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하게 살아갑니다
본문
오늘 이야기는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명제로 출발합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을 물질(신체)과 이원화시켰습니다. 신이라는 무한실체 앞에 유한실체인 정신과 신체를 이원론의 입장으로 펼쳐놓은 것이지요. 물론 인간 존재의 절대적인 힘으로 정신의 순수 기능을 지킴으로써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대명제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많은 영역에서 대립하는 두 가지 가치체계의 충돌을 만들어 왔습니다. 선과 악의 대립이나 신과 자연의 대립은 대표적인 이원론의 결과들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완전성을 추구해가는 과정은 늘 불완전성이라는 대립 개념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유럽의 역사에 ‘마스터’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마에스트로, 구루, 이제는 멘토라고 불리는 여러 용어는 인간 불완전성을 교정해주는 직업 기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에는 ‘스승’ 혹은 ‘공자’로 구분되는 ‘선생’이 있겠지요.
작가주의 반열에 오른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마스터(The Master, 2012, 미국)’로 들어가 봅니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와 정신증으로 고통받는 어머니를 떠나 혼자 살아가는 프레디(호아킨 피닉스 분)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화두는 늘 그를 괴롭힙니다. 몰래 술을 만들어 먹고 모래로 만든 여인상에 집착하는 그의 영혼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50년대 미국의 행복한 가정을 촬영하는 사진기사로 일하기도 하고 농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보기도 하지만, 충동적이고 불안정한 그는 사소한 시비나 사고를 일으키며 늘 도망 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프레디에게 우연히 나타난 마스터 랭카스터 도드(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가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프레디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자신이 속한 무리에 그를 참석시킵니다. 프레디는 처음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어갑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완전해 보이지만 마스터 또한 완전성에 대한 집착으로 위장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그런 면에서 이원론이 아닌 일원적 상호보완 관계로 보입니다. 프레디의 외현적 폭력은 마스터 내면의 분노덩어리를 지켜줍니다. 그러나 그는 타인들의 조그만 비판에도 견디지 못합니다. 마음을 읽고 전생을 불러온다는 ‘코지 연합’이라는 기이한 모임의 수장인 마스터는 언제 권위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립니다. 사실 그는 젊은 아내로부터 조정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마스터와 그 모임의 실체에 동참할 수 없는 프레디는 멀리 자신의 삶을 따라 다시 떠납니다. 옛 여자 친구를 찾아가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삶의 연속입니다. 영화 속 대사처럼 ‘제대로 살아가는 게’ 힘들 뿐입니다. 마스터 그룹에 다시 초청받지만 그는 다시 배제당하고 혼자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예전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처음으로 여성과 적절한 관계 형성을 할 수 있게 된 날, 프레디는 상대방에게 얘기합니다. 눈을 깜박이지 말고 눈을 보고 이야기하라고. 여전히 살아갈 날이 불안하기는 하지만, 프레디에게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그는 다시 마스터를 찾아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많은 비평가는 1950년대 미국의 정서를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미국의 시대정신을 차례로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의 전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 2007)’와 같은 영화는 1920년대 석유개발에 혈안이 된 서부시대의 무자비한 자본권력형 인간을 그렸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자본주의와 종교가 어떻게 권력을 만들어 왔는가에 대한 미국의 현대 역사를 위악적이고 잔인한 측면에서 바라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러한 역사심리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저는 마스터와 프레디의 이원론 대립 속에 일어나는 인간 마음에 대한 진화로 영화를 해석하고자 합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하얀 물거품을 그리며 부서지는 파도가 보입니다. 마치 인간은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라는 전제가 깔린 듯합니다. 바다라는 자연에 비해 물거품으로 부서지는 파도는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라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지만 저는 반대로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보다 온몸에 휘감기는 파도가 더 실체로 와 닿는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라는 화두를 부여 쥐고 광야를 방황하는 중생들의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까? 무언가를 다 깨닫게 된 순간(소위 마스터가 된 순간) 느껴질 환희나 기쁨보다는 고통 속에서도 진리를 찾아가는 프레디의 모습에서 저는 더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래, 저렇게 우리는 정체성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구나. 잠시 찾았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에 우리가 쉽게 환호할 필요는 없는 거야.’
스스로 위안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적어도 마스터처럼 아는 채, 깨달은 체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으니까요.
영화 속에서 프레디는 두 번의 무한 질주를 합니다. 그러나 모두 방향을 알 수 없는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입니다. 어디론가 숨으려고 하지만 숨을 수가 없는 우리의 존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저는 아는 체하며 살아가지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어른이라고 착각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나이가 든다고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은 시인의 ‘무릎 걷어 올리고’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시구를 읽어봅니다.
겉 늙은이야 가자
겨우 마흔에 에헴 하면 암에나 걸린다
(중략)
가자 모든 책 찢어버리고 가자
거짓과 권위와 책은 모두 하나였다
욕망이 아닌 꿈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죽습니다. 불완전한 그대로 살아가는 마음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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