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와 의사소통
본문
나는 당신이 보내온 단어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져요
손가락에서 자라나는 쉼표와 마침표
그리고 세로로 내려온 구부러진 획에까지도
아침의 공기를 담아 주었습니다
겁 많던 나의 글자가
당신의 단어와 만나
작은 오솔길을 만들었지요
당신 눈동자에 들어 있는 내가
내 마음에 들 때까지
나의 시선을 당신이 사랑할 때까지
당신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깍지 낀 서로의 손안에 담은 채
설명하며 살아가요
나,
오늘도 여전히
당신을 향해 가는 길 위에 서 있네요.
졸시, “당신과 함께 살아가는 법” 전문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 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용어의 연원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논문이라는 사람도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 대한예방의학회 코로나19 대책위원장인 김모란 교수가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을 제안하면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보가더스(Bogardus)가 사용한 ‘사회적 거리’라는 단어는 자국민의 이민자 집단에 대한 심리적 척도와 함께 사용된 개념이다. 그러고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는 얘기는 질병의 예방을 위한 범주에서 보면 ‘공간적 거리두기’가 표면적인 뜻인 것 같다. 이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나 모임 참가 자제, 외출 자제, 재택근무 확대가 이에 해당한다(네이버 시사상식사전).
실제적으로 만나서 대화하기 힘든 시기가 계속되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대면 의사소통이 아니라 전화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여전히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청각장애인과는 문자로, 시각장애를 지닌 사람들과는 구어로 비대면 의사소통하고 있으니, 비의도적이지만 배리어프리(Barrier free)의 광장에 서 있는 시간을 맞이한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나 자신을 깊이 바라보는 나와의 의사소통 시간이 길어진 것도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시는 2015년 백산문화사를 통해 출간한 나의 첫 시집 <나와 악수하기>에 수록된 시이다. 시집 서문에는 “존재의 집, 그 문을 열며”라는 제목을 달았다. 첫 문장은 이러하다. “오스트리아의 이반 일리히(Ivan Illich, 1826-2002)는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세 가지로 시와 자전거, 도서관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문장에 나온 이반 일리히는 우정과 환대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뒤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교육, 의료, 고통, 언어, 빈곤의 문제에 대해 근대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평화의 근원적 의미와 공생공락의 공동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시, 자전거, 도서관을 이미지로 떠올려 보니 정말 머릿속의 속도가 반은 늦추어질 정도로 평화롭다.
시는 마음속의 노래이다. 그런데 스스로 말하거나 쓴 글을 ‘시’라고 생각하면서 듣거나 읽으면 난데없이 낯선 ‘나’가 등장한다. 원래의 ‘나’와, 거리를 둔 새로운 ‘나’를 만들어 놓고 바라보는 일은 참 흥미롭다. 또한 그렇게 거리를 두고 만든 언어 안에서는 사물 또한 낯설다. 등장하는 사물이나 사람들은 이전에 생각하고 이미지로 저장되었던 그 대상물이 아니다. 내 소유물, 나와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닌 또 다른 객체로 존재하게 된다. 이는 언어가 참조물을 설명해 주는 상징으로서 역할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만들어낸 단어들이 세상에 대한 경계를 늦추고 불안을 상쇄시켜주면서 나 자신과 소통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시를 읽으면서 배경음악을 떠올리게도 되는데, 이는 인간이 지닌 읽기처리과정에서의 복잡하고 미묘한 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긴 독백의 밤을 보냈을 사람에게도, 가까이 또는 멀리서 가져온 이야기들로 마음을 나누었을 사람에게도 시 읽기는 사랑으로 마음을 채워 준다. 시의 느린 속도는 아픈 사람 곁에서 눈동자를 바라보며 시간을 세었을 사람, 이제 막 나지막한 소리로 노래 부르며 새 길을 시작했을 사람, 길을 가다 말고 나무 등걸에 앉아 한숨 쉬는 사람들을 현실 저편 상상의 흐름으로 이끈다. 또한 많은 소망들 가운데 계획들로 채워질 새 수첩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스스로의 호흡과는 상관없이 평화를 선사한다.
무엇인가 결정해야 하고 어딘가로 계속 기어 올라가야 하며, 무엇인가를 위해 끊임없이 매달려 있는 눈물 같은 우리 영혼을 위해 시는 필요하다. 피에르 상소는 말한다. 관념들이나 함의된 전제들은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 것이므로, 그런 것보다는 비록 실패하게 되더라도 이런 저런 사물과 동등한 게임을 하는 동기를 갖는 것, 사물들에 색채와 감동적인 전율을 되돌려 줄 용기를 갖는 편이 낫다고. 그러니 아름다움이 내게로 달려올 때 맞이하는 용기를 가져보기로 한다.
사실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때, 마음의 극단에까지 내려가 말을 해도 진실이 포함되지 않은 것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사랑을 가득 가지고 살아가는 것, 다른 사람의 눈동자를 깊이 바라다보는 것, 천천히 함께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많은 말보다는 소통에 가까이 가는 길일 것이다. 온갖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과 사물에 대해 노래하거나 그 노래를 듣는 것으로 함께 행복해지려는 행위, 이것이 바로 시 쓰기나 시 읽기이며 의사소통의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오히려 문학에서 말하는 ‘낯설게 바라보기’로 전환하고, 나와의 의사소통을 하는 기회로 삼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 앎의 욕구로 가득한 삶, 그 가운데 늘 함께하는 존재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낯설게 바라보며, 온통 뒤덮여 버릴 것 같은 엄청난 규모의 절대적 나머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도종환 시인의 말대로,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우고 젖은 삶으로 흔들려야겠다. 그리고 흔들리는 시간으로의 여행길에 행복해할 것이다. 훗날 몽상 같은 건 가지치기해야 할 것 같은 바쁜 날에도, 일을 잠시 미루어 두고 내가 살아왔던 그 젖은 시간들을 바라다보며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일 또한 해봄직할 것이리니.
헤매는 시간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깊은 내면으로의 여행이 시와 만나 찬란한 나를 이루었음을 축하해야 할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떠 신이 계획한 우주의 일부로 스스로를 끼워 넣으면서,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시간에 감사해 할 것이다. 낮 동안 만나는 모든 사건, 사람, 발길에 닿는 흙, 잠시 바라보는 하늘과 나무들이곁에 흐르고 있음을 느끼는 일, 이는 시의 느린 박자들과 잘 어우러진다. 또한 해가 질 때 그림자 속에 일상의 슬픔과 우울을 잠재우고 마음을 정련하면서, 오늘의 혼돈과 마주하며 기억 서랍의 깊숙한 곳에 장기기억화 될 침잠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도 시의 힘일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말한다. 진짜 똑똑한 뇌는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뇌이며, 또 만약 갖고 있지 못해 불만족스럽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뇌라고. 그러니 살아간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로 나아갈지에 대한 질문은 과학자에게 할 것이 아니라, 혼자 조용히 밤하늘의 별과 대화하면서 스스로 찾으라고 말이다. 누구라도 자연과 교류하며 사색하고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이는 내 마음속에 흐르는 음악, 시와 만나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언어를 혼자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언어의 기능은 사회적 소통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담았던 다른 사람의 시나, 내 마음에 담겨진 시의 언어를 통해서는 독백이라도 소통이 가능하다. 시선을 이동시키고 나를 객체화시키는 순간 새로운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 그러니까 당신 눈동자에 들어 있는 내가 내 마음에 들 때까지, 나의 시선을 당신이 사랑할때까지, 당신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깍지 낀 서로의 손 안에 담은 채 설명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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