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웃음 같은 세상을 촬영하고 싶다 > 사람 사는 이야기


아기의 웃음 같은 세상을 촬영하고 싶다

[사람사는 이야기] 다큐사진작가 김광식

본문

   
 

의도한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우연히도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계속 예술분야의 인물들로 이어지게 됐다. 작년 말에 소개한 소설가 이서진 님, 발레강사 김수미 님에 이어, 이번에는 사진작가를 취재하게 됐다는 연락이 편집부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장소는 대구광역시란다. 몹시도 추웠던 12월 말 어느 날에 동대구역에 내려, 도시철도를 타고 경대입구역으로 향했다. 가지고 있는 정보는 이름 석 자와 전화번호가 전부였기에, 만나기로 한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는 셈이기도 했다.

개찰구 앞에 서서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저만치 앞쪽에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동휠체어에 앉아 멈춰 있던 한 사람이 보였을 뿐이었는데, 이런 걸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서울역에서 고속철도(KTX)를 타고 대구에 내려 처음 찾아가게 된 경대입구라는 역에서 역시 처음 보게 된 누군가에게 ‘저 사람이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이 떠올랐다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반복되자 그 ‘누군가’가 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정말로 그가 맞았다. 이번 호의 주인공은 그렇게 ‘직감’이라는 우연과 함께 마주하게 된 셈이다.

김광식, 다큐사진작가 - 명함 교환과 함께 첫 인사를 나눈 뒤, 그와 함께 반월당역 인근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넓은 실내 공간이 여유롭게 다가서는 가운데, 대화 준비를 마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함께걸음>이 어떤 월간지이고 ‘사람사는 이야기’가 어떤 구성으로 활자화되는지에 대한 취지를 먼저 설명하고 있는데, 중간에 말을 막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마음대로 적으시란다. 어떤 규칙이나 틀 같은 게 있으면,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자유가 없는 게 아니냐며 무슨 내용이든 편하게 적으라는 것이 아닌가. 무언가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대화가 술술 풀릴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예상은 그대로 맞았다.

 

지워진 아니, 지워버린 과거

   
 
사진 촬영이 동시에 진행됐기에, 선글라스를 벗어야 하냐며 그가 물었다. 그냥 쓰고 계시라 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자유가 아니냐며, 그의 ‘자유론(論)’을 되받으니까 빙그레 웃는 모습이 이어졌다. 자신의 장애는 뇌병변장애 1급이고 선천적이라 했다. 그럼 부모님이 언제 처음 장애를 알게 되셨냐고 물으니까, 잠시 뜸을 들이듯 혼자만의 손짓을 하던 그는 자신이 고아라고 했다. 부모님의 얼굴은 모르고, 고아원에서 고등학교 나이까지 지내다가 도망쳐 나왔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그럼 언제 고아원에 가게 된 거냐 물으니까, 그런 건 얘기를 안 해주기 때문에 자신도 모른단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어떻게 간직하고 있을까?

“저는 옛날 생각을 별로 안 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기억도 없을 뿐더러 사람이 과거에 너무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제게 주어진 현실 안에서 제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 그런 생각만 간직하며 지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요즘 사람들이 과거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은데, 그러다 보면 정신적으로 약해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죠.”

게다가 몇 달 전에 절친하던 후배 하나가 자살을 했고 그걸 옆에서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는 다짐을 인생의 이름으로 되새기게 됐다고 한다. ‘그래도’라는 단서를 달며 넌지시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자신은 정말로 좋은 기억 자체가 없단다. 가정 안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요즘처럼 휴대전화나 인터넷이나 복지 관련법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굳이 과거의 기억을 얘기하라면 ‘맞았다’는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 어린 나이부터 맞으며 지내왔다는 거, 남들처럼 부모님 사랑을 받고 살았던 것도 아니기에 맞은 기억이 전부란다. 일부러 얘기 안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얘깃거리가 그만큼 없다는 뜻이란 것이다.

그럼 고아원에서 도망 나왔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대목일까? 그건 사람이 성장하면서, 독립에 대한 욕구를 강하게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란다. 자유라는 거, 바깥세상이라는 동경 그리고 자기결정권이라는 게 한데 뭉친 결과라는 것이다. 김광식 씨는 ‘마마보이’와 같은 용어를 극히 싫어한단다. 삶을 살아오면서 보니까,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건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방목(放牧)하듯 밖에 던져놓고 풀어놓는 일이라고 한다. 몸이 안 좋을수록 움츠리는 게 아니라, 더욱 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부모가 자기 곁에 평생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비장애 부모도 마찬가지고, 장애아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고, 그래서 더더욱 자식 문제로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식이 살아갈 수 있는 밥상까지만 차려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 밥까지 일일이 다 떠먹여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 저 같은 뇌병변장애를 가진 사람들한테는 그게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대화가 일순간 묵직한 내용으로 돌변해 버렸다. 자신의 이런 견해를 보수적이라 할지도 모르겠고 시대차이가 난다 할 수도 있겠지만, 장애를 가진 자식이 나이가 들어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선 방목을 하듯 세상 속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하단다. 그렇다면 고아원을 도망쳤다는 그의 당시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당시에는 ‘그 다음’이 없었단다. 정식절차를 밟고 나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안 잡혀야 끝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만약에 잡힌다면…” 하며, 그 말줄임표와 같은 침묵이 잠시 그와 함께 맴돌았다.

“제 또래들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법 없는 교도소’라는 거…. 거기 안에서 지켜야 할 통제와 규율이라는 게, 예를 들어 나이가 많이 들어도 그 나이가 되도록 담배 하나 마음대로 못 태운다면, 그것만큼 서글픈 인생이 어디 있을까 싶었죠. 또 한 가지 생각했던 건 어차피 가족이 있든 없든 간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몸으로 젊었을 때 사회생활을 일단 해보고 나서 뒷일을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마음이 강했어요. 그 시설 안에서 나이 먹으며 사는 것보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설계도 없이, 일단 그 좁은 울타리를 무조건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단다. 당시에는 정말 그랬단다. 그럼 당시엔 수동휠체어였을 텐데, 요즘의 제품과 달리 무거웠던 그 휠체어로 이동이 자유로웠냐고 물으니까, 김광식 씨는 질문한 이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무게감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별로 무겁진 않아요. 타는 사람 입장에서는…. 비장애 입장에서 밀어주거나 접을 때는 무겁다고 생각할진 몰라도, 저처럼 이렇게 평생 가는 사람들한테는 그게 무거운 것도 아니에요. 그게 다리니까….”

 

내 안의 ‘끼’를 발휘하고 싶다

   
 
흡연이 가능한 카페였기에,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 담배연기를 퍼뜨릴 때였다. “제가 원래 올림픽 선수였는데, 패럴림픽 선수 생활도 했는데….”라는 말이 혼자만의 넋두리처럼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건 무슨 얘기냐 물으니까, 김광식 씨는 자신이 88서울장애인올림픽 때 보치아 종목의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하여 단체전 은메달을 땄다고 했다. 개인전도 잘했었는데 마지막 한 쿼터를 남기고 젊은 나이에 욕심을 부리다가 실패했다며, 88년 당시의 추억들을 잠시 떠올렸다. 장애인의 운동이라는 게 거의 전무하던 시절 아니었던가. 올림픽을 유치해놓고 부랴부랴 출전할 선수들을 급조하듯 만들어내던 분위기였기에, ‘보치아’라는 종목 또한 그 바로 1년 전인 1987년에 영국에서 국내로 뒤늦게 도입된 것이라 한다.

올림픽에 출전하여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는 건 사실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다는 증거이고, 그 성과는 절대로 과소평가될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는 올림픽 출전 이후 고아원 탈출을 감행했다며, 시간대를 맞춰가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올림픽 출전이라는 게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계기를 만들어냈음이 확실한 것 같았다. 이 대목에 대한 그의 언급은 없었지만, 바깥세상의 자유로움을 직접 목격하고 메달 획득이라는 성취를 이룬 입장에선 자기결정권의 확신을 품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도망이든 탈출이든 뭐든 간에, 그는 통제하는 사람 없는 이 사회 공간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물론 현실은 냉혹한 ‘현실 그 자체’였지만 말이다.

“대구 이쪽의 시설에서 나와 곧장 서울로 갔어요. 밑바닥 생활부터 다해봤죠. 길바닥에 깔아놓고 과일장사도 해봤고, 넥타이와 양말을 가져다 팔기도 했고 얻어먹어보기도 했고요. 그런 걸 다 해봤기 때문에, 저는 별로 부끄럽다거나 이런 건 없어요. 제가 뭐, 남에게 피해를 끼친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뇌병변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은 정말 안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럼 당시 서울 어디에서 생활했냐고 물으니까, 청량리 쪽인데 미도파백화점에서 고려대 가는 방향 인근이었다고 했다. 순간 세월의 긴 흐름이 느껴졌다. ‘미도파백화점’이라는 명칭 자체가 사라진 지 얼마나 됐던가. 또한 청량리역을 비롯한 부근의 지도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던가. 그렇게 서울 생활을 4년 남짓 한 뒤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는 그에게 꼭 물어야 했던 핵심의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인생에서 사진과의 만남은 언제 이뤄진 건지, 그의 손에 카메라가 쥐어진 건 언제부터인지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슨 운명과 같은 특별한 계기는 없었단다. 단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호기심 비슷한 게 생겼고, 갖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며 솔직함이 묻어나는 대답을 이었다.

   
 

“제가 나름대로 끼는 좀 있는 것 같은데, 이 장애 때문에 끼를 발산할 게 없어서 갈등이 많았었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림은 못 그리고, 글을 쓰고 싶어도 잘 쓸 수가 없고….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간에 이 예술분야는 끼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물론 끼가 있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대구에 내려와 지내다가 무료로 사진 촬영을 가르쳐 주는 곳을 알게 됐어요. 일반 학원이 아니라 직업전문학교였는데, 거기를 다니면서 카메라를 알게 되고 사진이라는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지금 어떤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뜻밖에도 그의 대답은 자신이 디지털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필름? 그렇단다. 디지털 제품도 몇 달 사용해봤는데, 아무리 이 사회가 속도를 강조한다 해도 디지털 이미지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단다.

“저는 사진이 밥맛하고 똑같다고 봐요. 무슨 의미인가 하면, 밥솥의 밥이 다 됐다고 해서 뚜껑을 그냥 열어버리면 맛이 없어지잖아요. 조금 뜸을 들여야 하고 단 10분이라도 지난 다음에 그 밥의 가치가 생겨나게 되는 것처럼, 사진도 저는 그렇다고 보거든요. 일정한 시간을 주면서 현상하고 인화하는 이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 디지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보니까 너무 급해요. 주변 사람들을 다 둘러봐도, 바로 찍어서 바로 보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요. 하지만 글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고 사진도 마찬가지로, 이런 예술과 예능의 세계는 장기적인 호흡으로 봐야 하지 급하게 해선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빨리빨리 해야 될 일이 있고 조금 느긋하게 가야 할 일도 따로 있는데, 휴대전화와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과 확산 때문에 모든 게 급해졌다는 김광식 씨 나름의 문화비평이 잠시 이어졌다. 하긴 이젠 길을 걸으며 영화를 감상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아날로그’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가 급격하게 희미해지는 세상 속에서, 디지털의 발전과 미래는 도대체 얼마만큼의 획기적인 변화를 우리 삶에 요구할지…, 그걸 예측마저 하기 힘든 틀 안에 우리가 지금 ‘갇혀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필름의 시대를 알고 경험했던 김광식 씨이기에, 더군다나 지금까지 필름을 고집하는 입장이기에 그의 문제제기에는 일정부분 공감할 대목이 담겨 있었다. 상업사진을 찍는 전문가들보다도, 실제로 요즘은 일반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장비가 더 고급이고 훨씬 더 풍족하다. 강변 둔치에 가득 이어지는 자전거의 행렬도, 1대당 수백만원 짜리 제품들이 대부분이라 하지 않던가. 반나절의 가벼운 산행만 하는데도, 복장과 장비는 전문가를 능가하는 고가의 제품으로 갖춘 등산객들이 산 전체에 가득하다는 소식은 이제 일상적으로 듣던 얘기가 됐다. 글쎄…,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으니까, 바뀌었다고 하니까 잔소리 말고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걸까? 해답 없이 반복하던 자문자답이 그 자리에서도 되풀이됐다.

 

자신만의 사진을 촬영하세요

   
 
“저는 아기들 사진이 좋아요. 왜냐하면 그냥 막 웃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카메라가 다가가면 피하기 바빠요. 일단 피해야 하고, 피하지 않는다면 예쁘게 나와야 하죠. 물론 예쁘다는 개념이 수학처럼 정확한 답이 있는 게 아니지만, 여성이라면 예뻐야 하고 또 예쁜 게 여성이 되고, 남성일 경우는 멋있게 보여야 하고 강인해 보이면서 잘 생기게 보여야 한다는데, 저는 무조건 예쁘게 잘 보이려고 하는 그런 사진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인위적인 게 싫다는 거죠. 그런데 아기들은 그런 게 없어요. 말 그대로 자연스럽고, 촬영을 해도 자연스러운 그대로 나와요. 저는 그런 게 좋습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각각 있듯이, 사진 촬영에도 영역별 전문가가 따로 존재한다. 종합병원의 예를 들면 훨씬 쉽게 이해될 내용일 텐데, 안과 전문의와 치과 전문의가 서로의 전공 분야를 바꿔서 시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하다. 스튜디오 내에서 촬영하는 전문가와 대자연을 탐방하는 전문가의 영역은, 휴대하는 촬영 장비부터 생활방식까지 완전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언론사의 사진기자와 인물 프로필 촬영 전문가의 촬영법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마찬가지로 서로의 전문 분야가 상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광식 씨는 왜 다큐사진을 자신의 전문분야로 선택하게 됐을까?

“나름대로 모든 장르를 다 찍어보긴 했어요. 그런데 자기 스스로 추구하는 장르가 따로 정해지기 마련이거든요. 결혼 촬영도 해봤고 일상의 다양한 촬영도 다 해봤지만, 저한테는 다큐멘터리가 가장 맞는 것 같아요. 일단 상업사진 같은 경우에는 수많은 장비를 동시에 다뤄야 하는데 제 입장에선 그게 힘든 일이고, 또한 스튜디오와 같은 곳에 있는 걸 싫어합니다. 일정한 틀 안에 박혀 있는 걸 안 좋아하거든요. 자유분방하게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저의 길인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은 겨울철 기간에는 바깥 촬영을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건데, 뇌병변장애의 특성상 겨울에는 근육의 위축이 심해져 카메라를 다루는 데 제약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철 촬영은 가급적 자제한다며, 그는 앞으로 촬영하고 싶은 다양한 이미지들에 대한 구상을 잠시 이어갔다. 화제를 바꿔보았다. 취미는? 따로 특별한 건 없단다. 영화를 좋아하고 술 문화를 즐긴다고 한다. 술 자체를 잘 마시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대화하는 걸 즐긴다는 의미라며 부연설명이 덧붙었다. 그럼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 나이 마흔셋인데, 오십이 됐을 때 제대로 된 멋진 개인전을 크게 열어보고 싶단다.

“사진 이외에 꼭 해보고 싶은 거라…. 글쎄요. 한 가지가 있긴 있는데 그 꿈이 이뤄질지 안 이루어질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특히 휠체어를 탄 장애인 분들이 비장애인들에 비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거의 없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는 대강 이해하실 겁니다. 예를 들어서 비장애인 분들은 약주를 한잔 드신 다음에 노래방을 가든 당구장에 가든, 그 다음 문화를 즐길 수 있잖아요. 그런데 장애를 가진 분들은 문화를 즐길 여건이 너무 없어요. 제 꿈이라는 게 간직한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겠지만…,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열린 공간이 될 작은 카페를 꼭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같이 얘기를 하고 정보도 공유하면서 고민도 나누고, 그렇게 문턱이 없는 카페를 꼭 운영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계획이자 멋진 꿈이 분명하기에, 반드시 그렇게 이뤄질 거라고 답을 전했다. 긴 대화의 시간을 정리해야겠기에, 마무리 차원의 질문을 내놓았다. 사진 촬영을 즐기고 싶은데 장애 때문에 일정한 어려움을 느끼는 여러 분들께 조언과 충고가 될 만한 한마디를 남겨주시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는 마치 준비된 내용이 있다는 듯 곧장 답을 이었다.

“저는 사람이 절대 평등하지 않다고 봐요. 그게 무슨 의미냐 하면, 저한테 장애가 있는데 비장애인 사람들과 똑같이 찍겠다는 건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보이는 높이가 다르고 보이는 아래가 다르다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시선의 위치가 다른데, 그걸 왜 똑같이 찍겠다고 하느냐는 것이죠. 제가 꼭 권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장애를 가진 분들은 집에만 있으면 병이 납니다. 그렇기에 카메라를 핑계 삼으면서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시라는 겁니다. 자기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남들과 똑같이 가려 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꾸준히 사진을 촬영하시다 보면 자기만의 사진이 남겨지게 되죠. 절대로 남들과 똑같은 사진을 찍으려고 단기적으로 서두르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사진을 무조건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의 모양으로만 보려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사진의 프레임(frame : 사각의 틀)을 정한다는 건 집을 지을 때 기둥과 같은 것일 뿐, 그 내용은 동그라미가 될 수도 세모가 될 수도 있기에 사각형의 틀 한 가지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진의 기본 규칙은 지키되, 거기에 너무 얽매이면 안 된다는 조언이 마지막 한마디로 남겨졌다.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 인사를 나눈 김광식 씨는, 카페를 나와 거리의 인파 속으로 정말 빠르게 파묻혀갔다. 그 뒷모습의 이미지는 마치 대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정경과도 같았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는 건 이 세상 전체를 자신의 무대로 삼겠다는 것이고, 언제든지 출발선 상에서 ‘가자, 앞으로!’의 외침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법이다. 언제든 그의 멋진 영상들이 우리 앞에 ‘확’ 다가오는 날이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되돌아오는 길 내내 떠올렸던 건, 그는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몇 시간 전에 느꼈던 것과 똑같은 ‘직감’이었다.

 

남은 이야기 하나

모든 대화를 나눈 뒤 자리를 정리하려 할 때, 김광식 씨는 대뜸 이런 의견을 꺼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대화 내내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사진 촬영이 제대로 안 된 게 아니냐고, 이걸 벗고 다시 촬영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었다. 그래서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을 그에게 얘기했다. ‘선글라스를 벗은 사진은 독자 여러분들이 다 보시게 될 거다.’ ‘어떻게?’
‘이러이러한 방법이 있다.’ 그랬더니 그는 아주 크게 껄껄 웃으며 그게 좋겠다고 했다. 이제 독자 여러분께 그의 얼굴을 아래에 공개한다.
김광식 씨… 정말 미남이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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