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각장애중심사회를 그대로 드러낸 영화
본문
도시에 있는 모두가 한 순간에 앞을 볼 수 없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될까? 원래 시각장애인이었던 이들은 무슨 역할을 하게 될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시각장애인인 내게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회 구성원이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설정이라니.
‘개인적 문제’의 울타리
신호대기 중이던 한 운전자가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신호는 금세 바뀌고 늘어선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의 차로 다가왔고,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운전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차량으로 이동해 집까지 가게 됐다. 영화에서는 그렇게 한 사람의 실명은 개인적으로 처리됐다. 그러나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그 원인 또한 오리무중. 급기야 정부는 앞을 볼 수 없게 된 ‘감염된 자’로 확인된 이들을 정신병원으로 사용되던 건물에 모두 수용시켰다. 주목할 점은 ‘원인 불명’이었다는 것. 관료들은 그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판단했으며 사회는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재앙과 같은 것으인식했다.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단지 갑자기 앞을 볼 수 없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일방적으로 감금됐다.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는 ‘손상’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런 사람이 늘어나는 ‘속도’가 문제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도시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문제였을까? 아니, 사람들을 가둬야 할 만큼 그것은 정말 ‘문제’였을까?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가운데 전세계 정상들은 이 문제에 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였다. 이들은 앞을 볼 수 없게 된 ‘손상’을 문제로 인식하고 그 원인과 치료법만을 논의했다. 회의 중 참여자 가운데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람이 나타났고, 정상회의는 이내 아수라장이 되며 아무 대책 없이 회의는 끝이 났다. 비행기가 추락하고 도시 곳곳에서 교통사고가 속출한 이후 사람들은 더는 집 밖으로 나서지 않게 됐다.
UN 인권위원회 식량 특별조사관으로 일한 스위스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10세 미만의 아동이 비타민 A 부족으로 3분에 한 명씩 시력을 잃는다고 밝힌다. 이 정도면 영화에서 그려낸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늘어나는 속도만큼이나 빠른 게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는 영화에서처럼 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기아로 인한 비타민 A 결핍이나 원인 불명의 앞을 볼 수 없게 된 일 모두 ‘개인적 문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실명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현실에서는 기아로 인해 깡마른 TV 속 아이들 밑으로 뜨는 후원처로 개인들이 모금할 뿐이다.
존엄을 빼앗은 건 시력 아닌 권력
정부에 의해 갇힌 사람들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규칙만을 반복되는 방송을 듣고, 정해진 시간에 지급되는 음식을 전달 받아 생활했다. 그러던 중 앞을 볼 수 없는 이들 중 한 사람이 제한된 공간을 벗어나 움직이다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단지 눈앞이 하얗게 보이며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됐다는 이유만으로 제한된 구역에 감금되고 이동할 자유를 빼앗긴 이들. 정해진 시간에 일방적으로 전달 받는 음식으로 생을 이어가면서도 순응하며 지내던 그 이들이 총격으로 사망한 누군가를 묻어주기 위해 삽을 요구해 받아들었다.
통제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규칙을 정하고, 방향을 잃고 헤매는 누군가를 총으로 쏘아 죽이며 그렇게 사람들의 존엄을 무너뜨린 건 ‘시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이 선명하게 그 야만성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방아쇠를 당긴 이쪽 편의 누군가도 원인 불명의 앞을 볼 수 없는 증상이 자신에게 나타날까봐 두려워 한다는 사실이다. 총을 들고 가장 가까이에서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들을 지키는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하고 필요한 의약품조차 제공받지 못하는 저 쪽을 목격한 사람.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만으로 눈앞의 누구라도 굴복시킬 수 있는 총과 같은 권력을 어깨에 올려놓은 사람일수록 그 권력이 망가뜨린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할 때 더욱 큰 공포감을 느끼는게 아닐까?
반면 밥이 아닌 삽을 요구하며 자신들과 함께했던 누군가를 위해 땅을 판 이들의 모습 또한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인간은 한 순간 앞을 볼 수 없게 된다고 해도 나를 위한 밥이 아닌 남을 위한 삽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 장면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존엄을 지켜주기 위한 저항은 일상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서로의 존엄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장애인이라고 모두 장애 친화적?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계속 제한구역이 된 병원으로 밀려들었다. 처음 도착한 안과의사 일행이 머무는 병실 외에도 여러 곳에 많은 이들이 나뉘어 수용됐고, 수시로 지급되는 음식 박스를 총을 가진 사람이 있는 3호실에서 일방적으로 가져갔다. 책임자에게 말했으나 ‘음식은 전달했고 분배는 당신들의 책임’이란 답이 돌아왔을 뿐. 3호실에서 생활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원래 시각장애인이었던 이도 섞여 있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는 생활에 익숙한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 총을 가진 사람이 있는 3호실 일원으로서 음식을 독점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대가를 지불 받는데 일조했다.
과연 특정한 신체적 또는 사회적 속성을 공통으로 가졌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될까? 혹은 같은 속성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의 상황과 감정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을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통제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음에도 전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시각장애인은 왜 총을 든 사람 곁에 서는 선택을 했을까? 한 인간은 같은 부위에 같은 정도의 손상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될 만큼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속성을 상황에 따라 선택하며 나머지를 무시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다. 원래 시각장애인이었던 그는 앞을 볼 수 없다는 ‘공통성’을 다른 호실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지만 3호실 구성원으로써의 다른 호실 사람들과 구별되는 정체성 또한 동시에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총을 가진 사람이 있는, 반입되는 음식을 독차지한 3호실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택한 것일 뿐이다. 단지 그 뿐이다.
성별에 따른 위계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보석 등을 대가로 받고 음식을 나눠주던 3호실 남자들이 일주일 쯤 지난 뒤 ‘여성’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의도는 분명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자명했다. 절대로 가지 않겠다는 어느 여성의 목소리에 이어 혼잣말 하듯 남자니까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없다는 어느 남성의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합리적 제안인양 ‘자원자’를 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밥 대신 삽을 요구했던 저항의 목소리는 ‘총’으로 표현된 권력 앞에 비루한 ‘자원봉사’ 타령으로 변했다.
잠시의 침묵 뒤에 한 여성이 자신이 가겠다고 말했고 뒤이어 자기도 가겠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를 포함한 여성들이 3호실로 향하고 윤간 당했다. 그리고 3호실 남자들은 다른 호실의 여성들도 불러 윤간했다. 3호실 남자들의 요구 ‘대상’이 된 이들은 ‘여성’이었고, 1호실의 남자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자원봉사자’를 찾을 뿐 3호실 남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저항의 말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1호실과 3호실 사이를 ‘여성’들이 음식과 함께 오고 갔을 뿐이다, 이처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저항의 목소리가 사라질 때, 성별과 같은 ‘지목된 속성’에 따른 폭력은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확산된다.
비장애 중심 사회를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의사의 아내는 가위를 집어 들고 다른 호실의 여성들이 윤간 당하는 3호실로 향했고, 3호실 리더를 가위로 찔러 살해했다. 살해한 사람을 찾아 3호실에 넘기고 음식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터져나온 가운데, 저항을 택한 1호실 사람들이 3호실로 향하고 3호실에서 불길이 솟았다. 바리케이트로 막힌 3호실 출입문 때문에 3호실 사람들은 사망하고 건물 전체에 불길이 옮겨 붙었다.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온 이들은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다시 나온 세상은 모두가 눈이 먼 상황이었고,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따라 1호실 사람들은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거리 곳곳에는 음식을 찾으려는 무리지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헤매고 있었고 집은 물론 상점에도 사람들이 머물며 음식을 찾고 있었다. 겨우 그녀의 집에 도착한 이들은 안도하며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벗어놓으며, 앞이 보였던 예전의 사회 구성원으로써의 일상을 찾아가고자 했다. 새찬 빗줄기가 쏟아지던 날, 빗물에 모두가 깨끗하게 씻고 맞이한 다음 날, 해가 뜨고 가장 처음 앞을 볼 수 없게 된 남자가 시력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지만, 어쩐지 기뻐해야 할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던 여성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창문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눈이 먼 게 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닌 것처럼 그녀가 눈이 보이는 것 또한 그녀가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보이고 보이지 않고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저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뒤이은 의존과 부담은 비장애 중심적으로 구성된 ‘의도된 사회의 결정’에 따른 결과다. 결과에 따른 부담을 홀로 짊어졌던 그녀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가장 먼저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람이 시력을 되찾는 게 아니라 가장 마지막까지 앞을 볼 수 있었던 그녀가 앞을 볼 수 없게 됐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
영화와 원작 소설은 그런 가정을 그려내진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그녀가 가진 시력을 단지 함께 생활하는 이들을 돕는 데만 쓰다가 앞을 볼 수 없게 돼버렸다면 그 작은 공동체는 끝장날 것이다. 반면, 수용됐던 정신병원에서처럼 필요한 규칙을 정하고 함께 의논하며 서로의 역할을 나누게 됐다면, 즉 모두가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일상을 재구성해 갔다면 그녀가 앞을 볼 수 없게 됐더라도 모두가 절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애인을 가두는 논리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누군가를 가둬야 할 만큼의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건 앞을 볼 수 없게 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비시각장애 중심의 사회’때문이다. 신체적 변화는 마치 나이드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삶’이지만,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경계하고 배제하는 ‘사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다. 단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공통점 하나 때문에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을 위해 원래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던 누군가가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인간은 그렇게 순수한 존재도 단순한 존재도 아니다. 특정한 속성을 공유한다고 해서 다 같을 것이라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당사자’를 강조하는 것에 경계해야 할 이유다. 특정한 속성을 가진 소수자를 향한 혐오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요즘, ‘누군가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밥 대신 삽을 요구했던 목소리가 밥을 위해 ‘누군가는’ 희생될 수 있다고 변하는 순간 모두의 삶이 위태로워진다고 읽히는 영화속 장면을 새삼 주목하게 된다. 장애는, 손상으로 인식되는 한 개인이 지는 어떤 속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속성에 부여된 사회적 해석과 물리적 환경과 제도 등 사회적 차원의 문제다.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딱 한 사람만 제외하고 모든 구성원이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면서 도시가 마비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얼마나 사회가 비 시각장애 중심적으로 구성돼 왔는지 드러낸다. 단지 앞을 볼 수 없게 됐을 뿐인 사람들을 가두고 심지어 죽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소수자를 향한 혐오가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전개가 아닌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라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그녀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어떻게 시력을 써야 할까? 유일하게 눈이 보이는 ‘소수자’가 절망하지 않도록 앞을 볼 수 없는 ‘다수’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개인적 비극’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앞을 볼 수 없게 된 변화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마주한 상황으로 그려낸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고민하게 된 생각은 여기까지 담는다. 질병 등 어떤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존엄을 잃어도 되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고, 내일 당장 신체적 손상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배제되지 않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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