 지레짐작을 했죠. 왜냐하면 아이가 힘이 하나도 없이 축 처져 있고, 그 시기에 해야 할 뒤집기나 잡고 일어서기 같은 걸 하나도 하지 않았거든요. 힘도 없고 우는 힘도 없고, 빠는 힘은 더 약하니 모유는 아예 생각도 못했고…. 처음 걷기 시작한 건 대략 네 살 때였던 것 같아요. 아쉬움도 많아요. 이런 걸 세세하게 기록해둘 걸, 당시는 정신없는 상태 그 자체였거든요,”
물리치료를 계속 받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재활 아닌 재활에 전념하던, 복지관에 다니려고 거주지까지 바꿔야 했던 당시의 심란한 생활상이 엄마의 음성으로 세세하게 언급됐다. 엄마 옆에 바짝 앉은 하람 씨한테 엄마가 물었다. “너 이런 얘기 처음 듣지?” 빨대로 주스를 마시던 하람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진짜 처음 들어.” “그렇게 운동하고 치료 받으러 힘들게 다녔었어.” “정말? 진짜로?”
늦게, 너무나 늦게
몸에 염증은 없는데도 열이 계속되는 상황, 지역의 크다는 대형병원은 다 다녀봤지만 장애는 아니고 감기라는 처방뿐일 때, 조그만 마을의 어느 내과의원에서 엄마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견을 듣게 됐다고 한다. 30대 젊은 의사선생님이었는데, 조심스럽게 윌리엄스증후군 같다는 견해를 밝혔다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나요.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선생님이었어요. 그때 하람이가 심장이 안 좋아서 감기를 달고 살았거든요. 한 달 내내 거의 입원생활을 하며 고생했는데, 그 선생님이 윌리엄스신드롬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워낙 낫지 않으니까, 자기 전공도 아닌 분야를 나름의 공부로 살펴보셨던 모양이에요. 그때부터 의미도 모르던 그 한마디가 제 머릿속을 꽉 붙잡게 됐죠.”
가는 큰 병원마다 그 증상이 아니냐고 묻고 또 물었지만, ‘무슨 윌리엄스신드롬이냐. 그건 아니다’라는 대답만 돌아올 때 엄마한테는 새로운 의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단다. 해답은 병원이 아니라 현장에 있었던 셈인데, 복지관의 여러 선생님들의 견해가 엄마 생각의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아이는 뇌병변이 아니라 지능과 관련 있는 어느 증상인 것 같다고, 어떤 증후군에 속하는 것 같으니 전문 선생님한테 상담을 받는 건 어떻겠냐는 조언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의학적인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장애계 현장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던 이들의 견해가 오히려 정확한 것 같아서, 유전학 분야의 권위자인 서울 한 종합병원의 어느 교수님을 찾아뵙는 게 좋겠다는 소견서까지 받게 됐단다. 그래서 그 소견서를 들고 서울의 병원 그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엄마의 오랜 직감은 하람 씨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그제야 해답을 얻게 됐다고 한다.
“하람이랑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는데, 그 교수님이 하람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 윌리엄스증후군이네?’ 하시며 곧장 차트에 적으시는 거예요. 그 순간 가슴이…, 정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저 교수님은 들어오는 아이 얼굴만 보면서도 다 아시는데, 그동안 수도 없이 문을 두드렸던 그 큰 병원의 의사들은 뭔가요?”
너무 놀란 엄마가 교수님 앞 의자에 앉으니까, 교수님의 첫 마디는 이렇게 이어졌다고 한다. ‘엄마가 아이 키우면서 고생 참 많이 하셨죠?’ 그 한마디에 가슴에 묵혀 있던, 뭉쳐 있던 모든 게 밖으로 터져 나왔단다. 이 병원에만 먼저 왔었다면, 이 교수님을 먼저 뵈었더라면, 약만 제대로 처방 받을 수 있었다면 매달 20여 일씩 입원하고 엉뚱한 약을 먹는 긴 시간의 고통은 피할 수도 있었던 게 아닌가.
“저의 무지였던 거죠. 그 다음에 의술과 의사들의 무지였던 것이고요. 지금도 화가 나요. 아기 때부터 미리 윌리엄스증후군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1급이 아닌 2급이나 3급의 증상으로 조기에 대처를 할 수 있었을 게 아니에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결론을 얻었으니 너무 늦어버린 거죠.”
분노와 후회와 한탄이 뒤섞이는 엄마의 음성을 묵묵히 듣고 있던 하람 씨에게 물었다. 하람 씨의 어린 시절 얘기를 지금 듣고 있는데, 본인은 어린 시절에 가장 기억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달라고 했다. 친구들이 많이 놀렸단다. 장애인이라고,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말이다. 하람 씨의 기억은 모두 상처 하나로 뭉쳐 있었다. 특수학교 아닌 일반학교의 통합교육을 12년 내내 받았다는데, 엄마 입장에서 통합교육의 현실이 어떤지 평가해달라고 했다.
“그냥 말만 통합교육이에요. 교실에 자리 하나 만들어놓은 게 다예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활동보조도 없고 학습보조인도 없어요. 예전에는 담임이 거부해서 수업에 못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죠.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라는 건 그냥 A4지 하나 주고 그림을 그리게 한다거나, 특수반(학습도우미실)에서 자기 수준에 맞는 책을 혼자 읽는 게 전부예요. 이게 무슨 통합이에요?”
하람 씨한테 또 물었다. 어느 과목이 제일 좋냐고. 국어가 좋았단다. 왜 좋았냐고 계속 물으니 원래 좋았다고 한다. 그럼 간직하던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다. 그때까지 하람 씨는 대화의 분위기에 눌린 듯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장래희망이란 말을 듣자마자 일순간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쏟아지듯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만남 이후로 가장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러머 선생님이에요!”
그게 바로 하람이 너다!
분위기를 바꿀 겸 음악 얘기를 시작했다. 장애당사자 학생들로 구성된 해와달 밴드의 드러머로 알려졌는데, 드럼은 언제부터 쳤는지 물으니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란다. 초등학교 6학년생이 자발적으로 드럼을 선택할 리는 없었을 것 같아서, 그것이 어떤 교육의 일환으로 진행된 건지, 아니면 엄마의 의도가 포함된 건지를 엄마한테 물었다.
“윌리엄스증후군의 특징 중에는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다는 게 포함되어 있어요. 제가 장구를 좋아해서 오래 전부터 장구를 쳤거든요. 수업이나 연주가 있을 때마다 항상 하람이를 데리고 다녔어요. 그런 과정에서 타악기에 대한 리듬감을 익힌 것 같아요. 직접 두드리는 리듬감이 아주 뛰어나더라고요. 저는 전혀 몰랐거든요. 광주에 타악기 연주를 전문으로 하는 ‘얼쑤’라는 팀이 있는데, 그 구성원 중 한 선생님이 드럼을 배운다고 하셔서 초등학생 하람이가 그 선생님 무릎 위에 앉아 생전 처음 드럼이라는 걸 두드린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깜짝 놀라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얘는 드럼을 해야 해요!’”
아이가 뭔가 하나의 취미나 특기를 가지면 좋겠다고 희망하던 시절, 악보를 전혀 볼 줄 모르는 하람 씨한테 악기는 무리라고 미리 짐작하고 있었는데, 뛰어난 리듬감과 장단을 완전하게 몸으로 외우는 모습을 보며 타악기를 익히는 게 가장 좋겠다는 답을 엄마는 얻게 됐단다. 그래서 드럼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수강생이라서 강사가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대신 다른 수강생인 어른들은 놀라움과 칭찬을 쏟아냈단다. 조그만 아이가 귀로 듣는 대로 그 리듬을 드럼에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아닌가.
“해와달 밴드는 얼마 전 결성 5주년을 맞이했어요. 처음 시작은 복지관에서 우연한 아이디어로 첫 의견이 나왔죠. ‘어. 하람이가 드럼을 하네? 어, 은아가 피아노를 배우고 있네? 그럼 너희 둘이 합치면 뭔가가 되겠네?’ 그래서 80년대 남도의 대표적인 대학 노래패였던 ‘친구’에서 활동했던 한 엄마한테 전화를 했죠. 지금 이런 제안이 나왔는데, 밴드를 만들어서 같이 하는 건 어떻겠냐고 말예요. 그 엄마가 기타와 베이스기타를 치는 두 분을 소개해줬고, 그 두 분이 지금 지도 선생님이 되셨죠. 그 엄마가 일단 보컬을 맡고 퍼커션을 담당하는 민국이란 친구까지 들어와서 순식간에 밴드가 만들어진 거예요.”
엄마의 얘기를 듣던 하람 씨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혼자 몸으로 리듬을 타고 있는 것이다. 가장 자신 있고 신나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뭐냐고 물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하람 씨의 얼굴이 일순간에 환해지며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예요!”라는 힘찬 대답이 이어졌다. 지도 선생님이 7,8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낸 분들이라서, 밴드의 연주 레퍼토리는 주로 7080대중가요 중심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제일 좋아하는 곡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윤도현의 ‘나는 나비’란다. 왜 좋으냐고 또 물으니 “날개를 활짝 펴니까요.” 하며 하람 씨는 활짝 웃었다. 자신 있는 연주곡들의 제목은 계속 줄을 이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백수의 하루’, ‘비밀번호 486’, ‘여수 밤바다’ 등, 하람 씨의 눈앞에는 테이블이 아니라 드럼이 놓여 있는 듯 흥이 돋아났다.
“올해 2월에 하람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든요. 그리고 이젠 진짜 사회에 발을 내딛는 건데, 우리 같은 부모들이 가장 심란해질 때가 바로 그 시기예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가장 심란하죠. 이젠 학교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교복을 벗기 전에 마지막 기념으로 콘서트를 열자고 의기투합이 돼서, 몇 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를 했어요. 노래로, 노래를 통해 세상에 발을 딛자는 의미였죠. 광주광역시의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객석 가득 채우고 큰 호응을 받으며, 콘서트를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어요. 방송에 나갔던 게 그 공연이었죠.”
연습에 매진하던 몇 개월 동안 하람 씨를 눈여겨 바라보던 시선 하나가 있었단다. 바로 공연 연출을 맡은 선생님이셨는데, 공연 대본을 줘도 외우지도 읽지도 못하는 하람 씨였지만, 즉흥적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으며 센스 넘치게 사회를 보는 그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공연 현장의 객석에 앉아 계시던 한 선생님 또한 인권단체의 한 간사에게 하람 씨의 인상적인 모습을 전했고, 그 간사가 밴드 연습실로 직접 찾아와서 하람 씨를 만난 뒤 정말 전혀 예산치도 못했던 제안 하나를 불쑥 꺼냈다고 한다.
“지역의 초중고 학교 학생들에게 장애인식개선을 위한 강의를 할 인권강사를 맡아줄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어요. 저는 꿈에도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 자체를 못했어요. 하람이가 그런 일을 맡는다는 상상 자체를 못했던 거죠. 대신 이런 상상은 하곤 했어요. 제가 말주변이라도 있으면, 다른 엄마들한테 정말 장애인식개선을 위한 생생한 의견을 전해주고 싶다는 희망사항은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그걸 당사자인 하람이가 하게 된다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 제안을 듣고 있던 다른 엄마들이 일제히 외쳤어요. ‘그건 하람이 너다!’, ‘그건 네가 해야 한다!’, ‘네 일이다. 네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인권은 서로를 받아주는 거예요
사실 지적장애로 분류되는 당사자를 강사로 채용한다는 건 모험에 가깝다. 확실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돌발 상황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권교육을 담당하는 이들 중엔 뇌병변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이 많다. 비록 발음상의 문제는 있다 해도, 논리적인 사고로 기승전결을 풀어내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제안을 듣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 이건 정말 우리 하람이가 할 수 있겠다. 잘할 수 있는 분야이기에 너무 잘 됐다!’는 확신에 너무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그때부터 인권강사의 인연이 시작된 거죠. 물론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정서적인 상처를 다시 드러내야 한다는 것, 그 상처를 자기 입으로 언급하며 풀어가야 한다는 게 힘든 일이기도 했죠. 인권단체의 그 간사님이 너무 잘 이끌어주셨어요. 하람이의 모든 말을 다 들어주셨고, 하람이가 해야 할 강의 내용도 함께 정리해주셨거든요.”
그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하람 씨는 어떤 심정이었냐고 물었다. 기분이 참 좋았단다. 처음 듣는 제안이고 해본 적 없는 분야인데, 두렵거나 걱정되는 건 없었느냐고 또 물으니 그런 건 전혀 없었단다. “그런 건 전혀 없었고요. 장애인 놀리는 친구들이 있으면, 제가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람 씨가 너무 의젓하게 또박또박 강의를 진행한다며, 엄마는 강의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여러 장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펼쳤다. 사진으로 봐도 긴장감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스스로 여유를 갖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루 전에도 진도의 어느 중학교로 강의를 다녀왔다며, 하람 씨는 오늘 만남 중 처음으로 어른스러운 표정을 내보였다.
더 열심히 연습해서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더 많은 공연을 하고 싶다는 거, 더 많은 학생들 앞에서 장애인식개선을 얘기해 주고 싶다는 거, 어쩌면 하람 씨는 같이 졸업한 고등학교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이 사회에 성공적으로 발을 내딛은 친구로 기록될지 모를 일이다.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른다며, 하람 씨는 마주보기 좋은 함박웃음을 다시 지었다.
마지막으로 여기가 학교 교실이라고 생각하면서, 학생들에게 전했던 강의 내용 몇 마디를 들려달라고 했다. 쑥스러워하거나 사양할 줄 알았는데, 하람 씨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 삶이 그대로 묻어 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강의는 지역 안에서만 진행될 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수많은 학생들을 위해 계속 이어져야 할 소중한 의미를 담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국의 학생들이 “김하람 선생님!”을 부르고 외칠 그날을 기대하게 된다.
“여러분 곁에도 저 같은 친구들이 있죠? 그 친구들도 학교 다니는 게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저 하람이에게 인권은 친구들이 저를 받아주는 거예요. 제 이름도 불러주고 수다도 떨면서 놀러도 가고요. 함께 노래방도 가고 싶어요.”
“그런데요. 여러분, 왜 저는 학교 가는 것이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혹시 아세요? 제 친구가 없었어요. ‘야, 장애인, 장애인!’ 놀림을 받았어요. ‘야, 더러워!’ 소리를 질렀어요. 저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제가 말을 건네면 무시하고 거절했어요.”
“이 학교에도 저 하람이와 같은 친구들이 있죠? 그 친구들도 학교 잘 다니게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서로 다르지만, 다 같이 재미나게 생활하는 우리 학교가 되면 좋겠어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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