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속도로 갈 수 없대도
본문
희망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주어진 조건으로 차별받지 않는 마을이 있다. 지구 밖에 있는 그 마을은 “얼굴에 흉측한 얼룩을 가지고 태어나도, 질병이 있어도, 팔 하나가 없어도 불행하지 않은 세계”다. 마을 아이들은 행복하지만 자신들이 어떻게 순례를 떠난다. 그때까지 그들은 지구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지구가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한다.
지구에는 인간 배아 디자인 시술로 개조된 ‘신인류’가 있다. 신인류와 기존 인류는 철저히 분리된다. “아름답고 유능하고 질병이 없고 수명이 긴” 이들은 도심에서 살고, 비개조인은 도시 외곽에 살며 “로봇을 고용하는 것보다 사람을 고용하는 값이 싼 일거리”를 얻는다. 지구는 차별이 만연한 세계다.
신인류를 만든 건 “얼굴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흉측한 얼룩을 남기는 유전병”이 있던 엘리트 과학자 출신 바이오해커다. 소설에서는 그가 인간 배아 디자인을 시작한 이유를 “태어나는 아이에게 아름다움을, 아무런 병도 갖지 않고 오직 뛰어난 특성들로만 구성된 삶을 선물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종의 선행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라고 짐작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선행은 차별과 배제를 공고히 했다.
‘인간적’이란 단어를 긍정적으로 써도 되는 걸까. 차별이야말로 진정 인간적 모습 아닐까. 위 소설 속 미래라면 장애가 없어진 세상에서도 인간은 새로운 장애를 만들 것이다.
다른 소설 ‘공생 가설’에서 김초엽 작가는 이타성이 사실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에 기생하는 외계 생명체가 준 속성이라고도 상상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희망은 없다. 희망 없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주로 날거나 심해로 가라앉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우주 정거장에 한 노인이 있다. 그는 태양계가 아닌 다른 행성계로 향하는 표 한 장을 품고 있다. 목적지는 그의 남편과 아들이 먼저 지구에서 이주해 간 행성이다. 그러나 사실 우주 정거장은 폐쇄됐고, 표에 적힌 행선지로 가는 우주선은 더 이상 없으며, 남편과 아들은 죽었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노인은 백일흔 살이다.
그는 가족에게 가는 마지막 우주선을 놓쳤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로 긴 세월을 냉동 상태로 보내며 “일말의 희망”을 기다린다. 폐쇄된 정거장에서 운항이 중지된 우주선을 기다리는 일은 미련해 보인다. “미련하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리는 일뿐이네.” 그가 말한다.
정거장을 철거하려는 직원이 그를 쫓아내자 노인은 “내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어”라고 말하며, 그의 개인 우주선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을 향해 출발한다. 희망이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실패할 줄 알면서 하기다.
우주비행사 최재경은 다른 선택을 한다. 재경은 백인 남성 두 명과 함께 인류 최초의 터널 우주비행사로 선발된다. 대중은 마흔여덟 살 동양인 비혼모인 그가 인류 대표로 뽑혔다는 사실이 부적절해 보인다며 선발 결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항공우주국은 그의 훌륭한 경력과 엄격한 검증 절차를 공개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표준적인 우주비행사의 모습에 재경은 잘 들어맞지 않았다.” 대중의 눈초리는 변하지 않았다.
터널의 중력가속도와 압력을 버틸 수 있게 신체를 개조하고 훈련받은 최재경은 우주로 가는 대신 심해로 간다. 발사 전날 도망친 그를 비난하며 언론은 “안정적인 배경과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적절히 선발하여 배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거듭 말했고,” “재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사람들은 재경을 닮은 다른 약한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재경과 같은 과정을 거쳐 우주인이 된 가윤은 “진짜 이 악물고 했었지. 더 잘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렇게 해도 듣는 말은 결국 같은 거야”라고 말한다. “우주에 가지 않는 것이 해방”이었을지 모른다며, 재경이 “어쩌면 그 굴레 자체를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을 시도해봤는지도 몰라”라고 가윤은 짐작한다. 희망이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벗어나기다.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사이보그 재경은 심해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인간과 살아야 한다. 처음 언급했던 소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로 돌아가 보자. 지구 순례를 마친 아이들은 차별 없는 마을로 돌아갈 수 있다. 마을에서는 “서로의 결점들을 신경 쓰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외면해온 것들을 봤다. 근원을 모르는 행복 바깥이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알았다. 그래서 절반 이상이 차별 가득한 지구에 남는다.
많은 비장애인은 장애인의 삶이 어떤지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다. 자연스런 일상 안에 얼마나 많은 불편과 차별이 있는지 모른다. 비장애인 세계에 장애인은 없다. 그러나 장애인은 세상에 있다. 순례를 떠난 아이들처럼 장애인을 포함한 소수자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수 있다고 소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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