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이나 ‘예외’가 아닌, 진정한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해야 한다 > 사람 사는 이야기


‘특별’이나 ‘예외’가 아닌, 진정한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해야 한다

지식경제부 서기관 박태완

본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데도, 너무나 획기적인 큰 소식인 양 방송뉴스와 신문지면에 등장하는 일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건 어느 종교든 간에 종교 자체의 기본적 존재이유인데도, 어느 대형교회에서 이웃사랑 행사를 거행했다고 대서특필이 된다. 고위공무원이라는 이들이 자기 담당부서의 당연한 업무를 실행하는 건데도, ‘서민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 뭔가를 했다’며 큼지막한 제목과 함께 등장한다.

  고위공무원이 현장에 나타났다는 게 대단한 이슈가 되고, 교회가 이웃을 돕는다는 게 커다란 뉴스로 등장한다는 건 뒤집어 생각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화두가 내재되어 있다. 만약에 그 교회 규모가 작았다면 뉴스가 됐었을까? 또한 다른 모든 종교들의 선행활동은 그 이유도 대지 않은 채 간과하면서도, 왜 하필 몇몇 개신교 대형교회들만 연달아 대서특필이 되고 있는 걸까?

  하긴… 정말로 노래를 잘 부른다는 가수가, 방송 프로그램 속 경쟁을 통해 칭찬을 받는 세상이 됐다. 가수의 존재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노래를 잘 부르는 게 가수가 아닌가. 그런데도 경쟁을 시킨다. 가만히 놓아두면 세상순리에 맞는 당연한 일인데도, 굳이 끄집어내고 샅샅이 들여다보면서 얘깃거리를 만들려 한다. 그건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면, 단순한 논리에 매몰된 편협성을 드러내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잠시만…, 이런 골치 아픈 얘기를 왜 여기에 꺼내며 복잡하게 떠들어 대는 걸까?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 주인공을 만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기에, 나름의 생각이 적잖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장애를 가진 ‘공무원 1인’이 정부부처의 서기관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이 언론의 조그만 기사로 나왔던데…,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 기사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장애우는 국가기관의 서기관이 되면 안 되는 일인가? 그게 뉴스에 등장할 만한 일인가? 그냥 ‘국민의 1인’내지는 ‘공무원의 1인’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인 건데, ‘장애’가 얘깃거리로 부각돼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대한민국의 사고방식이 ‘거기까지임’을 드러나는 현주소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태완’이라는 사람이 지식경제부에서 서기관이 됐단다. 서기관이라는 직급이 대한민국의 장관 숫자만큼 드문 것도 아닌데, 굳이 언론에 노출돼야 하는 이유는 ‘장애’를 가진 인물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음을 의미한다. 월간 <함께걸음>은 이 땅의 장애우들을 위한 월간지이기에 그를 찾아가 만날 이유가 충분하지만, 중앙언론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그게 왜 뉴스가 되고 그게 왜 신기한 일로 취급 받아야 하는 걸까? 물론 결론은 아주 단순하게 내려진다. ‘아니, 장애의 몸으로 서기관을?’ - 그것이 전부일 테니까 말이다. 

  이 대목에서 극히 죄송스러운 한마디를 언급해야겠는데, 뭔가가 대단하고 놀랍다는 식으로 표현되는 중앙언론의 그런 기사는 가급적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그들이 애써 간과하거나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은 사실 하나를, 있는 그대로 터놓으며 거론해 보자.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재작년 세상을 떠나신 제15대 대통령이 바로 장애우였다. 장애우도 대통령을 하는, 대통령을 했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회적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반증하는 소식들은 여전히 들려온다. ‘장애인이…’, ‘장애우가…’. 우리는 모두 다 대한민국의 ‘국민 1인’이다. ‘장애와 비장애’라는 전제와 단서들을 꼬리표처럼 갖다 붙이는, 그따위 색안경을 쓰고 구분 지으려는 시도는 제발 좀 그만두자. 우리 모두는 똑같은 모양의 주민등록증과 똑같은 투표용지를 손에 쥐는, 너와 나 모두 함께 이 땅의 국민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우리 모두는 국민으로서, 모두 다 소중한 각각의 1인이라는 것이다. 

 

  위기에서 기회를 찾아내기

   
 
  이번 호 취재일정은 묘한 우연이 겹쳤다. 10월호에 수록될 ‘만난사람’ 취재차 과천정부종합청사를 이미 방문한 바 있었는데, 그 다음에 결정된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하필 같은 청사 공간의 ‘옆 건물’ 안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같은 노선의 지하철을 타고, 같은 역 출입구를 벗어나 같은 건물로 향해 가서 똑같은 출입증을 받아드는 기분, 그건 ‘같은 현상의 반복적 목격’을 의미하는 ‘데자뷰(deja vu : 旣視感)’를 연상케 했다. 

  박태완 - 지식경제부 안에서 정보통신정책을 담당하는 부서의 서기관. 2001년 기술고시(현재는 행정고시로 통합됨)에 합격한 뒤, 지난 정부의 정보통신부 소속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는 사람. 각종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가 항상 뒤따르는, 또한 그가 근무하게 된 자리마다 건물 입구부터 장애인편의시설이 새로 설치됐다는 후일담으로도 회자됐던 그 인물, 그 ‘1인’을 이번 호 ‘사람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나 마주앉게 된 것이다.

  뭐랄까. 처음 만나는 ‘누군가’의 첫인상이라는 건 언제나 개별적으로 생겨나기 마련인데, 이번 호 주인공은 거주지의 옆집 아니면 위아래 집에 사는 젊은 아저씨(?) 같다는 느낌부터 떠올랐다. 이 표현의 의미는 그만큼 편안하게 다가왔다는 뜻이 된다. 박태완 씨가 최근 언론에 등장했던 건 휠체어를 탄 몸으로 서기관 승진을 한 인물이라는 건데, 이런저런 질문을 계속 던져도 옆집 아저씨의 이미지에선 벗어나지 않았다. 웃음이 많고 겸손함을 기본으로 하는 인물을 만나면 이래서 덩달아 즐거워진다. 같이 웃고 같이 떠들며(?),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관계 같은 착각마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저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제가 (기술고시)시험을 봤던 게 전산직 분야였어요. 저희 쪽은 뽑는 인원이 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제가 들어올 때는 다섯 명을 뽑았어요. 1차 시험 접수를 했을 땐 경쟁률이 100대 1이었고, 10분의 1 정도 줄여서 2차 시험 때는 10대 1 가량 됐었는데… 운이 좋았었나 봐요.”

  휠체어 생활을 해야 하는 장애를 가지고 국가고시에 합격해 5급 공무원이 된 건, 2000년대 초반 당시에도 비슷한 경우를 접하지 못했던 것 같단다. 다른 장애의 예는 이미 있었을 것 같은데, 휠체어의 상황으로는 처음 아닐까 싶다고 한다. 당연히 이어질 질문이겠지만, 국가고시를 어떻게 준비하게 됐냐고 물었다. 그 이유와 원인과 계기 모두는 1997년의 아이엠에프(IMF)였단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해 연구소나 민간기업 등을 돌며 여기저기 면접을 보며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다행히 어느 기업에 취업이 성사됐다고 한다. 임원들 앞에서 편견 가득한 면접을 보게 됐는데 다행히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 사장님의 선택으로 취업결정은 났지만, 곧이어 터진 것은 IMF이고 회사에선 ‘무기한 입사연기’라는 연락이 찾아들었단다. 일반기업뿐 아니라 대기업들도 빗장을 꽁꽁 묶어두던 시절이었으니,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을 터.

  다른 데 취업의 문을 두드려도 얼어붙은 출입문은 열릴 줄 모를 때, 마침 국가고시에 합격한 학과 동기가 있어서 그 친구한테 이런저런 소식을 듣다 보니, 이공계를 나와도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견문이 상대적으로 좁았다고 판단될 만한 대목이겠지만, 실제로 따진다면 국가고시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들 또한 부지기수이다. 그런 면에서는 적절한 상황에 딱 맞는 동기의 합격소식을 제대로 잘 듣게 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왜냐? 세상 무슨 일이든 간에 ‘될 일’은 반드시 ‘될 계기’가 함께 뒤따르며 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시를 봤는데 1차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입사연기가 됐던 그 회사에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회사를 다니게 됐는데 1차 다음의 2차 시험을 계속 치르기도, 회사를 계속 다니기도 애매한 상황이 한동안 이어졌어요. 아이티(IT)기술을 다루는 회사였는데, 이쪽 기술이 워낙 빨리 변하는 데 대한 염려 비슷한 게 있기도 했고 공무원에 대한 기대치도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였고…. 어렵게 들어온 회사인데 괜히 관뒀다가 실업자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감 같은 게 복잡하게 뒤섞였거든요.”

  결론은 퇴사 후 국가고시 시험에 모든 걸 집중하기! 하지만 1차에 합격하고도 2차에서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고, 2001년 최종합격을 할 때까지는 나름의 우애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장애의 몸으로 공무원 생활이 가능한지를 당시 총괄부서였던 총무처에 문의해 확인까지 했고, 사무능력만 있으면 괜찮다는 확답을 얻은 뒤 더욱 더 정진해서 합격한 고시였으니 그 노력의 값어치는 다 함께 인정해야 할 일이다. 그런 과정 끝에 지금의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그는 그 이전엔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무언가가 달랐을까? 아니면 똑같은 모든 상황 안에서, 그 나름의 ‘뭔가’를 찾아냈던 것일까?

 

  아, 내 몸이 아픈가 보다

  이 지면의 주인공한테 언제나 첫 질문으로 던지던 내용을 그제야 물었다. 어떤 장애를 가지고 계신지 말이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되돌아왔다. 사실 그때까지는 그가 소아마비일 거라는 추측 겸 선입관을 갖고 마주대하며 있었다. 그런데 언급하기가 좀 민감하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그의 대답은 두어 갈래로 흩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증상을 A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B라고 설명해야 하나…. 주변 많은 이들은 A라고 알고 있는데…. 이 대목은 그가 이리저리 말을 돌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모든 얘기를 솔직하게 듣고 난 뒤에 이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를 <함께걸음> 차원에서 고민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는 ‘이젠 말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장애우 전문 월간지인데, 자신이 말을 섞는 입장이 되면 안 될 것 같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이 기사 원고를 정리하면서 다시 한 번 고민해 보겠다고 사전양해를 구하긴 했지만, 만남 이후 열흘 가까이 나름의 판단을 반복하다 보니 이 지면을 통해 확실하고 편안한 입장이 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이런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라서 글을 적으려는 내내 선택의 갈등 또한 많았지만, 모든 건 순리대로 진행되는 게 긍정적일 거라는 결정에 따라 만남의 내용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현 직장을 포함해서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소아마비라고 알고 있다 했다. 하지만 그의 장애증상은 ‘골형성부전증’이란다. 짧게 설명한다면, 선천적으로 뼈가 쉽게 부러지고 매 순간마다 반복적인 증상으로 고통을 받는 질환 중 하나이다. 상대적으로 자신은 경증(輕症)에 속하기에 다른 이들이 소아마비라고 알며 지내지만, 지금까지의 삶은 골형성부전증의 증상을 그대로 이어온 셈이라고 했다. 그 증상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는데, 자신은 손과 다리에 집중적으로 나타났고 그나마 경증이라는 데 안도한다는 의견이 이어졌다.

  “태어났는데 아기 기저귀를 갈려고 다리를 들면 애가 울고, 다시 내려놓으면 괜찮고… 그랬대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태어날 때도 몇 군데가 부러져서 태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괜찮다 싶다가도 혼자 기어가다 뭔가를 잡고 일어서면서 넘어지면 또 다치고, 그런 과정이 항상 반복됐었답니다.”

  골형성부전증은 성장기가 끝나면 사라지는 증상 중 하나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언제 마지막으로 부상을 당했었는지를 물었다. 의외로 몇 년 전의 일을 꺼내들었다. 휠체어를 타고 가다가 심하게 넘어져서 팔이 부러졌고, 그 부상 치료를 위해 수술을 한 뒤 깁스의 생활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건 성인이 된 뒤 입게 된 외상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게 아니냐며 되물었더니, 남들은 다치지 않을 정도였는데도 자신의 뼈는 부러졌고,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항상 조심하며 지내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답이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이 남들과(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느낌은 언제 처음 떠올랐을까? 그런 생각은 별로 안 했다고 한다. 그냥 또래들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부모님 역시 아이가 주눅 들지 않도록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서로 어울릴 만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다.

  “여섯 살 때인가? 처음 수술을 받으러 갔어요. 다리가 자꾸 휘어지니까 그걸 펴는 수술을 하러 간 건데, 그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네요. 사실은 그런 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아, 내 몸이 아픈가 보다.’ 팔과 다리를 제외하곤 뼈를 다치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게 저의 생활인가 보다 했던 것이겠죠.”

 

  꿈을 간직하다, 꿈을 버리다

  지금이야 장애우들의 ‘권익’ ‘인권’ 등의 가치가 보편화되어 있다지만, 오래 전 당시의 그에겐 장애로 인한 불편함과 편견 같은 시달림은 없었을까? 어렸던 당시엔 물론 자신을 놀리던 동네 아이들 따위가 존재했지만, 학교생활 자체는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만족스러웠다고? 어떻게?

  “제 성격이 내성적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든 주도적으로 하려는 그런 성향이 있었어요. 그런 건 아무래도 본인이 하기 나름이겠죠. 신체적 장애가 있다고 해서 괜히 내성적으로 약하게 보이면, 사람의 일이라는 게 솔직히 말해서 약하게 보이는 사람한테는 깔보고 공격하려는 심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친구들을 가르쳐 주려 했고, 그러면 친구들은 ‘저 친구한테는 뭔가를 배울 게 있잖아.’ 하며 다가오는 관계가 늘 성립이 됐어요. 더욱이 부모님은 저의 그런 마음을 도와주셨는데, 저의 집으로 친구들을 자주 오게 하시며 항상 초대를 하셨어요.”

  부모님이 정말 열린 마음으로 잘해 주신 것 같다고 하니까, 박태완 씨는 자기 스스로 판단해도 상당히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행운인 것 같다는 대답을 이었다. 사실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장애를 가진 부모님의 경우 부모 당사자 먼저 한숨을 내쉬고 어두운 표정을 거두지 못하는 게 대부분인데, 부모 입장에서 앞장서며 자식을 위한 마음의 문을 열고 지내셨다는 건 일면 획기적인 반전이 아닐까 싶어진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직접 업어서, 고학년이 됐을 때는 휠체어로 등하교를 전담하며 맡아주셨던 부모님 덕분에 교우관계 또한 편안했다고 기억된다 하니, 그의 어린 시절은 ‘술술 풀리는’ 무언가의 힘이 곁에 존재했음은 틀림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소년 박태완은 자신의 미래를, 그 어린 마음으론 어떻게 수놓고 있었을까?

  “어린 마음에는 사실 소아과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병원에 자주 가다 보니까, 소아과의사라는 직업이 굉장히 좋게 보였거든요. 보다 더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소아과의사는 꼭 일어나서 뭘 안 해도 되더라 - 하는 결론이 그 어린 마음에 내려졌던 거예요. 저의 증상과 적당한 타협을 하려고 했던 셈이 되겠죠. 심지어는 우스갯소리로 ‘부인이 간호사라면 더욱 좋고’ 하는 마음도 당시엔 가지고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는 그런 마음이 강했고, 중고교생이 되면서 소아과의사가 아닌 한의사라는 꿈을 본격적으로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사춘기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부모님이라는 든든한 우산이 펼쳐져 있다 해도, 아무리 교우관계가 좋았다고 기억된다 해도, 사춘기라는 것은 주변 환경에서 오는 게 아닌 자기 자신의 심장과 영혼 속으로 스며들며 흔들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적인 질풍노도의 갈등 속에 나름 극심한 무언가를 앓고 있었을 텐데, 그의 경우는 어땠을까? 힘든 방황과 갈등 등등의 사연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의 입에서는 정반대의 의미가 쏟아져 나왔다. 

  “그때 생각을 한다면…, 그때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혼자 나름 훌륭한 사람이 돼야 되겠다는 거….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어릴 때부터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두운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을 보려 애를 썼다는 건데, 중학교 말인지 고교 초인지는 그 시기를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를 거치면서 스스로의 신체에 대해서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게 늦은 건지 빠른 건지 그 판단도 지금은 잘 서지 않지만, 당시의 저는 저의 몸을 보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참 한계가 많구나.’ ‘늘 꿈이었던 소아과의사도 사실은 못하겠구나.’ 하는, 그러니까 나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 그런 삶을 살겠구나 하며 정말 심한 좌절감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사춘기였던 것 같아요. 정말 우울하게 보냈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우애곡절의 연속, 그래도 지금껏 고마운 이들

   
 
  고교 시절 당시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건 바로 ‘허준 열풍’이라는 것이었는데, 한방의학을 전면에 내세웠던 방송드라마의 주인공 허준이 그의 정신적 멘토로 자리 잡았다는 고백이 뒤를 이었다. 그러면서 새로운 목표가 생겼단다. ‘내 몸하고 타협할 수 있는 건 한의사이다. 나는 한의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고교 3년 내내 한의사의 꿈을 품으며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는데, 이 대목에선 만남의 시간에도 그에게 물었던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고교에서 대학진학을 담당하는 선생이라면 당연히 (당시의) 한의대 진학 기준 정도는 알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가 고3이 될 때까지 아무런 조언을 건넨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걸까?

  “제가 한의사가 되겠다는 걸 마음으로 응원하시던 부모님이, 저 모르게 3학년 1학기 때 각 대학마다 방문하며 지원자격조건 같은 걸 알아보셨던 모양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실험실습이 많은 한의대 역시, 의대와 마찬가지로 장애를 가진 이들한테는 그 문호가 개방되지 않았다는 걸 직접 확인하시게 된 것이죠. 그런데도 제가 충격을 받을까 봐 차마 말씀을 못하셨고, 3학년 2학기가 돼서야 그 사실을 저한테 얘기하셨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학 전공이 바뀌게 됐던 거죠.”

  대학에 원서지원을 했는데, 난데없이 교수들의 면접 일정이 잡혔단다. 단적으로 말해서 장애를 가진 학생이 지원했으니까, 그 학생의 사정을 파악하든 진학을 말리든 결정하려는 편법의 면접이 그에게만 진행됐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는 장애를 이유로 입학거부가 빈번하게 저질러지던 시절 아니었던가. 그런 우애곡절 끝에 입학을 했지만, 편의시설 하나 없는 그의 캠퍼스 생활이 순탄할 리는 없었다. 

  강의실은 오래된 낡은 건물의 5층. 건물 입구에 차를 세워놓고 차 트렁크에서 휠체어를 꺼내줄 사람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를 이동시켜 줄 4명의 동료가 모일 때까지 다시 또 기다려야 나날은 대학 생활 내내 계속됐단다. 지금처럼 혼자의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가벼운 재질의 휠체어가 아닌, 완전 철제로 된 병원용 휠체어였던 시절이다. 그 무게만 20kg였다는데…, 그래도 강의실까지의 이동을 항상 도와준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껏 그 고마움은 잊을 길이 없다고 한다.

  “정말 진짜로 같은 학과 친구들이 정말 고마웠어요. 진짜 고마운 친구들인데…, 제가 졸업 후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니까 정말 더 미안해지더라고요. 대학원은 건물 4층이었는데… 뭐, 미안하기는 해도 뭐…, 하하하!”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산다는 것

  그렇게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사회로 나와 취업과 고시준비의 복잡한 과정을 겪었다는 건 앞에서 이미 그에게 들었던 바 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떤 생각으로, 어떤 정신으로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공무원 생활 10년차를 보내고 있는 입장에서, 다른 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박태완 씨의 현재 위치에선 우리가 그동안 듣지 못한 새로운 조언이 등장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단순하게 풀이한다면, 우리 곁에는 컴퓨터에 정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장애우들이 존재하지 않은가. 국가고시에 대한 열망을 품은 이들도 여럿 있을 테고, 공무원의 삶을 목표로 삼은 이들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공학을 대학원까지 전공했고, 국가기술고시에 합격했으며, 행정부의 서기관 직위까지 오른 그에게는 뭔가 다른 의미가 전달될 게 확실했다. 그래서 물었다. 현재까지 오게 된 길을 평가하며, 독자 여러분께 자신의 생각을 말해달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자신은 그럴 자격이 안 된다며 한참 손사래를 쳤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함께걸음>은 아니지 않은가. 밀고 당기는 실랑이(?)가 잠시간 진행됐고, 결과는 <함께걸음>의 승리(?)였다.

  “사실… ‘무조건 꿈을 가지세요. 그러면 다 될 겁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살아왔던 걸 되돌아보면 약간의 타협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무모하게 무조건 해야 한다는 그런 건 아니고, 너무 허황된 생각보다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자기의 목표로 가져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은 안 되지만…, 예전에 비한다면 전체적으로 좀 나약해지는 뭔가가 있는 것 같거든요.”

  극히 민감한 내용일 수 있겠지만, 자신은 정말 이렇게 생각한다며 박태완 씨는 마음속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은 장애인특례입학과 장애인별도채용 등의 방식을 솔직히 반대한단다. 물론 시험을 볼 때는, 예를 들어 시각장애우한테는 점자시험지를 제공하고 시험 진행에 도움을 줄 사람을 곁에 배치하는 등의 편의는 반드시 제공해야 하지만, 시험 방식 이외에 ‘특례’나 ‘별도’의 형식이 존재하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거기에 젖게 된다는 것이다. 그걸 당연한 걸로 생각하게 된다는 건데, 진짜 중요한 건 입사든 취업이든 그 다음 단계의 세상은 비장애와 모든 걸 경쟁해야 하는 상황만 존재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단다. ‘장애가 있으니까 좀 봐주는 거 없나?’ 이런 마인드를 가진 이들을 주변에서도 종종 접하게 되는데, 진짜 자기 실력을 갖춰야 하고 그런 실력을 갖췄다고 할 때까지 정말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그는 몇 차례나 강조했다.

  “그것이 바로 나중까지 실속이 있는 겁니다. 그게 자기 실력이고요. ‘무슨 배려는 없나?’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들도 그런 편견을 가지며 장애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는 장애인특별채용을 목표로 공부할 거야!’ 이렇게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특별채용이 없다는 각오로 공부를 해야 하고, 그런 각오로 도전을 해야 입사 후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됩니다. 상사나 상관이 일을 시켜보면 단번에 표가 나며 파악이 되거든요. 일을 시켰을 때 최선의 노력으로 다하는 사람, ‘무슨 배려 없어요?’ 이렇게 단서를 먼저 다는 사람은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분들이 스스로 선입견을 먼저 만드는 경우도 많이 있어요. 일 처리의 능력을 보면서 ‘너는 특별채용으로 들어왔지?’ 하게 되죠. 좋다는 대학에서도 마찬가지 편견이 만들어지는 예가 많습니다. ‘너는 특별전형으로 들어왔지?’ 실제로 그런 시선들이 적지 않게 있어요. 그렇기에 ‘특별’에 너무 비중을 두다 보면, 그 자체가 나중에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세상은 모든 게 냉정한 경쟁이기 때문이죠.”

  박태완 씨는 자신이 너무 강한 의견을 내놓은 게 아닌지 걱정된다며 내용을 순화시켜 다시 설명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먼저 한 의견이 훨씬 낫고 직접적으로 와 닿는 내용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래서 ‘강하다’고 했던 그 의견을 이 지면에 옮기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는 자신이 공무원이기에 공무원의 경우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는데,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장애 하나만 이유 삼아 차별하는 예는 없단다. 모든 건 업무능력이고 실력으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인데, 편의시설에 대한 요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업무 자체의 배려나 ‘특별’을 기대하는 건 무모한 일이 될 것임은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의견에 힘이 느껴졌던 건 그 자신이 그걸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벽을 깨는 삶을 직접 살아왔고, 그 삶의 결과로 지금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좋은 만남과 좋은 말씀을 잘 들었다고 인사를 전한 뒤, 취재를 마치고 청사 건물 옆 조그만 공간으로 나가 이런저런 사담(私談)을 나누었다. 얼마 전 태어난 둘째를 포함해서 두 딸의 아빠인 그의 계획을 물었다. 현재의 업무에 만족하고 있기에,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단다. 

  뚜렷한 목표가 있는 인생은 늘 아름다운 법. 그래서 이왕 열심히 하는 걸 더 열심히 해서 장관까지 올라야 하지 않겠냐고 물으니까, 한참 손을 내저으며 그건 아니란다. 미래는 어떻게든 변화할 수 있기에,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할 거란다. 몇 년 후 <함께걸음>이 그를 다시 찾아갈 일이 생겼을 때, 그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미리 해답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의 오늘과 내일에 응원의 손짓을 함께 보내고 싶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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