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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큼 해야 한다는 잣대

오사카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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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뭐 해 먹나? 집밥 해 먹는 사람들이 끼니마다 하는 고민이지요. 네 식구가 사는 집이지만 두 아이도 이제는 스물이 넘어 제 각각 일들이 바쁜지 한상에서 밥을 먹는 일도 부쩍 줄었어요. 하지만 집에 오면 먹을 밥은 있어야 할 것 같아 가스불 앞에서 밥을 짓는 것이 중요한 일과예요. 냉장고에 있는 걸 한 냄비에 넣어 조리거나 볶는 게 고작이지만요.

그 날은 아직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었는데 큰 아들이 돌아오더라고요. 빨리 먹고 싶으니까 간단한 거면 된다고 하기에 냉장고에서 소세지를 꺼냈어요. 그리고 한손으로 들 수 있는 손잡이가 달린 작은 냄비에 물을 끓여 2,3분 데친 후 끓인 물을 따라 버리려고 하는데, 싱크대로 옮기려는 순간 한 손에는 지팡이, 한 손에는 펄펄 끓은 물이 담긴 냄비를 든 몸의 균형을 잃어 넘어지고 말았어요. 냄비의 뜨거운 물은 허벅지로…, “앗, 뜨거!” 빨리 찬물, 찬물! 빨리 욕실로! 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생각만큼 빨리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아요. “엄마, 괜찮아요?” 아들이 달려오고, 욕실로 가 다리를 찬물로 식히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어요. 치료 순서야 상처 소독하고 화상 연고 바르고 붕대로 감는 게 다지만, 그리 가벼운 화상이 아니라서 꽤 오랫동안 치료를 받으러 다녀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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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리 중 뜨거운 물에 데인 게 처음은 아니에요. 주부 경력 22년, 좀 시간이 걸리는 조리도 그런데로 해내는 편인데 그래도 할 때마다 조심 또 조심, 방심은 금물이네요. 병원에 다녀보면 진찰이나 치료받는 시간보다 접수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몇 배나 더 길잖아요? 기다리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이들 낳고 키우며 저는 장애인 엄마가 아니라 보통 엄마처럼 보이고 싶었고, 엄마는 힘들다, 엄마는 남만큼 해 줄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애썼어요. 물론 그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장애가 없는 엄마들과는 다르다는 현실이 너무나도 엄연하게 느껴질 테고, 청소 등 힘쓰는 가사 일은 활동지원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니까 가능했지만요. 라면이나 간단한 거 끓여 먹는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하고 남을 텐데도 제 딴에는 식사 준비나, 과자 정도는 제가 직접 챙겨 주며 엄마 노릇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 날도 “소세지는 네가 데쳐서 차려 먹어라” 하면 됐는데, 챙겨주지 않아도 알아서 사 먹고, 해 먹을 수 있는 나이, 그 정도로 엄마 자리 알아 달라는 건 약발이 떨어진 이야기인 말이에요.

장애란 불편함은 물론이며 일상의 리스크도 몇 배나 더 크게 각오해야 한다는 익숙한 진실. 하지만 가족을 비롯하여 그 누구에게도 당당하게 도움을 청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에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떳떳할 것 같은 자격지심 비슷한 걸 느끼는 건 저만일까요? 장애인의 장애에 의한 생활의 불편함, 사회 참가에 대한 장벽을 허물기 위한 제도가 하루 빨리 자리 잡는 것이야말로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미안한 일이며, 남만큼 하지 못하는 것은 뒤떨어진다는 선입관에 사로잡힌 개인 의식의 벽을 허무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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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일, 지난 7월 국회의원에 당선된 ALS 중증장애인인 후나고 야스히코(舩後靖彦) 씨 가 참의원 문교과학위원회에서 첫 질의를 했다는 뉴스를 봤어요. 대형 휠체어에 탄 후나고 씨가 질의에 앞서 입에 넣은 튜브를 씹는 방식으로 컴퓨터를 조작해 미리 준비한 글을 음성으로 전환시켰어요. 먼저 “국회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를 이용하거나 비서가 대독하는 질문 방식을 배려해 주어 감사하다”는 인삿말을 전했고, 이어서 문자판을 통해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한 글자 한 글자씩 완성한 질문을 비서가 대독했습니다. 장애가 있건 없건 관계없이 아이들이 더불어 공부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조성해 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었다고 해요.

질의를 마친 후 후나고 씨는 기자들 앞에서 “질문시간을 초과하여 회의 진행에 부담을 끼친 점을 개선하겠다”고 하며, “흐르는 물의 흐름을 바꿔 새로운 바다로 향하는 벗들과 함께”라는 일본식 시로 심경을 표현했다고 하네요.

중증장애인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위해 국회에서는 활동지원사의 국회 출입 허용, 컴퓨터 소지 인정, 법안의 찬반에 대한 표시를 활동지원사가 대신 표명하거나 질문을 비서가 대독하는 대응안을 도입했고, 재질문할 때 의원과 비서가 조정하는 시간을 확보하도록 위원장이 진행을 중단시키는 운용방식을 취했어요. 그래서 기존 배정됐던 시간은 25분이었지만, 실제로는 배에 가까운 45분간 진행됐다고 하네요.

그 여분의 기다림이 아직은 서툴겠지만, 서로의 부족함과 어려움을 서로가 채워주고 다독여주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마땅한 기다림이라는 가치의 전환으로 조금씩 인식이 넓혀져 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남만큼 해야 한다는 시간적, 생산적 잣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게 상식이 되기를요.

작성자변미양/오사카 거주, 지체장애인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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