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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도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맨 오브 마스크(Au revoir la-hau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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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지난 3월부터 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지만 한국전쟁 이후 종전협정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담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입니다. 여전히 평화를 반대하는 세력도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 대다수는 평화를 지지합니다. 지난 70년의 세월은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냉전세력, 반공정치, 분단정치 주동자들과 손잡고 현대 역사를 왜곡하고 국민들을 억압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회주의자들의 득세는 우리나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소개할 프랑스 영화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전쟁광인 가해자가 성공하고 피해자가 숨어 지내는 아이러니가 파리에서도 재현됩니다. 1차 대전 이후 세 남자의 삶을 추적하는 슬프면서도 유쾌하고 기괴하면서도 긴 여운이 남는 영화, ‘맨 오브 마스크(Au revoir la-haut, 2018)’를 소개합니다.

1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삶이 있습니다. 화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하는 남자 에두와르가 참호 속에 있습니다. 그는 포화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 알베르가 옆에서 격려의 미소를 보냅니다. 또한 그들을 험하게 바라보는 전쟁광 프라델 중위가 등장합니다. 1917년, 전쟁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감지하고 있는 프랑스 부대에 종전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프라델(로랭 라피테 분) 중위는 가장 어린 병사와 늙은 병사 두 명을 척후병으로 보내고 연이어 두 발의 총성과 함께 두 사람의 생명이 쓰러집니다. 전우의 죽음을 목도한 프랑스 군대는 참호 밖으로 나와 전진합니다.

그러나 사실 척후병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프라델 중위였지요. 전쟁이 끝나기를 원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한국영화 ‘고지전’의 고수의 얼굴과 중첩됩니다. 하늘을 뒤덮는 포탄과 총탄 세례 속에서 진실을 목격한 것은 알베르와 에두와르였습니다. 프라델의 총을 피해 구덩이에 빠진 알베르를 구하려다 에두와르는 턱이 날아가는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됩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흉측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거부하며 죽여달라는 에두와르를 달래며 알베르는 사망자 명단을 바꿔치기 합니다. 이제 이 세상에 에두와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에두와르는 화가가 되려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돌아가기가 싫었던 것이지요. 갈 곳이 없는 것은 알베르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약혼자는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갔고, 직장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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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엘리베이터 맨으로 혹은 광고판을 몸에 달고 다니면서도 자신을 돌보는 알베르의 우정 덕분에 에두와르는 서서히 화가로 재탄생합니다.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독특한 마스크를 만들며 살아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전사한 병사들의 추모기념비를 이용해 대국민 사기극을 꾸밉니다. 물론 악인으로 등장하는 프라렐 중위도 전몰용사들의 무덤을 이장시키면서 사기를 칩니다. 1920년 프랑스 사회는 전쟁 이후 삶의 의미를 상실한 목적 없는 인간 행위가 사회 전반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영화의 원작자는 이들을 통해 전쟁이 국민들에 대한 기만행위이며 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모두 사기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은 것이지요.

가면 속의 삶을 살아가는 에두와르는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회복시켜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삶의 마지막 길목에서 만난 아버지의 참회는 그를 깨닫게 합니다. 진실의 순간에 인간은 가장 아름답지만 허무함을 느낍니다. 더 이상 자신의 삶에 빈 곳(space)이 없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장소(place)의 부재를 깨닫게 됩니다. 마치 시공간이 멈추게 되는 현상을 경험합니다. 영화를 통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에두와르가 뻔뻔한 맨 얼굴로 사기 치며 살아가는 인간쓰레기 프라델보다 더 진실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마음 한 편에 에두와르를 용서하고 싶은 장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원작은 ‘오르부아르(Au revoir lahaut)’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See you up there’, ‘저 하늘에서(천국에서) 만나요’라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1차 대전 당시 국가 반역죄로 총살을 당한 장블랑사르라는 군인이 처형 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 문구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프랑스는 1차 대전 당시 명령불복종, 비겁행위 등의 명목으로 2,400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 중 600여 명을 처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요.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에서 병사들을 볼모로 희생시킨 것에 대한 분노와 회의적 시각을 소설 원작에 담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이제는 더 이상 국가주의에 희생되는 어리석음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도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작성자이영문/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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