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먼저 열면 삶이 더욱 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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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편안한 인상을 가진 사람과 마주대하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불편한 마음 같은 건 잠시 바닥에 내려놓게 된다. 누군가의 좋은 인상이라는 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스스럼없이 열게 만드는 힘이 바로 그 첫인상이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꺼내기에 가장 적임자 같은 우리 곁의 이웃 한 분을 모셨다. 컴퓨터 전문 강사이며 자립생활센터 활동에 적극 임하고 있는 오병철 님이 이번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의 미소 띤 얼굴과 같은 대화를 함께 나누기로 한다.
갑자기, 난데없이, 하루아침에
“88년 초까지는 나안시력이 0.9였는데, 고교 2학년이 끝나고 봄방학을 할 무렵 갑자기 글자가 안 보이더라고요. 정말 갑자기, 별안간, 불현 듯….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도 자세하게 잘 모르겠대요. 당시에는 제 병명도 몰랐고 다른 방법이 없어서, 2학년을 마치면서 휴학을 하게 됐습니다.”
자신이 1970년생이라 밝히면서 “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죠?”라는 말과 함께 웃음으로 대화를 시작한 오병철 씨는, 자신의 장애 증상이 정말 갑자기 찾아들었다고 했다. 그렇게 일순간 안 좋아졌다면, 그것이 다니던 학교를 휴학할 만큼의 급격한 악화였다는 걸까? 실제로 그랬단다.
“난데없이 눈이 심각하게 안 좋아지면, 누구든 간에 안과 좀 잘한다고 알려진 병원은 다 찾아다니게 되잖아요. 저도 다 쫓아다녔습니다. 큰 종합병원에 가서 일주일 동안 종합검진도 받고 다 했는데, 별다르게 의사들한테 들은 얘기가 없었어요. 저의 병명은 어쨌든 나중에야 듣게 됐고, 그때부터 집에 있어야 했죠.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도대체 정확한 병명이 무엇이기에, 병원에서조차 확답을 듣지 못했다는 걸까? ‘환반부변성’이란다. 뭐라고 했지? 환반부? 한반부? 정확한 단어가 머릿속에 잡히지 않아, 몇 차례나 반복하며 그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함께걸음>을 통해 참 많은 분들을 만나며 지내왔지만, 솔직히 처음 듣는 증상이 등장한 것 같아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망막색소변성증을 ‘RP’라고 줄여서 말하듯, 자신의 증상은 ‘MD’라는 약자로 표현한다며 오병철 씨는 부연설명을 이어갔다. MD라고? 개인적으론 처음 듣는 증상이 맞았다. 그 의미를 즉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미안함이,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가슴 한구석에 박혀 있어야만 했다. 거두절미하고 결과부터 언급한다면, 만남이 끝나자마자 인터넷 검색부터 들어가야 했다. 궁금했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는 ‘환반부변성’이 아니라 ‘황반변성’이 정확한 용어인 모양이다. 영어로 ‘macular degeneration’라 한다니, 약자로 ‘MD’가 맞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RP는 망막의 가운데가 보여요. 밖에서 안쪽으로 모여지면서 눈이 나빠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중앙에서부터 밖으로 나가는 거예요. 가운데부터 안 보이는 거죠. RP는 야맹증부터 그 증상이 처음 나타난다고 하는데, 저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눈앞의 가운데 부분부터 안 보이는 증상으로 살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그건 장애등급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증상을 ‘난데없이’ 얻게 된 이후로도, 당시엔 굳이 장애등록을 할 뚜렷한 이유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맹학교를 다녀야 할 입장도 아니고 사회복지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굳이 ‘등록’이라는 절차를 염두에 둔 적은 없었단다. 분명 장애가 맞기는 맞는데, 2년에 한 번 정도 병원에 가서 확인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부모님의 의견이 우선됐던 모양이다.
처음 상태 그대로, 앞으로도 계속
“어떻게 보이는가 하면요. 가운데가 안 보이는데 그 나머지 부분은 보이는, 그러니까 영어 알파벳의 ‘U’자 형태로 양쪽 옆과 아래쪽만 보이는 거예요. 눈의 가운데와 위쪽은 뭔가가 눈을 가리고 있어요. 이걸 안개 같다고 해야 할지…, 완전히 짙은 안개라고 해야겠네요. 그 안에 점들이 있어요. 노란 게 있고 빨간 것들도 있고, 그런 것들이 가운데 부분을 완전히 가리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눈의 시선 방향을 위로 올려 뜨면서) 이렇게 올리면 밑 부분이 약간 더 보이게 돼요. 제가 초점을 위로 올리면, 아래쪽이 따라 올라오면서 보이는 부분이 조금 넓어지거든요. 그렇지만 글자 같은 건 보기가 힘들죠. 그림이나 이런 것들도 그렇고….”
‘황반변성’이란 주로 노인에게 생기며 당뇨와 함께 노인성 실명으로 이어지는 주원인이라는데, 이 증상이 한쪽 눈에만 먼저 생기는 경우가 많아 일상생활에선 불편함을 덜 느끼다가 갑자기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중한 병이라는데, 어떻게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려던 젊은 학생한테 이 증상이 찾아든 걸까?
“복지관 같은 데를 다녀야 하니까, 그때가 1995년이었나? 등록에 필요하다고 해서 2급 판정을 받았어요. 그런데 3년 전인가, 병원에 갔더니 1급을 주더라고요. 마침 활동보조인이 필요했던 시기였는데 말입니다. 2급에서 1급으로 바뀌게 됐으니까, 그 이유를 의사 선생님한테 한참 물어봤던 게 기억납니다. ‘내 눈이 어떤 상태인 거냐. RP냐, MD냐? 망막변성이라 하던데, 왜 나한테는 야맹증 같은 게 아직 오지 않는 거냐. 나는 왜 남들 같은 진행 비슷한 게 없다는 거냐.’ 하며, 정말 진지하게 질문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의 답변이 너무 단순하면서도 확실하더라고요.”
‘당신은 갈 데까지 갔다. 이미 다 갔다.’는 게 최종판정의 표현이었단다. 장애의 진행이 이미 끝났다는 건데, 야맹증부터 서서히 진행되며 실명에 이르는 RP와 달리, MD는 급격하게 찾아든 상태 그대로 고정되는 특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이 아주 많았던 시절
“어릴 때는 생각이 아주 많은 아이였어요. 제가 신체적으로 원래 키가 작고 운동성도 떨어지는 편이라서, 활달하게 나다니는 성격이 아니었거든요. 주로 집에서 책을 읽었어요. 책을 참 좋아했어요. 집에 있든 다른 집을 가든 간에, 예를 들어 친척집에 간다면 그 집에 있는 책을 계속 읽을 정도로 즐겨 읽었죠. 어릴 때는 책을 전집(全集)으로 월부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그렇게 많은 책을 사면, 그걸 한 달 안에 다 읽어버립니다. 그럼 꼬박꼬박 내야 하는 월부만 남게 되곤 했죠.”
오병철 씨는 자신의 100미터 달리기 최고기록이 22초란다. 그만큼 운동이나 활동적인 부분에선 좀 뒤떨어지는 편이었다는 예를 들면서, 그는 그 ‘22초’ 얘기를 몇 차례나 언급했다. 공부를 열심히 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읽은 책 분량이 워낙 많았던 까닭인지 초등학교 당시의 성적은 좋았단다. 그런데 평균 90점이 안 되는 88점 내외로 늘 머물러야 했다고 한다. 왜냐, 음악이나 체육 점수가 늘 ‘양’ 아니면 ‘가’로 나왔기 때문에, 거기서 평균 점수가 확 깎여버린 탓이라 했다. 체육과 마찬가지로 음악 역시 악기나 노래 같은 실기를 못했기 때문에, 그 성적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단다.
“대신 사회와 역사, 국어 과목은 정말 좋아했어요. 조용한 학교생활을 보냈죠. 집과 학교와 교회만 오가는 생활이었어요. 친한 친구들도 몇 명 있었지만, 그냥 평범하게 지내기만 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는 10등 안에 들었다면 중학교 때는 20등 안에, 고등학교 때는 30등 수준이 될 정도로 차츰 내려오긴 했지만요.”
어린 시절부터 생각이 많았던 습관은 청소년기 이후에도 여전했던 모양이다. 지금 돌이켜 본다면, 정말 그때 무슨 생각을 그리 많이 했을까 하는 게 궁금해질 정도로 생각이 많았단다. 중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교회 목사님과의 면담이 있었는데, 장래희망을 묻는 질문에 오병철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20대 때는 과학자가 되고 싶고 40대 때는 정치가, 은퇴한 다음에는 목장 주인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책에서 읽은 게 많았던 탓에, 노후의 계획까지 체계적으로 언급하는 그를 보며 목사님께서 많이 놀라셨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천천히 편안하게 살아가고 싶다
그렇다면 학교 휴학 문제는 어떻게 정리됐을까? 졸업은 해야겠다 싶어 복학하려고 2,3년 후 학교를 찾아갔는데, 당시 교육제도가 그러했듯이 1년 후 복학을 안 했기에 이미 자퇴처리가 됐다고 했다. 복학 여부를 묻는 학교 측의 문의 자체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검정고시로 방향을 돌려야 했단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했을까? 중도장애가 되어 뒤늦게 점자를 배우는 게 참 어렵다고들 많이 얘기하는데, 그 역시 그 어려움을 똑같이 겪었을까?
“저는 손이 다 안 펴지거든요.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장애판정과 상관없이 살아가긴 하는데, 손이 완전히 안 펴져요. 팔도 완전히 안 펴지고, 근육과 척추 같은 데가 마비라기보다는 경직되는 상태로 살고 있어요. 온 몸 관절이 다 그렇다고 해야겠죠. 골반도 왼쪽이 약간 올라와 있어서, 왼쪽다리가 조금 짧아요. 이게 신경을 눌러서 왼쪽 골반 밑으로 늘 통증이 있는데, 이건 어찌할 방법이 없는 거죠. 그런데 점자를 읽기 위해선 손가락이 다 펴져야 하거든요. 그래야 손끝으로 읽는 게 가능해지는데, 저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 상황과 마주쳤을 때… 솔직히 또 한 번의 벽을 느껴야 했습니다. 물론 살면서 벽을 하나 넘으면 또 벽이 나오곤 했지만, 그때의 벽은 참 크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방송대를 갔습니다. 다른 시각장애인들이 많이 하는 걸 해야만 정보와 자료를 얻기 수월할 것 같아서 교육과를 전공으로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곧바로 성공회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사회복지를 다시 전공으로 공부했죠.”
서울 강동구에 있는 집에서 그 대학원까지 가려면 거리가 꽤 될 텐데 어떻게 다녔느냐고 물으니까, 그는 이 날 대화 중 몇 차례나 등장했던 대답을 다시 반복하며 말했다. “저 혼자 잘 다녀요!” 황반변성이라는 1급의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보이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보행하고 원하는 곳을 찾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직업을 물으니까 그는 두 가지가 자신의 직업이라며, 첫 번째로 정보화강사라고도 불리는 컴퓨터 방문교육강사를 언급했다.
“컴퓨터는 1995년부터 공부했어요. 취미 같은 게 아니라, 컴퓨터라는 게 정말로 제게 필요했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정보를 얻든 독서 등 무얼 하든 간에, 컴퓨터를 할 줄 알아야만 그 모든 게 가능했기 때문이에요. 대학과 대학원 공부도 컴퓨터를 통해서 했죠. 그러다 보니까 제가 시각장애인들 중에서는 약간 고급사용자에 들어가게 됐고, 마침 2003년에 관련 자격증을 두 개 취득한 게 있어서 강사 일을 직접 하게 됐습니다. 사실 대학원 등록금도 이걸로 다 냈거든요.”
컴퓨터 방문교육이라는 건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궁금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울 수도 있지만, 강사가 집으로 방문해서 강의를 듣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그 교육을 담당하는 게 오병철 씨의 역할이라는데, 그 스스로 ‘잘 다닌다’고 말했지만 1급의 시각장애로 방문교육을 직접 담당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듯싶었다.
“도움 없이 혼자 다녀요. 그런데 방문교육 같은 경우에 처음 가는 집이면 좀 애매해지죠. 아파트를 찾아가는 게 제일 애매해요. 번호가 안 보이니까요. 일반주택이면 ‘몇 번째 골목에서 어느 집 옆에 있는 어디’ 하는 식으로 대충 묻든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는데, 제 입장에서는 아파트가 더 애매하더라고요.”
요즘은 일주일에 3회 7주 강의로 진행한다는데, 동시에 최대 2명까지 강의할 수 있게끔 한국정보화진흥원의 기준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컴퓨터 강사가 첫 번째 직업이라면 두 번째 직업은 뭘까? 서울의 송파솔루션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장직을 담당하고 있단다. 그래서 지역 내의 센터 활동을 하면서 집회 현장에도 가급적 꼬박꼬박 참가하며 지낸다는데, “왜 집회는 매번 비가 오는 날 하나요?” 하며 불만 아닌 불만을 웃음과 함께 얘기했다.
오병철 씨는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화를 했다. 그게 참 인상적이어서, 조금 다른 각도의 질문을 던졌다. 중도에 시각장애를 갖게 됐다면 그 좌절 비슷한 걸로 움츠려드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은데, 그런 통념과 달리 그는 더 여유롭고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어린 시절에는 존재감 없는 조용한 아이였다고 했는데, 지금의 성격은 원래 본인의 성격 그대로인지를 물었다.
“특별한 계기 같은 건 없지만, 더 편안한 적응을 위해선 제가 먼저 타인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상대하며 대화하는 것도 기술이라면 기술이겠죠. 그래서 편안하게 상대하고 대화하며 지내는 게 생활이 됐어요. 20대 시절부터 제가 꿈꿔왔던 내적치유상담이나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기 위해선 준비해야 할 게 많았거든요. 사회복지를 대학교부터 했다면 이미 끝냈을 텐데 대학원까지 돌고 돌아오긴 했지만, 작은 돌멩이 하나로 살아가듯 천천히 걸으며 살아가고 싶어요. 그것이 더 커다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길인 것 같거든요. 편하게 마음먹고 살고 싶습니다. 더 많이 돌아다니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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