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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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가 없는데도, 올림픽 육상 트랙에 당당히 서서 달린 이가 있음을 기억하실 것이다. 엄청난 감동의 장면이었음은 분명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역설이 등장해 버린 셈이기도 하다. ‘다리 없음’과 ‘달리기’는 양립할 수 없는 별개의 영역 아니었던가. 달린다는 건 ‘다리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그 통념을 완전히 무너뜨린 감동의 쾌거를 모두가 자연스레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1급 시각장애인데 영화감독으로 활동한다는 건,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도 영상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간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눈으로 ‘보아야만’ 완성이 되는 영화를 ‘보이지 않는’ 눈으로 제작하는 이가 있다는 것, 그건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펼쳐놓으며 그의 고백에 귀 기울이게끔 만든다. 불가능이라는 건 단지 우리의 선입관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그 삶의 이야기를 펼쳐낼 이를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 자리로 안내했다. 영화감독 임덕윤 씨를 독자 여러분께 반가운 마음으로 소개한다.
어느 날 갑자기, 또 연속으로 갑자기
1969년 전북 군산 출생으로 올해 마흔넷의 나이인 남자, 1987년 고3 시절에 영화 ‘그 마지막 겨울’에서 배우 최민수의 친구 역을 맡으며 영화배우로 데뷔한 사람,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하고 직접 연출을 맡으며 활동한 인물, 그런데 직접 연출과 주인공을 맡은 단편영화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는 2009년 장애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영화배우 활동과 연출 활동을 꾸준히 해나가던 그 중간 시기 어느 지점에, 그에게 찾아든 건 신체적 장애였다는 의미가 된다. 다른 화제보다 먼저 그 대목을 물었다. 언제 어떻게 장애를 만나게 됐다는 걸까?
“한 20년 정도 됐을까요? 당뇨가 발병했었습니다. 처음엔 그리 심하지 않아 식이요법을 하라고 했는데, 식이요법이라는 게 정확히 제대로 지켜지기는 쉽지 않잖아요. 조금 지나니 약을 먹으라고 했고, 병원도 정기적으로 다니다가 얼마 안 가서 안 다니고 말았죠. 사실 몸에 큰 영향은 없었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겁니다. 점점 체력이 떨어지고 시력에도 일정한 문제가 생겼지만… 그때까지는 몰랐어요. 그런데 2003년 추석이 지난 뒤 눈에 뭔가가 떠다니는 증상이 생겨난 겁니다.”
살다 보면 어지간한 증상은 그냥 무시하듯 지나치더라도, 어느 순간 ‘병원에 가야겠다’는 절박함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되는 상황이 찾아들게 된다. 임덕윤 씨가 바로 그 상황을 맞이했다는 건데, 안과에 가니 안구의 혈관이 터졌다면서 레이저로 지지면(?) 된다고 했단다. 하루에 한 쪽 눈씩 레이저 치료를 열흘 정도 받았는데, 아무래도 ‘뭔가가 찜찜해서’ 대학병원으로 가니까, 큰 병원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고 한다. 당장 응급수술을 해야 된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왼쪽 눈마저 ‘초자체 출혈 및 망막박리’라는 같은 증상으로 수술을 해야 했단다. 오른쪽 눈과 마찬가지로 다섯 차례 수술을 거쳐, 일상생활이 겨우 가능할 정도의 시력은 회복하게 됐다고 한다. 군데군데 떨어진 망막으로 인해 시야가 좁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현실을 감수하기로 했다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이어진 모양이다. 3개월 동안 전신마취 3회를 포함한 10회의 수술을 강행군으로 이어갔으니, 체력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져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단다.
“평지를 열 걸음도 걷지 못하고 숨이 차서 헐떡거릴 정도였어요. 아는 분의 주선으로 현재 살고 있는 전남 보성군 문덕면의 작은 사찰에서 지내게 된 게 2004년 봄 무렵입니다. 마침 주말마다 들르시던 한의사 선생님이 ‘힘들어도 걸어라’ 하셨기에, 힘들어도 걷기를 계속 했어요. 몇 걸음 걷고 숨이 차서 헐떡거리기 연속이었는데, 인슐린을 아침저녁으로 맞으면서도 걷기를 멈추지 않았어요.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걸음 수가 늘어간 거예요. 물론 인슐린 양도 점점 줄이다가 나중에는 안 맞아도 되게 됐죠. 좋아지는구나 싶어 안심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2005년이 되자 갑자기 몸이 붓기 시작하는 거예요. 역시 주말에 오시던 한의사 선생님이 저를 살펴보시더니, 얼른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갔더니 콩팥에 문제가 생겼다고 투석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받아야 하는 삶을 지금까지 살게 됐습니다.”
당뇨합병증으로 망막이 떨어져 나간 건 2004년인데, 이듬해인 2005년에 찾아든 건 만성 신부전증이었고, 2005년 가을 무렵 다시 왼쪽 눈에 문제가 생겨서 3,4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시신경 악화로 인해 2006년에 결국 실명에 이르고 말았단다. “오른쪽 눈은 바람 빠진 공처럼 좀 찌그러들었고, 왼쪽 눈은 겉으로 보면 멀쩡해 보인다고 해요.” 1급 시각장애라 했으니 시력은 완전히 잃은 게 맞겠지만, 그래도 무언가의 잔상(殘像) 같은 게 남겨지는 건 없을까? 약간의 밝기 정도는 감지가 되고 가끔 뭔가가 어른거리는 듯한 느낌은 들지만, 밝기와 몸 상태에 따라 그때그때 다 다르다고 한다. “낮밤의 경우는 밝기보다는, 피부에 느껴지는 온도와 밀도의 차이로 구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 그 영사기 하나
중도장애를 갖게 됐다면, 장애가 없던 기간 또한 적지 않게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1987년에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했는데, 그 이전의 ‘소년’ 임덕윤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장애를 입으며 생긴 건지 원래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 대한 기억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비주얼(시각적인) 이미지의 경우는 자신이 직접 촬영을 했거나 봤던 것들이 대부분이고, 눈을 통해 직접 봤던 과거의 기억들은 거의 없는 편이라고 한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 등 사람들의 모습도 촬영한 영상의 이미지로 기억하는 거지, 눈으로 봤던 모습을 기억하는 게 아니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의 첫 영화배우 데뷔는 1987년 고3 때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에서 ‘영화’라는 대상이 처음 찾아들었던 계기는 언제였을까? 갑자기 영화계에 난데없이 뛰어든 게 아니라면 분명 그 이전부터 무언가의 준비과정이 존재했으리라 짐작됐기에, 영화계로 자신을 이끌어간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다.
“그건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때였어요. 아파트 앞 공터에서 이동영화 상영이 있었습니다. 야외 스크린이 설치되고 날이 어둑해진 다음에 본격적으로 영화가 상영됐는데, 우리가 흔히들 무언가에 ‘꽂힌다’고 표현하는 거 있죠. 완전히 몰입하고 매료되는 것 말입니다.
저는 영화에 ‘꽂힌’ 게 아니라, 영화를 틀어주던 영사기에 완전히 ‘꽂혀’버렸어요. 그때 봤던 영화의 제목이 뭔지, 등장 배우의 이름이 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깜깜한 밤에 뜨거운 열기와 환한 빛을 내뿜던, 엄청 시끄러운 모터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그 영사기의 이미지는 지금껏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그 설렘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네 인생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하고 삶의 길을 제시해 주는 ‘이정표’ 같은 계기와 마주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초등학생 시절 아파트 단지 공터에서 처음 마주치게 됐다던 영사기 하나가 한 소년의 삶을 지금의 인생으로 만든 셈이니, 세상에는 사사로운 게 하나도 없다는 건 분명 맞는 말이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영사기와의 만남 다음에 이어질 ‘영화계와의 인연’이 존재할 것 같아 질문했는데, 중학교 시절은 그냥 평범한 일상밖에 없었고, 좀 다른 게 있었다면 고등학교 시절에 마땅한 오락거리가 없어 방과 후 극장을 들락거리게 됐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500원에 두 편의 영화를 보여주던 당시의 재개봉관(동시상영관)이 그의 쉼터가 됐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걸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감독이란 걸 알게 됐고, 감독이 되려면 연극영화과에 가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고3 때 성적은 안 됐지만, 연극영화과 입시를 위해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하루는 현장실습이라며, 영화 촬영장으로 데려가더라고요. 안성기 씨와 김청 씨 주연의 ‘성 리수일뎐’이었는데, 예고도 없이 엑스트라로 처음 현장을 경험하게 됐죠. 다른 영화에서는 조감독과의 미팅을 통해 대사가 주어지는 역할도 맡게 됐고, 연기가 좀 된다고 여러 영화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입시로 고통 받던 고3 시절에 학교 빠지면서, 여기저기 촬영장을 가는 게 당시엔 너무 좋았죠. 입시엔 실패하고 간간이 단역이나 CF에 출연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고교 동창인 친구한테 전화가 왔어요. 이두용 감독님 영화사에서 연출부 활동을 하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바로 달려갔죠. 그래서 연출부 일을 하게 된 겁니다. 교과서를 보면 졸리지만, 시나리오나 영화 관련 책들을 볼 때는 하나도 졸리지 않더라고요.”
다시 “레디, 액션!”
임덕윤 씨의 영화계 활동은 다양하게 펼쳐졌다. 연기자로 출연한 것은 ‘그 마지막 겨울(정소영 감독)’, ‘학창보고서(이미례 감독)’, ‘고교 오성군 한음군(박호태 감독)’ 등 연극과 드라마, CF와 영화 등 20여 편에 출연했다고 한다. 연출부 활동 경력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삼토스와 댕기똘이(조명화 감독)’, ‘청상계(윤석봉 감독)’, ‘돈아 돈아 돈아(유진성 감독)’, ‘섬강에서 하늘까지(유진성 감독)’, ‘재즈바 히로시마(강구택 감독)’ 등에서 연출부 활동을 했으니, 영화계 전반에 대해선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후 직접 감독 및 연출을 맡은 작품들 또한 많이 있으니, 그의 삶은 ‘영화’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은 분명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질문을 던졌다. 2004년부터 3년에 걸쳐 매년 중증의 장애를 하나씩 갖게 됐는데, 더욱이 두 눈의 시력을 잃는 1급 시각장애까지 갖게 됐는데 어떻게 영화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걸까? 중도장애를 갖게 된 많은 이들은 보통의 경우 장애 이전의 삶과 단절되어, 지난 삶과 다른 상황의 생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저도 시력만 잃었다면 아마도 안마를 배웠을 겁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게다가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안마를 배울 수가 없었어요. 투석을 받는 날은 몸을 움직이기 어려워서, 다시 잠을 자야만 다음날 그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영화와의 재회는 좀 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 같다. 투석을 받으러 병원을 갈 때마다, 사람들이 도움을 주겠다며 그를 붙잡았단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를 덥석 붙잡으면, 더욱이 아무런 소리나 움직이는 소음 같은 것도 없이 다가와 자신의 몸을 붙잡으니 보통 놀라는 일이 아니었단다. 그건 임덕윤 씨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는데, 그때의 경험들이 그가 연출한 영화의 내용으로 녹아들어가 있는 걸 보면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다.
“병원에 있을 때 저를 도와주겠다며 먼저 손길을 내주신 분이 계셨는데, 저를 붙잡을 때 엄지와 검지만으로 제 옷을 붙잡는 거예요. 당시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그 점퍼를 손가락으로 잡고 인도를 한 거죠. 끌려가면서 ‘이건 뭘까?’ 고민을 했습니다. 그 분과 헤어지고 제가 떠올린 생각은 이런 것이었어요. ‘제가 징그럽거나 더러웠다면,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도와주고 싶어 다가왔는데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를 몰라, 나름 조심한다고 붙잡은 게 그렇게 되었을 거다.’ 제가 장애를 갖고 난 뒤 생각해 보니까 장애 이전과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장애인에 대한 정보가 비장애인들에게 너무 부족하다 보니 오해와 편견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장애인 입장에서 하고픈 말들을 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어졌습니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다시 세상에 나가고 사람들을 만나는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제게는 재활의 과정이자 작은 장애인 인식개선운동이 될 거라는 기대감과 도전감이 생긴 거죠.”
이젠 100% 차례입니다
2009년 제10회 장애인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와 2010년 작품인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43’은 임덕윤 씨가 영화감독으로서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속마음을 잔잔한 감동과 함께 그대로 드러낸 수작들이다. 제목 뒤에 붙은 ‘0.24’와 ‘0.43’은 무슨 의미의 숫자일까? 직접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 24%와 43%밖에 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이란다. 그나마 24%에서 43%로 발전하긴 했지만, 아직도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정확하게 표출하지 못하는 상황적 한계가 큰 아쉬움으로 남겨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영화의 세계 안에서 살아갈 텐데, ‘감독 임덕윤’이 지향하는 자기 영화의 최종 완결점은 무엇인지, 최종 목적지와 목표는 무엇으로 설정되어 있는지, 그 내용을 진솔하게 듣고 싶다고 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요즘 가장 고민하고 있는 게, ‘영화를 계속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현실을 느꼈다고나 할까, 제대로 된 페이(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는 것도, 체력이 너무 떨어져 활동에 어려움을 느끼는 등의 여러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노출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전문 스태프를 구하는 게 정말 어렵네요. 하다못해 연출부를 구하는 것도 난항입니다. 간간이 도움을 주는 분들이 나타나지만, 전문가가 아닌 분들도 있다 보니 작업이 더뎌지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도 해요.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이 되었고 수상의 영예도 얻게 되어 제작비는 회수하지 못했더라도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지만…, 여러 가지로 한창 혼란스러운 시기입니다. 여러 제작지원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걸 혼자서 준비하기엔 버겁고, 인터넷 검색이나 그래픽으로 된 안내문 등을 정리해 줄 사람을 구하는 것도 쉽지가 않은 상황입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복합적인 상황에 많이 지친 듯 보였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생활신조 같은 게 있는지를 물었는데, 작년까지는 ‘안 되면 되게 하라!’였단다. 그럼 작년 이후는 무엇이냐 되물으니까, ‘안 되면 되게 하라! 그래도 안 되면 할 수 없고’, 그렇게 바뀌게 됐다 한다. 작년에 장편 작업을 중단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그것이라 했다. 전체적으로 침체된 상황 안에 그가 존재하는 것 같아 화제를 다시 바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지, 어떤 영향을 얻게 됐는지를 말해 달라고 했다. 대답은 곧장 나왔다. - ‘우리 어머니.’
“장애인 자식을 둔 대부분의 부모님 마음은 자식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소원 중 하나는 우리 어머니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겁니다. 장애를 입게 된 초창기의 일인데, 집에서 제가 성질을 부리며 이렇게 살아서 뭐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는데… 우리 어머니께서 중얼거리듯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도 살아 있어라.’ 어쩌면 단순히 재활이나 인식개선 때문만이 아닌, 어머니의 그 한마디 때문에 뭔가 살아 있을 만한 이유를 찾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자신의 소원이 어머니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것’이라는 대목이 듣는 이의 가슴에 걸렸다. ‘그래도 살아 있어라.’라는 한마디는 자식을 위해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모든 삶의 철학과 사랑 전체가 다 담겨 있는 금언이 아닐까 싶어졌다. 반드시 좋은 영화로 다시 또 관객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될 테니까,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삶의 각오 같은 걸 얘기해 달라고 했다. 자신의 삶을 얘기해도 좋고, 임덕윤 감독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객석에 앉았던 수많은 이들을 위해 덕담을 던져도 좋다고 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거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거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거라는, 그런 이야기가 있죠. 제가 건강을 잃어 보니 그 말, 정말 참말입니다. 다시 영화를 만든다며 건강에 소홀히 했더니, 이젠 영화마저 마음대로 작업하지 못해 2년을 흘려보냈네요. 건강하신 분들은 제발 건강 유지하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마시고 최소한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세요. 너무 무리하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하니, 적당히 적당히 하시고요.”
임덕윤 씨는 아래의 내용을 꼭 이 지면에 옮겨달라고 했다. 자신의 작업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이메일로 연락을 해달라는 것이다. 장애와 비장애 여부는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장애인 비장애인 함께’라는 의미로 이메일 이름 또한 jangbiham@daum.net 이렇게 정했단다. ‘장비함’이다. ‘장(애인)비(장애인)함(께)’인 것이다. 또한 자신의 영화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43’이 궁금하신 분들은 독립영화 전문 다운로드 사이트인 ‘인디플러그’ www.indiplug.net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모든 건 ‘Don’t worry, cheer up!’이다. 걱정 근심보다 스스로의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게 살아있는 느낌을 배가시키는 법 아닌가. 임덕윤 감독의 다음 작품 제목을 ‘감히’ 예상해 보고 싶다. 분명히 이렇게 정해질 것 같다. 24%나 43%가 아닌,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1.00’이 가장 좋을 듯하다. 이젠 100%가 등장할 차례 아닌가. 임덕윤 감독의 작품을 아끼는 전국의 모든 이들의 응원이, 전남 보성에서 요양 중인 그에게 은하수처럼 가득히 쏟아져 내리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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