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인생이 IL(자립생활)의 과정이었다
본문
사회적 약자, 특히 장애인을 위한 복지가 장애당사자의 주체적 인권 보장을 위한 게 아닌, 자선과 시혜의 의미로 퇴색된 채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종교계 시설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런데 ‘종교’라는 그 거대한 벽에 ‘그건 잘못됐다!’고 외치며, 한 편의 박사학위논문으로 조목조목 반박한 이가 있어 ‘사람 사는 이야기’가 그를 만나보았다. 직업재활학 이학박사학위논문인 ‘예수 그리스도의 장애인관(觀)과 교회의 장애인사업에 관한 인식연구’를 발표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의 정중규 부소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삶을 함께 들여다보기로 한다.
결과적으로는 경증이 중증으로
“돌을 두 달 앞두고 소아마비에 걸렸어요. 제가 소위 그 유명한 ‘58년 개띠’인데, 1959년에 소아마비가 전국에 엄청난 유행병으로 돌았다고 하죠. 그래서 58년 개띠들한테 특히 소아마비 장애가 집중됐어요.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이게 미군들의 어떤 전쟁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는 겁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소아마비에 대해 잘 몰랐다고 했거든요. 난데없이 모르고 당한 거죠. 소아마비 환자들이 단번에 급증했어요. 처음엔 다들 열병인 줄 알았대요. 그래서 병원에 가면 전부 독감 정도라 생각하고 진단하며 넘겼다는데, 이게 다 소아마비였던 거예요. 저도 똑같이 당한 거죠.”
시작하는 글이 좀 무겁다. 이번 글 주인공인 정중규 씨의 발언 내용을 그대로 옮긴 거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도 살아오는 동안 생활 주변에서 ‘58년 개띠’로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분들을 유독 많이 만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 후유증 내지는 미군의 어떤 특정 무기 사용이나 사고 은폐 등의 흉흉한 얘기는, 살아오는 내내 들어왔던 미확인 정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대목을 다시 듣게 되니까, 이건 분명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직감 비슷한 게 떠올랐다. ‘무슨 전쟁’의 고엽제 피해자라는 어르신들의 분노가 아직도 이 땅을 떠나지 않는 게 대한민국의 현주소 아닌가.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중규 씨는 두 가지의 시행착오가 더해지며, 결과적으로 자신의 장애가 지체장애 1급이 되는 원인을 만들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58년 개띠’들의 소아마비 증상은 한쪽 다리를 저는 정도로, 일반적인 보행 자체는 가능한 수준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나치게 당시 의료기술에 기댄 탓이었을까? 두 가지 시행착오의 첫 번째는 소아마비의 위험을 미리 알게 된 집안에서 예방접종약을 유럽에서 공수해 왔는데, 세 차례 접종해야 하는 그 주사를 두 번째까지 맞고 세 번째 접종을 하기 전에 소아마비에 걸렸다는 것이다. 원래 ‘약이 독’이라 하지 않았던가. 좋게 되라고 준비하던 ‘약’이 결과적으로는 ‘독’이 되어버린 듯하다.
당시 정중규 씨의 집안은 대구에서 3대 대기업으로 불릴 만큼, 아버지께서 아주 큰 섬유 계열의 사업을 하셨단다. 그 3대 대기업 중 2개 기업은 지금도 30대 재벌 목록 안에 들어가는 규모를 유지하고 있지만(물론 비자금과 워크아웃으로 골치를 앓고 있긴 하지만), 아들의 장애를 치료하러 모든 걸 쏟아 붓다가 좌절하신 아버지의 사업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아들의 장애 때문에 그 큰 기업이 몰락한다는 게 지금의 통념으로 보면 언뜻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아버지는 그 사업을 아들이 대를 잇게 하기 위해 일곱 번째 만에 아들을 보셨단다. 누나가 여섯이라는 의미가 된다. 무조건 아들에게 사업을 잇게 하려던 당시의 시대상이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셈이 된다.
아무도 없이 혼자였다는 것
“중학교 1학년이 됐을 때… 집안이 완전히 망가졌죠. 엄청 컸던 집마저 은행으로 넘어가고, 저를 학교에 업고 다니던 공장의 형들 또한 다 나가버렸고…. 결국 저 혼자 골방에 박히고 갇혀버리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저의 고통은 시작된 거고, 집안이 망하면서 저는 내면적으로 곪아 떨어지기 시작하게 된 거죠.”
그때서야 비로소 ‘아, 내가 장애인이구나.’ 하는 절망을 깨닫게 됐단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던 무렵 사춘기가 찾아들면서, 그에게는 모든 갈등이 이중 삼중으로 겹치며 덤비기 시작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근본적인 인생의 회의감’, 그건 10대 시절 내내 자살 하나만 꿈꾸게 만드는 원인으로 증폭됐단다. 그런데 그의 집안은 당시 대구 안에서도 유명했던 5대째 가톨릭 신앙을 이어가던 집안이었고, 일가에서 신부와 수녀를 여럿 배출한 독실한 믿음을 간직했었다고 한다. 그런 집안에서 가정과 기업 활동과 성당, 이 세 가지밖에 모르는 삶을 살아가시던 아버지의 절망이 가장 컸던 것 같다고 한다.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왔어요. ‘왜 내게 이런 병이 왔는가….’ 물론 당시에 비슷한 장애를 갖게 된 분들 또한 다 같은 절망을 하셨겠죠. 그런데 그런 회의가 종교적인 원망으로 밀려들면서, 저 역시 죽음만 떠올리게 됐어요. 그러니까 13살 때부터 21살 때까지 8년간은 제게는 완전한 죽음의 시기가 됐던 거죠. 아침에 눈을 뜨면 죽을 연구만 했고, 잠을 자려 할 때도 하느님한테 ‘제발 죽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어요. 심지어 저의 가족까지 골병이 들었다는 게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제가 자살기도를 일곱 번 했다는 걸 모두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지면에 옮기기 어려운 갖가지 수단(?)을 다 동원해서 자살기도를 이어갔는데, 그때마다 응급조치 등으로 살아나기는 했던 모양이다. 진짜 죽으려고 작정을 했는데도,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도 죽음이 실행되지 않았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깊고 깊게 파고들 무렵 그에게 생겨난 건 문학적 감성이었고, 그가 파고들기 시작한 건 그의 마음과 비슷한 내용을 담은 문학서들이었단다. 보들레르, 엘리어트, 도스토예프스키, 쇼펜하우어….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부 사람 골병들게 만드는 문학’인 퇴폐주의 일색이었다는 것이다.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없으니 우울증은 더더욱 심해졌고,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일기만 쓰고 무언가를 적기만 했다고 한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사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너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분
21살에 이르자, 그는 최후의 결심을 하게 됐단다. 마지막 자살 시도, 정말로 인생을 끝내자는 것! 아침에 일어나 죽게 해달라는 기도를 마치고 유서를 남긴 뒤, 그는 십여 년 만의 매서운 강추위라던 부산 광안리 바닷가로 향했다고 한다. 자살하기도 전에 얼어 죽을 것 같은 정말 매서운 추위였다고 한다. 날은 어두워지고 이미 얼어버린 손과 얼어가는 몸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간절한 음성 하나가 그의 마음에 들려왔단다. 그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죽지 말라’고. ‘하느님은 너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고 계신다’ 고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들려온 그 음성에 무언가의 깨달음이 떠올랐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가로등도, 오가는 차도, 사람도 없던 어두운 곳에서 그는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이건 무슨 신의 조화일까? 시커먼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가다 멈춰서더니 한 남자가 내렸고, ‘여기서 뭘 하는 거냐’면서 입이 얼어 말도 못하는 그를 차에 태워 물어물어 집에 데려다 줬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살던 동네 인근의 철강회사 사장이었는데, 마침 그 길을 지나가다가 얼어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차를 돌려 다가온 것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시도였는데도 그것마저 실패했으니, 난감한 마음에 며칠을 잠만 자며 수많은 생각에 빠져 있었단다. 그런데 뭔가 새로운 게 떠올랐다고 한다. 흠뻑 빠져 지내던 엘리어트의 작품 중 한 구절이 마음에 새겨졌다는 것이다. ‘다시 일어나 보자. 새로운 땅이 보인다.’ 정말로 이상했단다. 삶은 그대로 아무 변화가 없는데, 마음속에서는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말이다.
새로운 길은 그렇게 주어질 준비를 미리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건축자재를 파는 점포를 운영하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가게를 맡아 장사를 해보라 하셨단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적 상처가 지우개로 지우듯 단번에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8년이란 세월을 죽음 하나만 떠올리며 파묻혀 지내던 그는 극도의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었고, 남의 시선 앞에 나선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절실하게 밤을 새워 기도했단다. 내게 용기를 달라고, 사람 앞에 나서서 떨지 않게 해달라고.
어렵고 힘겹게 가게를 맡아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거동이 힘든 몸으로 일을 하는 그를 좋게 봤는지 업자들이 멀리서 찾아와 그의 새로운 고객이 되어갔단다. 더군다나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는 말 그대로 건축 붐이 일어났던 기간이었기에, 매장 안에 물건을 갖다놓을 필요도 없이 공장에서 현장으로 직접 배송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됐다고 한다. 금전적 이익을 보는 재미를 느끼게 됐고, 서서히 용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단다. 거기에다가 가장 마음이 열리게 된 계기는 건축 노동을 하는 이들의 순박함을 알게 된 이후란다. 자립생활(IL)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때가 바로 경제적 독립과 직업의 필요성을 몸으로 직접 깨닫게 되는 계기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제 마음이 사회를 향해 열리게 됐죠. 그래서 성당에서 하는 성령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다른 장애인들을 만나게 됐죠. 그렇게 모이고 모이다 보니까, 우리들끼리 좋은 일을 해보자 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선교회를 만들게 됐어요. 장애로 인해 맺힌 한을, 서로를 위한 봉사로 펼쳐가자는 것이었죠.”
현장에서 세상의 눈을 뜨다
15년 간 건재상을 하는 기간이, 인간 정중규에게는 아주 귀중한 인생의 변환점으로 새겨진 듯했다. 비록 지역적으로 완고한 보수의 환경 속에서 살아왔지만, 건재상을 시작하던 79년도에 그는 부마항쟁의 실제현장 안에서 세상의 일그러짐을 생생하게 목격했고, 총칼로 국민을 짓밟으며 등장한 신군부세력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또렷이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런 눈을 뜨게 만든 건 하루 종일 틀어놓던 라디오였는데, 특히 그는 CBS(기독교방송)에서 세상을 새롭게 보는 법을 아주 소중하게 배우게 됐단다. 당시 기독교방송은 철권통치의 독재자 시절에 거의 ‘목숨을 내놓고 하는 방송’이라 느껴질 만큼 진보적 색채가 강했는데, 방송에 나오는 민중신학자들과 민중목사들의 강의 내용이 그대로 그의 가슴에 확 와 닿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국현실에 대한 눈을 뜬 거예요. 저 혼자 눈을 뜬 거죠. 그 민중신학자들을 만나면서 저의 의식이 완전히 뒤집어졌고, 비로소 사회에 대한 의식도 깨어지기 시작했어요. 80년대 중반 이후 부산에서 시국강연회가 많이 열렸거든요. 당시 야권의 유명 인사들이 와서 많은 강연을 했는데, 수동휠체어를 직접 밀며 그 강연회마다 다 참가했어요. 강연장에서 휠체어에 앉은 이는 저 혼자였던 것 같아요. 그렇게 강연회 참석을 열심히 하면서, 자연스럽게 제 가슴에 맺힌 건 바로 ‘이동권 문제’였습니다.”
버스는 말할 것도 없고 택시 한 번 타려고 해도, 무슨 군사작전을 벌이듯 누군가 대신 잡아줄 때까지 건물 뒤나 골목 안에 숨어 있어야 했던 건 둘째치더라도, 어렵게 택시를 타고 나면 정말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던 게 너무 싫었단다.
“어쩌다 운 좋게(?) 택시 하나 잡아타면, 가는 시간 내내 완전한 설교를 들어야 했어요. 자기가 오늘 얼마나 거룩한 일을 했느냐는 식으로, 운전사가 자화자찬하는 설교 아닌 설교를 내릴 때까지 들어야 했다는 거죠. 늘 그런 식이었어요. 그래서 선교회를 만들었던 그 멤버들끼리 다짐을 했죠. 우리 장애인들이 운전면허를 따자고요. 그 운동을 벌여가지고 스무 명 정도가 면허를 땄는데, 그게 장애인 운전면허의 처음이었고 제가 1세대가 된 것이죠.”
최초의 장애인 운전면허라…. 이건 결코 가볍게 접하고 넘길 일이 아니다. 지금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시의 운전면허 지원조건에는 신체장애가 있을 경우 시험에 응시 자체가 안 되는 갖가지 독소조항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그 조항들을 이동권 문제 해결을 위한 장애인운동으로 개정하게 만들어 면허를 취득했다면, 아주 큰 쾌거를 자생적 풀뿌리운동으로 이뤄냈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중요한 건 직접 해보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면허를 딴 우리가 장애인들을 차량으로 이동하게 하는 봉사를 하자고 의기투합했고, 그때부터 집에 갇혀 있던 재가장애인들 찾기 운동을 벌여서 하나하나 찾아나가기 시작했죠. 그런데 거의 전부 다 부산에서 가장 어려운 동네에만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저는 역으로 장애인 복지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저 개인의 문제였는데 말입니다. 좋은 동지들을 하나둘 씩 알게 되면서, 너무 늦게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죠. 처음부터 이론적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현장을 통해서 먼저 깨닫게 된 겁니다.”
잘못된 틀을 반드시 바로 잡겠다
타성에 젖어 있던 기존의 조직들과 함께하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의미 있는 작업을 해보자는 동료들의 권유에 따라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로 했고, 그 첫 움직임으로 참여하게 된 게 2000년 전후로 서울에서 열린 한일(韓日)IL(자립생활) 세미나였단다. 그 연결고리가 되었던 게 (사)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였고, 그는 비로소 지역의 울타리를 벗어나 넓은 세상과 직접 부딪치며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집중적으로 주목한 건 다른 이들과 달리, ‘교회’라는 틀이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복지와 봉사의 맨얼굴이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수많은 활동들이, 실제 성경 속의 예수님 말씀과는 배치되는 게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게 항상 눈에 보였습니다. 장애인도 주체적인 인격의 당사자인데, 모든 게 ‘그저 불쌍한 마음에서 행하는 자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최근의 일이 아니라, 초기 예수의 제자 시절 이후 교회가 로마로 편입되면서부터 변질되어버린 상태를 지금까지 강건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애당사자가 가톨릭 신부가 되어, 당사자 인권의 눈으로 함께해야 한다고 믿게 됐죠. 현재의 교회가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착한 일을 하는 거라며 하고 있는데, 제가 볼 때는 그게 아니고 방향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걸 바로 잡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거죠.”
정중규 씨는 직접 가톨릭 사제(신부)가 되기 위해, 몇 년 동안의 지난한 교회법 공방을 교회 측과 주고받았단다. 교회법 때문에 장애인은 무조건 사제가 될 수 없다는 한국 가톨릭의 논리에 맞서, 그는 로마교황청에 직접 문의를 한 결과 놀라운 답변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교회법에서 규정한 ‘장애’는 신체적인 장애가 아니라 성적인 장애 즉,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체장애라 해도 병으로 얻은 장애가 아닌 스스로 절단하고 자해한 사람을 한정해 지체장애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과 유럽에는 정중규 씨 자신보다 더 심한 장애를 가진 사제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끝까지 안 된다는 건 진정한 교회법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런 틀을 깨고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는 데, 저는 저의 인생을 바칠 겁니다. 사제의 삶은 접었지만, 진정한 예수님의 삶이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하는 데 제 모든 걸 다할 겁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약한 이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당사자주의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이 로마의 국교가 되고 가톨릭 주교들과 로마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절대 버릴 수 없으니까, ‘자선사업’이란 탈출구를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고 강화시켜 나갔죠. 직접 낮은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교회에 재산을 내고, 그 재산을 키우는 수단으로 자선사업을 확대시켜 나간 겁니다. 장애인들은 단지 그 수단이 됐을 뿐이죠. 로마 귀족들의 행태와 현재의 서울 강남 대형교회들의 형태는 동일한 틀에서 존재하는 겁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그 정신을, 저는 반드시 제 인생을 바쳐 구현시키고 증명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만든 예수님의 틀이 아닌, 예수님 말씀 자체를 밝히는 데 진정으로 헌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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