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의 20년 삶을 박차고 탈출한 장애우 부부
본문
‘20년’이라는 시간적 길이는 얼마나 될까? 나이가 들다 보면 20년이든 30년이든 전부 다 과거형으로 치부하며 무덤덤해질지 모르겠지만, 단 하루가 1년 같은 이들에게 20년이라는 무게감은 영겁(永劫)의 무한한 세월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천국의 20년은 하루처럼 즐겁다 해도, 지옥에서의 하루는 수백 수천 년만치의 고통과 절망으로 일그러질 게 분명하지 않은가.
이번 9월호 ‘사람사는 이야기’는 지난 20년 동안 이 사회의 망각된 공간 안에서 온갖 착취를 당하며, 처참한 인권침해 속에 생존해왔던 이들이 주인공이라고 했다. 그들이 누구인지 헤아리기 이전에, 20년이라는 시간의 길이부터 계속 떠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20년’은 젊은이들에겐 평생이고 30대에겐 삶의 대부분이며, 40대 이상에게는 인생 절반의 가치를 되새겨야 할 넓이가 된다. 그런 기간 동안 착취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신음하며 지냈다는 건… 글쎄, 단순한 시간적 잣대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취재를 준비하는 동안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겪었을 일그러진 인생의 무게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현존하던 지옥, 그날 이후
정말 지겹도록 비가 내렸다. ‘지겹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2011년 여름 내내 ‘하늘 뚫린 빗줄기’는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이번 호의 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날도, 예외 없이 종일 내리치기만 했다. 비가 내린다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일단 취재 나가는 입장에선 사진 촬영의 공간적 범위가 크게 제약된다는 점이 늘 아쉬워진다. 어떻게든 야외 분위기를 연상하고 설계하며 찾아간다 해도, 결국은 실내의 한정된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채로 모든 게 마무리돼야 하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찾아간 곳은 경기도 모처의 주거단지였다. 20년 동안 노동력 착취뿐만 아니라 입금되던 기초생활수급비마저 손에 쥐지 못한 채 살아왔다던, 그리하여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의 직접적인 현장조사와 함께 공영방송의 고발프로에도 등장하게 된 바 있던 ‘그들’의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시간적 환경으로는 한 달, 그러니까 30일도 채 안 되는 기간 사이에 지옥과 천국을 옮겨가는 극단적 체험을 실제 경험했을 텐데, 그들은 그 참혹한 현장을 벗어나 지금은 어떤 상태로 생활하고 있을까?
그들이 머물고 있다던 집의 현관문 앞에 도착했지만, 초인종을 누르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더 필요했다. 20년 착취의 그 참혹함이 알고 있던 기억의 전부였기에, 이 현관문 뒤에 존재할 그들의 현재를 쉽게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 모습 그대로라면 어떻게 얘기를 풀어야 할까. 무언가 달라진 게 있다면, 대화의 진행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까. 이 만남의 마지막 결론은 무엇으로 남겨지게 될까…. 만나기도 전에 묵직한 화두를 만지작거려야 했기에,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기까지는 참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그런데 ‘극적인 반전’이라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일 같다. 지금까지 엉킨 실타래처럼 주무르고 있던 생각 모두가 단번에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아니, 이 두 사람이 지옥탈출의 그 주인공들이라고?
이방인의 등장에 일순간 긴장한 빛은 역력했지만, 이 집의 원래 거주자라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을 두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된 외모,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어야 했던 그들의 건강은 아주 많이 호전된 듯 보였고, 무엇보다도 20년의 악몽을 일정부분 지워낸 듯 심적인 평온을 되찾은 눈빛이 차례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떤 나날을 보냈기에, 이렇게 완전 다른 이미지로 이들이 존재하게 된 걸까? 정말 큰 놀라움이 가장 먼저 앞장서며 다가왔다. 실내에 들어섰고, 재회의 인사를 다시 나누며 서로의 자리를 잡았다.
이 대목에서 독자 여러분께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아직 정리해야 할 복잡한 사항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또한 그 긴 세월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기에, 부부인 그들의 실명을 거명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고 굳이 가명을 사용하며 말을 돌릴 필요도 없을 듯하다. 그래서 남편인 강OO 씨와 아내인 박OO 씨를 이 지면에선 각각 ‘남편’과 ‘아내’라는 호칭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또한 그 주거공간의 실제주인이 ‘아내’ 박OO 씨의 친언니 부부이기에 언니인 박OO 씨는 ‘언니’라는 호칭으로, 언니의 남편이자 ‘아내’ 박OO 씨의 형부이신 성OO 씨는 ‘형부’라는 호칭으로 대신하며 이 글을 정리함을 미리 말씀드린다.
우리 권리를 되찾아야 돼!
재회의 덕담은 짧게 끝났다. 당장 눈앞에 쌓여 있는 과제들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이 부부가 20년 동안 가혹하게 당한 노동력 착취와 기초생활수급비의 환수 문제, 인권유린에 관한 법적 대응 절차 등을 우선 논의하는 데만 1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의 삶을 암흑천지로 몰아넣었던 게 바로 남편의 직계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권문제가 폭로되고 밝혀질 때마다 걸림돌처럼 등장했던 게, 바로 ‘가족 내부’의 문제를 왜 외부에서 간섭하느냐는 적반하장의 항변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무리 가족 내부의 일이라 해도, 세상의 질서에 반(反)하는 인륜의 침탈마저 용인할 순 없는 일이다.
언니와 형부는 분명하게 법적인 조치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민사와 형사 동시에 소송을 집행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아무리 ‘가족 내부의 문제’라 발뺌한다 해도, 이건 피해자 입장에서 이미 정당성을 확보한 법절차의 진행이기에 끝까지 원칙대로 나아가겠다고 했다. 취재를 위해 듣고 있던 입장이었지만, 극히 당연한 결정이라고 찬성의 의견을 더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반나절 산책 정도로 치부될 잠시의 순간은 아니지 않은가. 되돌릴 방법조차 없는 이런 만행에는 분명한 질문이 던져져야 하고, 그 해답이 확실하게 도출돼야 마땅한 일이다. 같은 비극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끝맺음은 단호하게, 인륜의 상식 그대로 타협 없이 진행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건, 피해당사자들이 그런 조치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니와 형부는 이 부부가 세상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동원하고 강구하면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외지와 격리된 산골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물정 자체를 전혀 모르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축사와 농사일에만 매달려 노동력 착취로 살아왔던 이들의 재사회화(再社會化)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하루빨리 자립할 수 있도록, 본인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어서 만들고 싶다는 의견도 꺼냈다. 어떤 일이든 일을 하던 사람이 일손을 놓고 지낸다는 건 정신적으로 나태해질 수밖에 없고, 남에게 기대며 의지하려는 심리만 키운다는 내용이었는데 동감의 뜻이 절로 생겨날 만한 조언이었다.
분위기 반전은 그때 생겨났다. 이들의 권리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토론을 심각한 심정으로 진행할 때였다. 노예 같은 삶을 강요한 대가는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내용을 주고받을 즈음,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던 아내가 몸자세를 바로하며 혼잣말 같은 한마디를 꺼냈다. “우리는 우리 것을 다 찾고 우리 권리를 다 찾아야 돼.” 곁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아내의 굳은 얼굴을 향해 일순간 집중됐다. 같은 발언이 독백처럼 다시 한 번 더 반복됐다. “우리 권리를 되찾아야 돼!”
버려진 인생, 짓밟힌 인권
“매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 사람들인데, 뭐.”
또 다른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위의 한마디가 추임새인 양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건 독백이 맞았다. 당시의 상황 모두가 하나씩 떠오르는 듯, 남편과 아내의 표정은 몹시도 굳어지기만 했다. 언니가 이 두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3주 동안 해당 지역을 뛰어다녔던 얘기, 이들이 ‘그 곳’을 탈출한 뒤 가해자 측에서 걸려온 두어 통의 전화라는 게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현 상황을 파악하려는 의도였다는 거, 피부를 뒤덮은 검붉은 반점들은 전부 다 축사의 짐승들한테서 얻게 된 질병이라는 거, 몸 여기저기의 고통이 어떻게 생겨나고 심화된 건지를 설명하는 과정 모두, 두 사람에겐 쓰라린 고통만 떠올리게 만드는 내용뿐이었다.
이 지면에는 차마 옮겨놓지 못할 최악의 인권침해 만행들도, 여러 가지 참상으로 이어지며 폭로됐다. 그런 얘기들을 하나씩 듣고 있던 그 와중에도 ‘이 내용은 절대로 지면에 옮겨 적으면 안 되겠다’는 사전검열(?)을 혼자 진행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그 내용의 암울함과 분노감은 독자 여러분께서 ‘알아서 이해해주시기를’ 바랄 방법밖에 없을 듯하다. 가장 답답하게 다가왔던 건 20년간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직계친족의 폭행, 그 폭력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세상으로 탈출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새벽 4시엔 어김없이 잠에서 벌떡 깨며 일어서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건 군복무를 마친 젊은이들이 흔히 얘기하는, ‘요즘도 기상나팔소리가 꿈에서 들려서 새벽마다 잠을 깬다’는 내용과는 그 무게감이 전혀 다른 것이다.
1년에 두 번뿐인 명절이 되면, ‘그쪽’에서 미리 전화가 온다고 했다. 그 지역 인근에 살던 직계친족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쪽 집’에 찾아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단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자기들끼리의 좋은 분위기를 깨지 말라’는 지시사항 아닌가. 그런 전화통화가 전해진 이후엔,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음식 찌꺼기 같은 내용물들이 명절 음식이라며 이들에게 전해졌단다. 남편과 아내, 이 부부에겐 정말 미안하고 죄송스런 표현이 되겠는데, 그 대목을 듣고 있던 입장에서 불쾌하게 떠오른 건 ‘음식물 분리수거’라는 용어였다. 완성된 명절음식 자체를 갖다 준 게 아니라, 먹고 난 흔적들이 이들에게 전해졌다는 의미 아닌가. 이것이 바로…, 이 모든 게 바로 이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20년의 삶이었다는 반증인 셈이다.
이제는 ‘나’를 말할 수 있겠다는 것
무슨 대화든 간에, 어렵고 힘든 부분을 파고들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이 취재를 처음 준비할 때 떠올렸던 방식대로, 대화의 방향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나름 강하게 밀려왔다. ‘그 방식’이라는 건 별다른 게 아니다. 가장 단순한 진행으로 그들의 마음에 접근하는 편이 낫겠다는 의도였는데, 그건 이 두 사람의 삶이 180도 변화된 현재의 상황을 가장 가벼운 마음상태로 편하게 떠들 듯 얘기하게 만들자던 계획이었다. 만나게 되면 어차피 어렵고 힘들었던 과거의 모든 걸 다시 또 들춰내게 될 일 아닌가. 그건 언급하면 할수록 끝이 없는 고역으로 남겨질 게 분명하기에, 아예 지금의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현재 시점으로 털어내는 게 훨씬 낫겠다는 나름의 의도이기도 했다.
그때까지는 집 안의 모든 이들이 거실 바닥에 동그랗게 앉아, 심각한 대화를 길게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서로의 위치를 바꿔 보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부부가 소파에 앉는 게 낫겠다고, 그게 사진 촬영을 위한 구도에도 좋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순간 돌발적 상황이 생겨났다. 외부로부터 닥친 게 아니라 내부에서 벌어진, 무언가 하면 남편이 그때까지 입고 있던 옷을 갈아입겠다고 밝힌 것이다. 사진촬영이 진행된다는 의미가 전달됐다는 건데, 아내 역시도 방 안쪽으로 사라지며 잠시의 시간을 요청했다.
이건 나름의 판단으론 굉장히 중요한 변화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맞이해야 했던 대상은 경찰 또는 검찰, 언론사의 카메라, 이웃의 시선 등등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러한 틀을 피하지도 못하며 맞이했던 게 아니라, 자신들이 주인공 되는 자리를 ‘자존감’과 나름의 ‘인격 표현’ 차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시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주인공이 될 공공의 영역, 그것이 고발성의 내용이 되건 뭐든 간에, 이 사회로 되돌아온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이들 또한 자신들의 권리와 욕구를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움직임이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거실 소파로 되돌아와 앉았다. 사진 촬영은 그제야 비로소 시작됐고, 두 사람은 그동안 부지불식간에 드러냈던 긴장감 따위를 옷 갈아입는 행위로 떨쳐버렸다는 듯 홀가분한 몸자세로 이방인(?)의 시선에 자신들의 눈동자를 맞추기 시작했다. 뭐랄까…, 그런 눈빛 자체가 ‘그것이 알고 싶다’는 질문에 대해,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답하는 여유를 담고 있는 듯 보였다고나 할까? 이 공간에 들어선 이후로 일정한 경계심을 떨쳐내지 못하던 두 사람의 표정에 여유마저 깃들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의 전환을 어떻게 해야 놓치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해답은 아주 단순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말하며 털어내게 이끌면 될 일이었다.
입속에선 맴도는데 표현이 안 되네요
“우리 강OO 씨는 지체장애 4급이고요. 박OO이는 지체장애와 지적장애의 중복으로 1급이에요.”
마주앉게 된 서로의 중간자리에 앉아, 중간자 역할 및 의미전달을 맡겠다고 자임한 언니의 설명이 시작됐다. 이 부부 두 사람 모두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게 됐단다. 이어져야 할 질문은 당연히 ‘어떻게?’인데, 언니의 설명을 듣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환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자신을 얘기한다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를 편하게 헤아리는 눈빛 같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사고를 당했다는 것,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다가 그 다리 아래로 자전거를 탄 채 추락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온 게 남편의 장애라는데, 정작 남편은 사고가 났던 당시의 기억은 없단다. 대신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았다는 것까지는 떠오른다고 하기에, 그 대목을 집중적으로 질문해 봤다.
함께 : 동네 풍경이나 그 당시의 모습이 떠오르는 게 있으신가요?
남편 : 그 나무 밑에서 놀던….
함께 : 그 나무? 특별히 큰 나무였나요?
남편 : 네, 지금 큰 다리가 있는 거기에 그 느티나무가 있어요.
함께 : 느티나무? 그 나무가 아직도 있고, 그 자리가 어린 시절 놀던 그 공간이라는 거죠?
남편 : 네, 거기서 친구들하고 놀았어요. 사고도 치고….
함께 : 사고라고요? 무슨 사고인데요?
이 대목을 언급한다는 게 쑥스러운지 말문이 막혔고, 그 대답을 언니가 대신 이어줬다. 정월대보름 같은 명절 전후마다 쥐불놀이를 친구들과 했는데, 불을 돌리며 장난하다가 엉뚱하게 불을 내기도 했다며 회고하곤 했단다. 그렇다면 아내의 옛 기억엔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 질문을 던졌더니, 어린 시절의 기억은 없다는 답이 곧장 되돌아왔다. 그런데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금방 알게 된다. 그런 기억이 정말 없다는 게 아니라, 이런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도 되는지 주저된다는 나름의 방어막이 느껴지는 것이다. 중간자 역할을 담당하겠다던 언니의 질문이 덧붙었다. 어린 시절의 교회 모습이 떠오르지 않느냐고, 아버지랑 같이 다니던 걸 기억해 보라며 당시의 여러 분위기를 잠시 풀어냈다.
아내 :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랑 같이 교회를 계속 다녔어요.
함께 : 그럼 당시 교회 건물 모습이나, 같이 다니던 친구들 얼굴 같은 게 떠오르세요?
아내 : 목사님이 제일 많이 떠오르죠. 목사님이 잘해 주셨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를 해주셨어요.
망각이라는 천에 덮어 있던 기억들은, 그 천을 걷어내는 순간 슬그머니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아내는 어린 시절의 추억 몇 가지를 더 떠올렸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됐던 당시의 상황을 물었다. 부부는 서로를 마주보다가, 오늘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큰 웃음을 터뜨렸다. 어른들이 미리 언약을 하고 진행한 결혼이었기에 두 사람 차원에서 따로 결정할 부분은 별로 없었던 모양인데, 아내를 처음 본 남편은 너무 좋고 마음에 들었던 반면 아내는 결혼하기 싫었다고 했다. 싫은 결혼을 왜 했느냐고 물으니까, 아버지가 결혼하라고 해서 결혼했단다. “얘는 원래부터 착했어요.”라며 언니가 한마디 거들자, “아버지 말씀은 거역을 못하지요.” 하며 아내가 화답했다.
결혼한 이후의 얘기가 등장하자, 아내는 여러 가지 기억과 심정들을 차례대로 꺼내놓았다. 좋았던 것과 속상했던 많은 경우들이 등장했는데, 듣고 있던 남편은 잔잔한 미소만 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더니, 무언가를 말하려 한참 시도하다가 이 한마디만 털어놓았다. “입속에선 맴도는데… 표현이 안 되네요.” 이후에도 남편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스스로를 얘기한다는 게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는 반증인 것 같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는 건 못내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금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게 무엇인지 물었다. “언니랑 같이 사는 게 행복하고, 형부랑 이 사람(남편)하고 같이 있는 것이 제일로 행복해요.” 옷을 사러 같이 나가고 동네의 교회도 나가면서 새로운 환경을 하나씩 적응해 간다 했는데, 계속 이어지던 아내의 표현법 중 눈에 띄는 대목 하나가 발견됐다.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말의 끝마다 항상 ‘요(이) 사람하고 같이요.’라는 표현이 달라붙는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의 금술이 워낙 좋다는 언니의 설명을 미리 들었던 바 있지만, 아내는 모든 생활과 생각의 범주 안에 항상 남편을 포함시키고 함께하려는 심정을 매 순간마다 내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지금, 현재 그리고 미래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모든 게 깜깜한 암흑을 벗어나 빛을 본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아 구체적일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의 마음속에는 무언가의 설계가 생겨나고 있을 것 같았다. “새롭게 일을 하고 집도 사서 가까운 데서 잘 살고 싶어요.” 남편이 오랜만에 하나의 문장으로 대답했다. 일단 급선무는 몸이 아픈 것부터 해결을 해야겠단다. 그 다음에는 뭐든지 다 하고 싶다고 했다. 아내의 생각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우선 교회를 열심히 다니겠단다. 따로 나가서 살게 되어도 행복하게 꿈꾸면서 살아갈 거란다.
언니 : 무슨 생각을 하면 행복해진다고 했지? 세 가지로 말해줬잖아.
아내 : 좋은 생각, 행복한 생각, 즐거운 생각.
언니 : 그렇지. 항상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아내 : 마음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진다고.
언니 : 그래 맞아.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약속할 수 있지?
대답 대신 부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화제의 대화를 한참 더 나누는 동안, 남편이 반복하던 그 한마디가 어쩌면 현재의 정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속에선 맴도는데… 표현이 안 되네요’ 막혀 있던 그 긴 시간의 인생을 되찾기 위해선, 어쩌면 그만큼의 시간이 별도로 필요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앞으로 진행해야 할 법적인 과정 또한 지루한 논쟁의 과정을 겪어야 할 테고, 모든 일이 순탄하게만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것도 섣부른 희망사항일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오늘, 지금, 현재이다. 그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 남은 건 미지의 푸르른 미래라는 것!
자리를 정리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기로 찾아오기 전에 떠올려뒀던 덕담 비슷한 인사를 직접 전해야 할 것 같았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이 두 사람 마음에 꼭 전해주고 싶었던 내용이기에 마무리 인사로 남겼다. 여러분의 이 인터뷰가 책에 수록되면, 글의 마지막을 이 내용으로 장식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말이다.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우리가 비디오테이프 같은 걸 볼 때, 되감기 버튼을 눌러 이전의 화면으로 돌려 다시 보곤 하죠. 그런데 여러분 인생은 이제 뒤로 돌아갈 일이 절대 없습니다. 어느 날 자고 나니까, 여러분이 눈을 뜨고 보니까 지난 인생의 그 자리로 되돌아가 있더라 - 이런 일은 앞으론 발생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보금자리가 생기고 새로운 인생이 재출발되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지난 일들이 꿈에서 떠오르는 거야 어쩔 순 없지만, 눈앞과 마음에선 이제 다시 생각할 필요 자체가 아예 없는 겁니다. 오늘과 내일만 생각하세요. 그게 가장 중요하고 정말 소중한 오늘의 삶을 만들어 줄 테니까요. 좋은 생각, 행복한 생각, 즐거운 생각으로 가득한 지금의 삶을 <함께걸음>은 늘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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