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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의 전문가는 당사자와 가족일 수 있습니다

영화 〈55 steps〉 (미국, 독일, 덴마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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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동의 없이 투여된 약물치료를 거부하고,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용기 있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조현병을 앓고 있었지만 타자에 대한 공감을 잃지 않았던 여성, 엘레노어 리즈(헬레나 본햄 카터 분)와 그녀를 적극 지지하며 소송을 이끈 콜렉트 휴즈(힐러리 스웽크 분)의 깊은 연대를 다룬 영화, 〈55 steps〉입니다.

리즈는 조현병을 가지고 있었고 심각한 공황발작으로 인해 자의 입원을 하지만, 이 과정에서 평소 복용하던 항정 신병 약물의 2~4배가 넘는 약물이 투여되면서 경련성 발작과 함께 방광염, 신장염이 악화되는 경험을 합니다. 평소 자신의 약물 경험을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휴즈와 함께 환자의 동의를 무시한 세인트 메리병원을 고소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정신질환을 앓는 당사자의 목소리보다는 정신병원의 전문적 지식에 귀를 더 기울입니다. 리즈의 말이 그것을 입증하지요.

“누가 미친 사람 말을 듣겠어. 내가 누군가를 묶고 엉덩이 주사를 놓고 오줌을 싸게 만들었다면, 나는 아마 감방에 갈 거야. 의사들보다 내 몸이 이 약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 내가 틀렸다고? 말해봐. 내가 틀렸는지.”

병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는 의사가 아닌 병을 앓는 당사자와 가족일 수 있습니다. 경험이 인간을 만드는 법이지요. 항소재판에서 약물의 부작용을 생생하게 적어놓은 리즈의 기록은 판결을 뒤집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응급상황을 제외한 일반적인 입원과정에서 치료약물에 대한 작용과 부작용을 알고 있는 당사자가 치료를 거부할 수 있다고(rights to refuse treatment) 판결합니다. 미국 정신 보건의 역사에 새로운 인권의 장이 열린 날입니다. 1987년 12월 22일 〈뉴욕 타임즈〉는 약물의 강제 투여는 의학적 관점만이 아닌 도덕적, 윤리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을 인용했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히 정신장애인의 법정 투쟁만을 담지 않았기에 더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빌리 어거스트 감독의 따뜻한 시선 때문이지요. 미국 원주민의 후손으로 자신이 편견과 소외의 대상이었던 콜렉트는 정신과 간호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인권변호사가 된 후, 리즈 판결에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두 여성의 아름다운 연대는 상호주관성에 기반을 둡니다. 동일한 시선과 상호방향이 카메라에 놓입니다. 영화를 유심히 바라보면, 리즈가 늘 먼저 행동하고 결과적으로 콜렉트가 움직입니다. 재판을 끌어가는 힘도 리즈에서 출발 하지요. 인권센터에 전화를 거는 사람도, 재판을 결정하는 것도 모두 리즈입니다. 영화 속 설정이지만, 콜렉트의 이기적 사랑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하는 것도 리즈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다른 정신장애인들을 돕고, 종교적 신념을 버리지 않으며, 재판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리즈의 열정적 시선을 콜렉트가 받아들이는 과정은 리즈의 추모행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엘레노어와 콜렉트가 처음 법정에 가기 위해 함께 올랐던 계단의 숫자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정신 보건에도 당사자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과 당사자들이 함께 올라가야 할 우리나라 정신장애인들의 계단은 몇 개가 될 것인지요? 이 영화가 한국에도 꼭 개봉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작성자글. 이영문/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이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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