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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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에는 개별적으로 앓았던 열병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열병’은 비이성적이며,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비생산적인(소위 기성세대들의 입장에서)것들의 총칭입니다.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수만 가지인 반면에, 공부를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지요. 김수영의 시를 외우는 것이 왜 공부에 방해가 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 Queen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퀸이라고 쓰지 않는 것은 Queen을 Queen답게 느끼고 싶던 저의 오래된 열망에 따른 고집입니다. 반면에 비틀즈, 이글스는 Beatles, Eagles로 쓰지 않습니다. 그저 한글표기만으로도 충분했지요.
Queen의 노래 중에 보헤미안 랩소디는 단연코 절정에 있던 음악이었지요. 박정희 정권에서는 당연히(?) 퇴폐가사로 규정하고 금지했지만, 여전히 ‘빽판’(오리지널 판을 불법 복제한 아시아 판 음반)으로 우리는 랩소디를 들었습니다. 학교 앞 작은 중국집 골방을 아지트 삼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된 Queen의 노래를 들으며, 퉁퉁 불어터진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물론 고량주 한 잔도 곁들였지요.
이 글을 쓰면서도 1978년 가을의 어느 날이 어제처럼 다가옵니다. 인간에게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 개념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시간, 나와 너의 사건이 존재했던 시간으로 순수기억에 남습니다. 저에게 Queen은 불어터진 짜장면과 함께 고량주를 기울이던 1978년의 사건으로 남아 있지요. 당시 친구들의 표정과 웃음이 기억되는 이유는 아마도 보상받지 못하는 젊은 날의 유희에 대한 불안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각자도생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Queen에 대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는 싱그럽던 젊은 날을 희미하게 남긴 채, 이제 40년의 시간을 돌고 돌아, 제 앞에 서있습니다.
500만 명의 관객이 입소문에 의해 이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영화는 Queen의 결성부터 1985년 윔블리 에이드 공연까지를 담고 있지요. 프레디 머큐리를 중심으로 그의 부모와 가족, Queen의 오리지널 멤버인 브라이언 메이, 로저 테일러와의 깊은 우정, 그리고 메리와의 사랑, 동성애로 커밍아웃 후에도 친구로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잔잔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가 젊은 세대들에게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 것은 무엇보다 1985년 라이브 공연을 실제 공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영상미에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다른 것에 있습니다. 레미 말렉의 환상적인 연기도 한 몫 하지만, 근원적인 것은 ‘보헤미안 랩소디’의 절대적 음악성에 있습니다.
제목부터 파격적인 이 노래는 프레디 머큐리가 만들고 가사도 붙인 이 시대의 클래식입니다. 이 노래를 작곡할 당시 상황이 영화에는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여전히 가사에 대한 의문은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프레디의 조상이 이란으로부터 피신해 온 조로아스터교인이라는 것과 탄자니아의 섬에서 인도인의 신분으로 태어난 것과 훗날 이름을 버리고 영국인이 된 사실 등을 종합해보면, 정체성의 혼란이 프레디의 성장에 매우 컸을 것으로 상상해봅니다. 프레디는 훗날 의미나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락 음악의 본질을 이해해주기를 원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저는 Queen의 공연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음악만을 들었고, 뮤직 비디오를 접하게 된 것은 1990년이 지나서야 가능했지요. 이번 영화를 통해 알게 된 놀라온 사실 중 하나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1975년 발매될 때 만들어진 비디오가 세계 최초의 뮤직 비디오라는 것입니다. 프레디는 46세에 폐렴으로 일찍 사망하지만, 죽는 날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무대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공포의 장소가 아닌 해탈의 공간이었습니다.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있습니다. “무대에서 나는 외롭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사랑한 것은 음악이 아닌 팬들과의 시간이었다.”
이 세상에는 실재하지 않은 곳이 아니라, 실재하는 곳으로서의 ‘유토피아적 장소들’이 존재합니다. 어린 시절 다락방, 앞서 얘기했던 중국집 골방이 그러합니다. 프레디에게 무대는 바로 힘들 때 자신이 숨는 장소로서 존재했던 것이지요. 누구에게는 열린 공간이 누구에게는 닫힌 밀실로 존재합니다. 최인훈 선생의 ‘광장’에는 대중의 밀실, 개인의 광장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Queen과 프레디에게 무대는 나를 숨길 수 있는 광장으로 작동되었던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곳에 내가 숨는다는 것은 현대 사회의 익명성을 나타내는 방식과 동일합니다. 대중 속에 나를 숨기는 것은 혼자만의 공간속에서 겪는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프레디의 깊은 외로움이 영화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이제 프레디와 Queen의 공간에 우리가 숨을 차례입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음악과 함께 영화마저도 클래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따듯한 겨울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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