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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권변호사인가? -인권이 최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공익인권변호사 김재왕

본문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는 변호사 ‘1인’에게 초대장을 던졌다. 국가적인 또는 사법적인 권력 따위를 가졌다며 거드름에 사는 이가 아닌,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이였기에 훨씬 편안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공익인권변호사로 우리 앞에 등장한 김재왕 변호사를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옆집 오빠, 아랫집 윗집에 사는 이웃’과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진솔한 내면을 함께 들여다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다.

 

   
 


본래의 인생을 내려놓으며

‘어디서 만났었지? 분명 낯설지 않은 얼굴인데….’

변호사 김재왕 씨를 마주대한 자리에서 처음 떠오른 생각은 그것이었다. 정식으로 악수를 나누는 인사는 이번이 처음인 게 맞긴 한데, 언젠가 어디선가 분명 마주쳤던 얼굴이라는 실감이 점점 더 뚜렷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디서 봤던 얼굴이지?’ 궁금증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그건 만남의 시간 중에 실마리가 잡히리라 싶어 일단 대화부터 시작했다. 시각장애 1급이고 중도실명이라는 설명이 이어지는데도, 머릿속에 채워진 건 여전히 단 하나였다. ‘분명히 알던 얼굴인데, 언제 만났더라?’

“병명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내려진 게 없어요. 여러 가지 가능성은 얘기가 됐는데, ‘녹내장이다’와 ‘그건 아닌 것 같다’ 등등 정확하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더라고요. 일단 시신경이 죽는 증상인 건 맞는다고 해요. 2003년부터 안 좋아진다는 느낌이 확실해졌는데, 2009년 전후로 완전히 안 보이는 상태까지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눈은 태어날 때부터 안 보였단다. 왼쪽 눈은 움직이는 물체를 잘 쫓아가며 움직였지만, 오른쪽 눈은 안 그랬다며 어머님께서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 오른쪽 눈은 선천적 실명이고 왼쪽 눈마저 몇 해 전부터 안 좋아졌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지금 얼마나 안 보인다는 걸까? 태양이 어디에 있는지, 그런 건 모른단다. 아주 가끔 불빛 같은 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것도 이젠 극히 드문 경우가 됐다고 했다.

왼쪽 시력 하나로 지내왔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상황으로 자랐기 때문인지 특별한 불편함 같은 건 없었단다. 체육시간 등의 특별한 배려 같은 것 없이 또래들과 늘 똑같이 지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눈이 어떤 식으로 갑자기 안 좋아지게 됐다는 걸까?

“대학을 졸업할 즈음부터, 그리고 대학원에 갔을 때부터 확연하게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그걸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까요?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긴 한데, 가끔씩 눈에서 물결치는 듯 출렁이는 느낌 같은 거…. 잔잔한 물가에 돌멩이를 던지면 그 부분부터 동그랗게 퍼지는 모양 같은 거 있잖아요. 중심 부분이 아니라 주변부가 그런 식으로 흔들리는 게 심해졌어요. 그 무렵부터 뭔가에 부딪치는 일들이 많이 생겼죠. 저의 발아래 뭐가 있는지도 몰라서 걷어차고 간다든지,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 부딪치는 경우도 늘어났어요. 그래서 진단 받으러 병원에 갔더니… 시야가 많이 좁아졌다고 하더라고요.”

   
 
대학 전공이 무엇이었냐고 물으니까, 뜻밖에도 생물학이었단다. 현직 변호사의 대학 전공이 생물학이었다고? 문과도 아닌 이공계 전공자가 어떻게 전혀 다른 분야인 변호사의 삶을 살게 된 걸까? 질문의 방향은 그 부분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얘기하려면, 좀 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단다. 생물학을 전공하고 ‘생명과학부’라고 명칭이 바뀐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그래서 실험실에서의 실험이 가장 중요한 전공의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했는데, 시력이 극히 나빠지게 됐다는 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게 아닌가.

결론은 대학원을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1년 정도 ‘집에서 놀았다’고 그는 표현했지만, 사실 그 기간이 ‘논다’는 단어로 간단히 설명될 심정이 아니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 부분을 아주 짧게 건너뛰며 다음 설명을 이어갔다. 그 후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중도실명자들을 위한 ‘기초재활교육’이란 걸 한다고 하기에, 거기에서 기초적인 여러 재활교육을 받게 됐단다.

그 즈음의 일이라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상담원 업무를 담당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가 그만두게 되어 자리가 나게 됐으니까 그 업무를 담당해 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2005년부터 인권위원회 상담을 맡게 됐단다. 처음 마주앉았을 때의 궁금증은 그 대목에서 답이 나왔다. <함께걸음>의 취재활동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출입은 빼놓을 수 없는 영역 아니겠는가. ‘그를 언제 어디서 봤더라?’의 해답은 ‘국가인권위원회’였던 것이다.

 

새로운 도전 - 전혀 다른 세계로

인권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인권위의 활동범위와 관련이 없는데도 인권문제라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은 곳 역시 국가인권위원회라고 한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으로 시작했던 업무였지만, 김재왕 씨는 이 일을 오래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점점 더 강하게 갖게 됐단다. 상담원 업무라는 게 20대 후반의 젊은이가 하기엔 버거웠고, 게다가 시력을 완전히 잃어가던 과정이었기에 나름의 고충 또한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일을 알아 봐야겠다고 내심 생각하면서, 그는 모 대학원에 사회복지를 전공하며 다녔다고 한다. 인권위원회 직장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야간대학원을 다닌 거니까,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한 나름의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가 된다. 장애인복지를 전공하면서 인권위 근무를 했다는 것, 그건 어쨌든 대학원을 마치고 석사학위를 받으면 다른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에 가서 새로운 분야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리라는 기대의 준비과정이었다고 한다.

“상담 같은 경우는 사건이 와야만 제가 하는 거니까, 제가 뭔가를 먼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거든요.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에 간다면, 그렇게 된다면 제도와 정책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도 있을 테고, 석사학위자로서 공부를 계속하게 되면 연구원으로서도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강하게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로스쿨’이라는 게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는 법대를 나와야만 거기에 가는 거라 지레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첫째로 ‘터닝 포인트’라는 게 존재하고, 그 시점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 더불어 ‘누군가’와의 만남 또는 인연 속에서, 새로운 인생의 지름길을 발견한 뒤 그 길로 매진하게 됐다는 것! - 그것은 사실 모든 이들의 인생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차이점은 아주 단순한 부분에 있다. 그것을 자신의 인생으로 받아들였느냐, 아니면 외면했느냐 - 그 구분만 있을 뿐이다.

“2008년에 문경란 위원께서 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새로 오셨는데, 마침 그 분하고 점심식사를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제게 장애가 있다는 걸 아시고, 제가 좀 더 잘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씀해 주신 것 같아요. ‘로스쿨을 도전해 봐라.’ 하신 거죠. 제가 인권위원회에 근무를 했고, 제가 장애당사자이기도 하고, 제가 지망하는 공익인권 분야에 특화된 로스쿨이 저의 출신 학교인 서울대이기도 하니까, 그 과정을 마친 뒤 변호사가 되면 좋지 않겠는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냐 하며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어차피 다른 일을 찾고 있던 시점이 아니었던가. 그 분 말씀대로 잘 되어서 변호사가 된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강해지기에, 모든 고민과 갈등을 접으며 그 시험 준비에 집중하게 됐단다. 그렇다면 ‘법(法)’이라는 존재와 그 내용을 이미 알고 시작했다는 걸까? 그게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이공계의 생물학 전공의 김재왕 씨가 전혀 다른 세상을 도전하는 것 같은데, 도전의 대상이 어떤 세계인지를 어느 정도나마 인지한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건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권위원회에서는 법률적인 많은 걸 접하며 지내게 되어 있어요. 기본적으로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기반으로 해서 업무가 진행되니까요. 상담원으로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제게 들어온 모든 사안들이 국가인권위원회 차원의 조사대상이 되느냐, 조사대상이 된다면 그 다음에 혹시 각하사유가 되지 않느냐, 그런 단계들을 일일이 검토한 뒤 설명해 드리고,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라면 적절한 기관으로 돌려보내는 등의 일을 진행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법을 접할 수밖에 없었죠. 꼭 법서(法書)라기보다는 법과 관련된 수많은 사안들을 정말 많이 다룰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국가인권위원회 결정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한 뒤 설명해야 하니까 그 결정문을 늘 검토해야 했죠. 결정문의 양식이 법원의 판결문과 사실 거의 비슷하거든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법’이라는 대상과 가까워진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인권’인가?

2009년 법학적성시험을 치른 뒤 로스쿨 3년 과정을 마치고 변호사가 된 그는, 우리가 그 명칭만 듣고 지내던 ‘로스쿨’의 1기 졸업생이다. 졸업 바로 전에 치른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해서 변호사 자격증을 받은 지 이제 6개월 정도 됐다 하니, 어떤 면에서는 법조인으로서의 첫 출발점에 서 있는 입장이라고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시점에서 그와 만나기 전부터 미리 메모해 두었던 내용 중 핵심이라 생각했던 내용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미 다 답이 나온 것 같지만 말이다. - ‘왜 인권인가?’

“사실… 인권위에서 근무하게 된 당시의 각오 그리고 그 활동에서 얻은 체험 같은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할 거예요. ‘인권’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정말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셈이죠.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은데…, 사실 장애인들이 어쨌든 살다 보면, 자신이 굳이 투사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투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오잖아요. 대단한 신념 같은 걸 갖고 그랬다기보다는, 스스로 살려고 하다 보니 부딪치는 부분들이 너무 많아서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게 더 많다고 저는 판단했거든요. 그래서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도 그 분야에 대해서 더 많이 관심을 갖고 공부했던 것 같아요.”

변호사의 일이란 건 일반적인 개개인의 소송보다는, 기업 관련 업무가 훨씬 큰 수익을 올리는 법이다. 기업과 기업 간의 인수합병이라든지, 기업 사이의 소송 등을 맡아서 진행하는 게 훨씬 더 큰 결실을 얻게 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그런 ‘번쩍번쩍’한 결과와 과실 가득한 길이 아닌,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길을 함께 걷겠다며 나선 변호사들이 존재하고 있다. 김재왕 씨의 명함에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의 ‘구성원’이라는 소개어로 단출하게 이름 석 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을 하는 즐거움이라고 할까요?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인권위 근무 경험, 장애인복지학 연구로 받은 석사학위, 더욱이 장애당사자 입장에서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결론을 내렸고요.”

그런데 그에게 꼭 묻고 싶은 대목이 있었다. 지금이야 변호사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인생이었을지 모를 대학원 과정을 포기했던 당시의 심정이 어땠는지, 정말 솔직한 그의 속내를 끄집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스스로 원하던 인생을 살던 환경이었는데, 그 인생을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는 이유로 인해 그만두게 된다는 거, 더욱이 남겨진 인생에서 다시는 그 ‘원하던’ 인생을 되돌리며 살아갈 방법도 없다는 거…, 김재왕 씨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삶으로 ‘확고히’ 승화시키게 됐을까?

“정말… 어려웠죠. 정말 깊은 고민을 해야만 했어요. 보통 대학원을 가면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이나 유학 등의 길을 계속 가게 되는데, 이미 나빠진 눈이 더 나빠질 수 있다고 하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어쨌든 생물학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이니까, 이것을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 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어차피 나중에 못하게 될 거면, 아예 빨리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걸 가장 많이 고민했는데, 결국 후자로 결정을 하게 됐죠. 늘 나오는 얘기지만, ‘이공계의 위기’라는 사회적 분위기도 저의 결론을 내리는 하나의 요인이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만약에 눈이 나빠지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마도 이공계의 위기 상황을 고민하면서도 계속 실험을 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실험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좋았으니까요.”

 

드러내고 찾아보세요

인생의 가장 큰 좌절과 단절로 절망하던 과거의 시기가 있었다면, 지금은 이 땅의 변호사로서 새로운 삶을 사는 1인이 되었다. 게다가 인권을 얘기하고 인권을 담당하는 공익인권변호사로서의 오늘과 내일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조금 전 그가 언급했던 바대로, 장애를 가진 이 땅의 모든 이들은 투쟁을 계획하고 투쟁하는 게 아니라, 생활의 모든 게 장벽이다 보니까 절망과 분노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인권을 보장 받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 대안이 무엇인지를 인권변호사의 의견으로 듣고 싶어졌다.

김재왕 씨는 자신이 그만큼의 조언을 할 입장은 아직 안 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도 의견을 듣고 싶다며 재차 질문을 던졌더니,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사실 굉장히 어려운 문제라면서 ‘드러내라’는 한마디를 꺼냈다. 거시적으로 입법청원을 한다든가 그런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방식도 물론 있겠지만, 일단 자신이 당하고 있는 불합리한 현실과 답답한 느낌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라는 것이다. 그 답답함을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는 게, 모든 대안 찾기의 시작점이 될 것이라 했다.

   
 

“그래야만 사회가 조금이나마 바뀌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프다고 먼저 얘기해야만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차별당하고 있는 게 있을 때는 그걸 어떻게든 겉으로 표현을 해야 해요. 그렇게 해서 그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게 되고, 그 해결방안을 알고 있을 누군가를 찾을 수도 있게 될 테니까요.”

인권위원회에서 상담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가장 기억에 남고 인상적이었던 사연 같은 게 있었는지를 물었다. 김재왕 씨는 그런 질문을 여기저기에서 많이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솔직하게 말한다면, 인권위에서 했던 상담이 모두 5천 건 정도나 됐었기에 개별적인 사안들을 별도로 기억하긴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상담에서 접했던 문제들이 세상 밖에서 계속 문제가 되고 있고, 조금씩 바뀌며 개선된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문제로 남아 있기에 역설적으로 더 뚜렷이 기억하게 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부양의무제 문제라든지 시각장애인의 접근권 문제 등, 그 사안들이 유난해서 생각난다기보다는 여전히 이 사회가 그렇기 때문에 더 기억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싶다

후천적 장애를 갖게 된다는 건, 그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른 환경으로 뒤바뀜을 의미한다. 더 좋은 환경으로 바뀌는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려울 테니, 그 무엇보다도 확고한 각오와 신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되찾기는 난망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후천적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나서, 180도 다른 새로운 삶을 일구어낸 김재왕 씨는 어떠한 결심을 품고 실천했기에 그 성취를 이뤄낸 것일까?

사실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 정말 힘들었던 기간이 있었단다. 그 내용까지 드러내긴 어렵겠지만 정말 힘들 때가 실제 있었는데, 그때 그를 지탱시켜 준 것은 ‘이렇게 버티자!’는 생각 하나였다고 한다. 기왕 시작한 걸 그만둘 수 없는 일이고, 더욱이 자신을 로스쿨에 뽑아주신 분들의 선택이라는 걸 저버릴 순 없는 일이었단다. 다른 지원자들보다 무엇이 낫다고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선발로 인해 기회를 놓치게 된 다른 지원자들을 잊어선 안 된다는 것.

“그런데 제가 여기서 제대로 못하고 있으면, 제가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대신하며 들어왔다는 걸 합리화 할 수 없잖아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고요. 그리고 저는 로스쿨에 특별전형으로 들어오게 됐는데, 그 특별전형이라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잖아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어떤 법인가요. 그걸 만들기 위해 정말 많은 분들이…, 장애계 입장에서 얘기한다면 투쟁이었고 일반 시민사회 입장에서는 민폐였을지 모를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그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건데, 그 분들의 피와 땀과 노력의 성과물을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 분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가 저의 노력을 게을리 할 순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다면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공익인권변호사로서의 활동은 물론 더 깊고 높고 넓게 진행되겠지만, ‘인간 김재왕’의 개인적 삶은 어떤 지향점을 향해 나아갈 건지 듣고 싶었다. 그래서 업무상의 의견이 아닌 개인적 의견으로 말해 달라 하니까, 그걸 말하려면 업무적인 부분을 먼저 언급해야 될 것 같단다. 사실 변호사가 되기 전과, 되고 난 후의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됐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변호사 업무 중심으로 모든 걸 생각하며 설계했던 것 같단다. 소송을 통해 보다 전향적인 판결을 이끌어내서, 사회적으로 장애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다. 또한 입법과정에 참여해서 장애당사자들의 욕구와 필요를 법으로 만들면 멋진 작업이 되지 않을까 하는, 모든 생각을 변호사 업무 중심으로 펼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변호사가 되고 나니까, 너무 저의 직업적인 데 국한되어 모든 걸 봤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만, 제가 뜻하던 것들도 바뀌게 되는 것이겠죠. 저는 판결 하나와 법 하나만 보며 일했었는데, 결국 그런 판결이 나오기 위해선 이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거예요. 법이라는 건 사회적 합의니까, 그런 법이 나오기 위해선 전 사회적으로 장애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하겠죠, 꼭 그렇게 되어야 하고요. 꼭 변호사라기보다는 장애당사자의 입장에서, 사회 전체적으로 장애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데 힘을 쏟아내고 싶어요. 그렇게 바뀔 수 있는 것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자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업무상으로도 최선을 다해 결실을 얻고 싶습니다.”

‘어디서 만났었지? 분명 낯설지 않은 얼굴인데….’

그 답을 ‘국가인권위원회’라는 한 장소에서 얻기는 했지만, 근무자와 방문객의 스쳐감 정도가 이만치의 궁금증을 유발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다른 장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계속 이어가다 보니, 그 생각의 꼬리가 결국 손에 잡혔다. 개인적으로 그를 서너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봤던 이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차분한 인상으로 혼자 이동하는 시각장애 남성을 낯이 익어질 만큼 봤던 기억이 떠올라, 그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기 전에 살짝 물었다. 출퇴근은 어떻게 하느냐고 말이다. 그가 답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으로 한다고…. 그래, 기억 속의 인물은 바로 그가 맞았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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