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걸 마지막에 느낄 수 있는 생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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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한 사람을 만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불필요한 농담이나 인위적인 웃음 따위가 없어도,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곁에 있는 이들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쾌활하다 해서 아무 때나 웃음 짓는 건 물론 아니다. 진지할 때는 누구보다 몰두하고 치열하게 일과 과제를 진행할 줄 아는 사람, 그런 이들의 내면엔 남모르는 넉넉한 여유가 존재한다. 여기서는 그러한 인생을 ‘쾌활’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 인생에 딱 맞는 인물을 이번에 만나게 된 것 같다. 마주칠 때마다 그는 항상 무언가를 열띠게 토론하고, 부조리함을 지적할 때는 누구보다 앞장을 섰다. 업무에 파묻힐 땐 최고로 집중하지만, 그 이외의 상황에선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사람들 속에 존재하곤 했다. ‘세상에 거저 얻는 건 없다’는 말이 맞다 하면, 그런 인생을 살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은 분명 간단한 몇 마디로 정리되진 않을 듯하다. 직접 만나 그의 삶을 들어보기로 했다. 서울시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양영희 소장이 그 주인공이다.
내가 장애를 가졌나?
“등록 상으로는 지체장애 1급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80년대 처음 장애등록을 할 때 받은 거라 이후 지체장애가 뇌병변장애로 분류됐잖아요. 그래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뇌성마비장애 1급이에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8개월 만에 조산으로 태어났대요. 1.2kg의 미숙아였다는 거죠. 그런데 지방의 작은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당시엔 인큐베이터 같은 것도 없었대요. 그래서 그냥 집으로 데리고 가라 했대요. 미숙아니까 애가 살면 살고 못 살면 말고, 병원에선 그렇게 얘기를 했다 하더라고요.”
사십 몇 년 전의 대한민국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애가 살면 살고 못 살면 말고’라니…, 하긴 얼마나 많은 신생아들이 그렇게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졌을까 싶기도 하다. 보릿고개라던 1960년대 아니었던가.
태어난 아기를 보려고 사람들이 집에 찾아왔다는데, 포대기에 싸놓은 모습을 보면서도 아기가 어디 있냐고 물었을 정도로 작았단다. 엄마 젖을 빨 힘도 없던 미숙아는 돌이 지나도 목을 못 가누고, 앉거나 걷는 건 아예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3살 때 서울의 모 대학병원에 와서 진단을 받은 후에야 장애증상을 제대로 알게 됐고, 이후 7,8살 무렵 지팡이로 걷는 연습을 시작할 때까지는 집 안에서 기어 다니는 게 전부였단다.
“당시 아버지가 벽돌공장을 하셨는데, 일하시는 분들 중에 목수도 한 분 계셨어요. 어느 날 집 살림을 봐주던 언니 등에 업혀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데, 그 언니가 그러는 거예요. ‘영희야, 저기 봐라. 저건 네 목발을 만드는 거야.’ 저는 그게 왜 그렇게 싫었는지 몰라요. 정말로 싫었어요. 그래서 그 목수 아저씨가 제 목발을 만드는 걸 보면서, 또 집안에 들어와 숨어서 정말 엄청나게 울었어요. 너무 싫어서….”
그래서 물어보았다. 왜 그렇게 싫었는지, 무엇이 어땠기에 그만큼 싫었다는 기억이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있는 건지를 말이다.
“그 당시에는 그냥 싫었다는 느낌만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목발을 보는 순간 제가 이대로 걸을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거라는 공포 같은 걸 직감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남과 다르다는 것도 몰랐고 제가 걷거나 안 걷거나 이것의 차이 또한 몰랐는데, 목발을 보는 순간에 지금의 의미로 말한다면 ‘아, 내가 장애인이구나!’ 하는 걸 인식하게 됐다는 거죠. 정말 싫었고 정말 무섭고 두려웠어요.”
정말 싫고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 닥쳤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목발로 걷는 연습을 하게 되면서, 양영희 씨는 10살 전후에야 목발을 안 짚고도 걸음이 가능해지게 됐단다. 힘들지만 중증 뇌성마비를 가진 이들이 힘겹게 걷는 정도의 보행이 가능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는 받았지만 일반 학교를 간다는 건 엄두도 못 내며 몇 년을 보냈는데, 3살 터울의 여동생에게 입학통지서가 나오자 부모님은 영희 씨가 동생과 같이 학교를 다니게 하려고 문의를 했단다. 그런데 당시의 규정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10살이 넘으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 - 당시 영희 씨는 11살이었다.
‘장애’라는 마음속 낙인
“정말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살다가, 그때 처음으로 떨어져서 생활을 하게 된 거잖아요. 가장 힘들었던 게 그것 같아요. 낯선 사람들 속에서 부모와 떨어져서 혼자 살아야 된다는 거…. 물론 거기에 원생들이 많고 장애인 친구들도 여럿 생기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그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떨어져서 혼자 지내야 한다는 거 말이에요.”
재활원에서 중학교 3학년까지 생활하는 동안,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서 집은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됐단다. 비록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집이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을 텐데, 정말로 서울에 그 혼자 남겨지게 됐다는 의미가 된다. 그랬기에 가족과 함께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재활원의 학교가 아닌 일반 중학교로 전학을 갈 수 있을까? 간다면 제대로 생활할 수 있을까? 적응이 된다면 계속 다니고, 만약에 다닐 환경이 안 된다면 다시 재활원 학교로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결론은 전학이었단다. 3학년 1학기를 마치면서 지방의 집 인근 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학년이 같았던 동생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된 셈이 됐다. 물론 전학하는 과정이 수월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장애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훨씬 더 심했던 시절 아닌가. 양영희 씨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그 내용을 일일이 여기에 옮겨 적지 않아도 독자 여러분은 이미 다 훤히 짐작하실 것 같다.
“동생과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어요. 그래서 동생 친구들이 제 친구들이고, 제 친구들이 동생 친구들이었죠.”
쉬울 리 없던 학교생활을 모두 마치고, 영희 씨는 대학 진학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집 안에만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 같아 집에서 가까운 전문대학에 입학원서를 냈고 합격이 됐다는데, 그는 별 감흥도 없다는 투의 음성으로 합격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합격이 됐다는 말을 어떻게 그만큼 시큰둥하게 불행인 양 언급하느냐고 되물으니까, 가기 싫었다기보다는 자신과 뭔가 맞지 않았단다. 전공과 학교 분위기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원래는 컴퓨터 공부를 하고 싶어서 전산과를 지망했고 합격하게 됐죠. 지금처럼 윈도우에서 누구나 접근하는 게 아니라 코볼, 액셀 이런 프로그램을 다루던 시절이었거든요. 전산과에 당당히 합격이 됐는데, 학교에서 사람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와서 한다는 소리가 ‘여기는 인기학과라 졸업하면 다 취직이 된다. 그런데 영희 씨 같은 경우는 취직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취직이 될 사람 한 사람이 떨어지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다른 학과로 전과(轉科)를 해주면 좋겠다’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항의를 하고 난리가 났겠죠. 그런데… 제가 어리고 멋몰랐어요. 게다가 장애인 시설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까, 저 자체가 시설에 있을 때의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요. 수동적이고 또 만성적으로 순응적인 그런 거 말이에요. 더욱이 특수학교 다닐 때 받았던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정말 싫기도 했고요. 그래서 알겠다고 한 뒤에, 비인기학과로 전과를 하게 됐죠.”
‘최중증장애인 우선’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학과를 바꿨으니 학교생활의 흥미가 샘솟을 리 없었을 텐데,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정말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게 된 시점이 언제였는지를 물었다.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특별한 게 없었단다. 그저 남들처럼 졸업을 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해서 살지 않을까 하는,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떠올릴 수 있는 범주가 전부였다고 한다. 그렇게 말한 뒤, 영희 씨는 전혀 다른 관점의 의견을 덧붙였다.
“제가 중학교 때까지는 기숙사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어린 시절을 형제들과 함께 보내지 못했어요. 언니와 저,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 이렇게 4형제인데, 언니는 배구선수였기 때문에 선수 생활에 바빴고 저는 기숙사에 있었으니까 집에 없었고, 결국 집안에는 어린 동생 둘만 있었던 거죠. 그런데 형제들 모두 성장해서 나이가 들었잖아요. 언니는 대학 졸업 후 방송 계통의 일을 하고 여동생은 미술을, 남동생은 사진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같이 방에 앉아서 얘기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그 대화에 낄 수가 없는 거예요. 공통적인 대화의 요소들이 없었다는 거죠. 대화 속 화제 안에는 제가 아는 사람도 없고 제가 가본 곳도 없고, 그러니 문화의 공간도 틀리고 활동의 영역도 틀리고 친구들도 다 달랐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뒤처진다는 느낌을 확 갖게 된 거예요. 기본적인 대화를 같이 할 수 없다는 게 그랬어요. 그래서 이십대 중후반까지는 희망이 없고 그날그날을 그냥 사는 것 같았어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살 수밖에 없나? 부모나 형제나 누구에게 의지해서 살 수밖에 없나…, 이런 생각들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옛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회인이 됐다는 여러 소식을 들으며, 또한 결혼 소식을 들으면서, 그래도 가장 문이 열려 있다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 했지만, 필기를 못하면 응시 자체를 못한다는 조항이 끝내 그를 붙잡았단다. 소아마비인 친구들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데 자신은 안 된다는 것, 대학을 졸업했는데 전공을 살릴 만한 일도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그러다가 어머니의 지원으로 당시 유행하던 도서대여점을 친구와 절반씩 투자해서 함께 운영하게 됐는데, 그것도 3년 여 만에 정리해야 하는 상황으로 결론이 내려졌다고 한다. 형제들이 전부 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거나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에 취업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지만,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를 위한 자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단다.
하지만 무조건 벽으로만 둘러싸인 세상은 없는 법! 당시 정립회관 안에 있던 정립전자에 다니던 친구와 연락을 하기 위해, 정립회관 대표전화를 알고자 홈페이지에 들어갔단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대표전화로 전화를 걸어 누구를 바꿔달라든지, 아니면 연락해달라는 메모를 전해달라고 하려 했는데, 홈페이지 화면에 뜬 팝업창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동료상담학교 신청자를 모집합니다.’ 2박3일의 짧은 과정이라는데 상담이라는 게 어떤 건지는 대충 알겠고, 장애인들끼리 하는 상담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서 일단 신청서를 제출했단다. 그런데 연락이 온 건 그 학교가 개최된다던 날짜 하루 전이었다고 한다. 됐던 사람 중 누구 하나가 빠졌는지, 아니면 인원수가 모자랐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참가할 수 있겠느냐는 담당자의 전화에 양영희 씨의 대답은 딱 한마디로 이어졌단다. “아, 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모집광고에서 정말 기억에 깊이 남겨진 게 있었어요. 팝업창에 난 모집광고에 ‘최중증장애인 우선’이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중증장애인 우선! 그때까지 취업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고, 심지어 몇몇 장애인 직업학교에선 저의 장애가 심하다는 이유로 거부까지 당했었는데, ‘중증장애인 우선’이라는 말이 너무나 인상적으로 남았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자신만의 인생 첫 발걸음을 내딛은 게 아닐까 싶은 동료상담학교 신청은, 이후 ‘인간 양영희’의 삶을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시키며 드넓은 길을 활짝 열게 만들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먼저, 그가 듣게 된 강의의 내용 자체가 당시의 그에겐 획기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애는 철저히 개인의 문제였을 뿐이고 혼자 감당해야 할 십자가였는데, 강의를 맡은 강사는 장애가 사회적 문제이고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2박3일의 동료상담 학습을 마치고 이어진 2차 교육과 3차 교육까지 열심히 들었으며,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된 세미나도 꼬박꼬박 참석했다고 한다. 그렇게 사회적 관계의 폭을 점점 더 넓히다 보니, 2001년 12월에 진행됐던 자립생활 일본 연수자 명단에 ‘양영희’ 또한 포함되게 되었단다. 2001년이면 우리나라에 ‘자립생활’이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된 원년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시작점부터 양영희 씨가 자신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열심히, 진짜 삶을 살고 싶다
“그 기초법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장애인복지법과 4대 보험을 설명해 주며, 복지관 같은 현장에 직접 찾아가서 장애인들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상담을 해주는 게 주된 임무였어요. 같이 일하게 된 분들은 전부 경증장애를 가졌는데, 저의 장애가 가장 심한 편이었죠. 그래도 저를 받아주는 곳이 있다는 게 너무 좋았고 행복했어요. 뭔가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거, 그건 월급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가족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제가 뭔가 집중하며 일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거든요.”
그런데 우연일지 필연일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분위기와 흐름이라는 게 당시의 양영희 씨 주변으로 가득 몰려들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소위 ‘정립회관 사건’이라는 게 그 즈음 터졌고, 이동권 쟁취를 위한 서울역 노숙농성이 본격화된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그가 직업으로써 기초법 상담을 시작한 것도, 이동권 투쟁에 직접 동참하게 된 것도 전부 엇비슷한 시기에 벌어지고 진행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강의나 강좌교육을 듣는 것, 세미나와 특강에 참여하는 게 너무 좋았고 기뻤단다. 개별모임 형식으로 공부를 같이 하는 것도 정말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2년 3년 지내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애운동계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무언가의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들었다고 했다.
“상담원 활동을 1년 하고 나서 공공의 지원금이 끊겼을 때, 월급이 아니라 최소한의 활동비 정도만 받게 될 상황이 돼서 남을 사람은 남고 그만둘 사람은 그만둬야 하게 됐을 때…, 저는 그냥 남기로 하고 일을 계속했어요. 자립생활운동을 해야겠다는 확고한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함께하는 자리마다 참석하고 같이 지내다 보니까 많은 변화가 제게 생겨났죠. 어느 정도의 사람들도 잘 알게 됐고,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연대 같은 것도 생겨나게 됐거든요. 또 제가 그동안 많이 공부하고 익혀 두었던 것들이 쓸모가 있게 됐고, 어느 자리든 발언을 매번 하게 되면서부터 발표의 기회도 많이 얻게 됐고요. 집회 때 연단에 오를 일이 점점 많아졌고 강의 의뢰도 자주 받게 됐어요. 저의 언어장애가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은 편이라서 전달력이 어느 정도 있다 보니까, 발언의 자리가 훨씬 더 많이 생기게 된 거죠.”
센터의 상담원 생활은 결국 열악한 환경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센터 자체가 정리되는 상황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단다. 3년 정도의 상담원 활동을 접은 그를 맞이한 건 무엇이었을까. 1년 가까이 진행된 정립회관 민주화 투쟁이었고, 그 와중에도 여러 지인들로부터 같이 일을 하자는 제의를 받으며 지내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손목을 잡고 이끌어간 곳은 신천지 개척(?)의 길이었던 모양이다. 서울 중랑구 지역에 새로운 자립생활센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센터 운영에 대해서 잘 알고 실무능력도 있는, 한마디로 말해서 자립생활 관련 업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던 것 같다. 적임자로 지목된 게 양영희 씨였고,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 2005년부터 지금까지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이끌고 있는 이 또한 그가 맞다.
“자립생활센터가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저는 센터마다 가지는 메리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다 함께 고민하며 많은 의견을 나눴는데, 우리는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펼쳐야겠다고 결정했어요. 청소년들 같은 경우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서른 후반의 나이가 돼서야 활동을 시작했거든요. 만약에 제가 이런 자립생활이나 사회적 역할 활동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일찍 고민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커요. 저는 지금 이십 대에 장판에 들어와서 활동하는 친구들, 그 친구들이 제일 부러워요. 세상을 먼저 보고 자발적으로 뛰쳐나와서,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잡으려 하는 거잖아요. 후회를 하건 나중에 포기를 하건 뭐든 간에, 인생에 대해 조금 더 일찍 고민하고 답을 찾는다는 건 정말 중요하거든요.”
대화 내내 느꼈던 점이지만, 양영희 씨는 자신이 해야 할 말과 제시해야 할 의견의 순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달라붙지 않은, 꼭 필요한 대화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인생의 무게로 몸소 익혔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 제 인생의 좌우명이 있어요. ‘나이 들어서 일을 그만두고 더 이상의 활동을 못하게 됐을 때, 누군가 나를 찾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게 첫 번째이고요. 두 번째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 아, 그래도 나는 열심히 살았다는 점을 느낄 수 있는 생을 살고 싶다’는 거예요. 나이 들어서 찾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인생은 정말 허무할 것 같거든요. 제가 얼마만큼 그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들이 저한테 뭔가 하나라도 배울 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으니까요. 더 열심히 공부하고, 보다 더 발전시키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싶습니다. 자립생활투쟁이야 뭐, 제가 죽을 때까지 할 것 같지만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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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옥님의 댓글
황현옥 작성일소장님 해맑은 미소 저에게 열심희 일어나 걸어라 체찍이되였읍니다 지난과거에는 서울 교과부 복지부 국회 미친듯 날뛰던 집회시위현장에서 아낙이였읍니다 하지만 이제 땅강아지처럼 텃밭에서뒹굴고 직영판매 하며 악착같이살거예요 소장님이 삶을 포기하지않는 이상 우리친구들에게 해맑은 미소로 힘과용기를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