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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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툰 <복학왕> 의 청각장애인 묘사 장면(좌). 논란이 되자 그림과 대사를 수정했다(우). |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자신'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던 적이 있다. 장애로 힘들었던 점을 표현할 생각이었으나, 선생님은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어떨까? 오히려 장애로 인해 좋았던 점이라든가”라고 했다. 당시 나는 청각장애 때문에 듣기 시험은 항상 0점에다, 수업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노트를 빌려 필기하느라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좋은 점을 쓰라고? 저 선생 왜 이래?’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한동안 선생님에 대한 떨떠름함과 반발심만 가득했는데, 문득 ‘기분 좋은 침묵’이 떠올랐다. 시끄러운 공사장 소음,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소음을 듣기 싫어 보청기를 끄면 침묵만이 깔린다. 나는 그 침묵이 매우 좋았다. 이렇게 생각난 좋은 점을 작품으로 만들었더니 선생님은 씩 웃었다. "여기 학생들은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해. 장애를 갖고 있으면 힘들고 불쌍하고 무능할 거라 착각하지. 장애인도 좋은 삶을 살거나 행복하게 살 수 있거든. 그런 긍정적인 이야기는 모르는 것 같아서 일부러 써보라고 했어." 이렇게 적힌 글을 보고서야 선생님의 의도가 이해되고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왜 장애인을 안 좋게 표현하는 미디어가 많은 걸까?
최근 장애인을 다룬 미디어가 많아졌다. 그중에서도 청각장애인을 다룬 드라마, 영화, 웹툰 등은 나오자마자 청각장애인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과연 모든 청각장애인이 청각장애인을 다룬 작품을 반길까? 아니다. 청각장애인이 어떻게 다뤄지느냐에 따라 다르다. 얼마 전 문제가 된 웹툰 <복학왕>에서 묘사한 청각장애인은 매우 기괴하게 느껴졌다.
소리 내 중얼거리는 것도 아니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말 칸에 맞춤법이 엉망진창인 문장이 나열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청각장애인이 말할 때 청인(청각장애가 없는 사람)보다 어눌하다 해도, 생각마저 어눌하진 않다. 발음도 정확하게 해서 알아듣기 쉬운 청각장애인, 능숙하게 글을 쓰는 청각장애인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청각장애인을 모욕한 표현에 기가 막혔다. 작가 기안84는 논란이 일자 사과문을 올렸으나, 사과는 청각장애인을 향해 있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을 읽는, 아마도 대다수가 비장애인일 '독자'에게만 미안하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자 이마저도 삭제해버렸다. 작가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청각장애인을 그렇게 그렸다고 했다. 창작자라면 적어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대상을 사전에 철저히 조사하고 심도 있는 고민을 거쳐야 하건만, 기안84는 그저 재미를 위해, '대충' '가볍게' 그린 듯했다.
유명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는 그의 웹툰은 수천, 수만 명이 볼 수 있다. 그 많은 독자가 웹툰을 보고 청각장애인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갖고 함부로 일반화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숨에 장애 혐오이자 차별로 이어진다. 장애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많은 청각장애인이 "청각장애인은 말을 못하고 못 들어. 바보라서 안 돼"라는 이유로 채용을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 그저 기안84 작가만을 비난하며 끝낼 수도 있지만 그가 청각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마치 거울처럼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디어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잘 모르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접하기 힘들지만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소수자의 정보를 조금이나마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청각장애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 <트라이브>는 자막도 해설도 없으며 오로지 수어만 나온다. 내용도 폭력적이고 어두워서 관람객 대다수는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 영화는 청인들에게 ‘봐, 너희들이 겪는 불편함은 그동안 청각장애인들이 자막 없는 영화를 보는 불편함과 같은 거야’라고 말해준다. ‘비장애인을 위한 영화는 차고 넘치는데, 왜 청각장애인을 위한 영화는 거의 없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그와 동시에 일부 농아특수학교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함을 고발한다. ‘불편하다고? 당신은 영화를 볼 때만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청각장애인은 매일 그 불편함을 겪는다’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보여준다.
영화 <원더스트럭>은 원작 소설이 있다. 소설을 쓴 작가는 청각장애인 동생을 위해 청각장애인 주인공 두 명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선천적 청각장애인으로 추정되는 소녀의 모험을 다룬 장면은 무성영화처럼 소리가 없다. 사고로 안 들리게 된 소년의 이야기도 나온다. 소년의 모험에서는 소년이 말을 해서 청각장애인인 줄 몰랐다는 사람이 등장한다. 두 명의 선천적/후천적 청각장애인으로 관객은 청각장애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청각장애인 캐릭터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으며 무능하게 표현되지도 않는다. 수어를 못 배우게 하는 아버지를 참다못하고 가출해 어머니를 찾아가는 소녀 로즈, 어머니 유품을 통해 아버지를 찾으러 먼 길을 떠난 소년 벤. 로즈는 배를 타고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벤은 버스를 타고 미네소타에서 뉴욕으로 먼 길을 혼자서 떠난다. 미네소타에서 뉴욕까지의 거리는 약 2179km다. 아마 청각장애인은 혼자서 여행을 못할 거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놀라 까무러질 장면이리라. 로즈와 벤은 기안84 작가의 캐릭터처럼 바보같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캐릭터, 즉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묘사된다. 모험을 기꺼이 해내는 용감함, 당당함, 그리고 아이를 사랑하는 어른들. 덕분에 이 영화가 많은 청각장애인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온다. 해외 사이트엔 영화를 보고 감동 받은 전세계 청각장애인들이 ‘치유 받았다’, ‘용기를 얻었다’라고 남긴 리뷰를 볼 수 있다. 청각장애인이 아닌 사람도 청각장애인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겠다고 반응했다.
미디어는 한 사람의 인생관을 바꿔놓을 수도, 한 사람의 편견을 없앨 수도 있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는 미디어에서 장애인을 포함해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가 어떻게 다뤄지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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