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깜깜하고 장래조차 껌껌해도 웃을 수 있는 개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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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냉면관 그만뒀어요!” 설거지할 때 둘째 아이가 냉장고를 열면서 뭐라고 말하는데 수돗물 소리에 섞여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제멋대로 “엄마, 나 냉장고에 넣어두었어요”라고 생각하고 “알았어”라고 대답을 했지요. 얼마 후 둘째가 아르바이트 가는 시간이 됐길래 “오늘은 아르바이트 안 가?”라고 물었더니, “엄마, 아까 말했잖아요. 나 냉면관 그만뒀다고.”
냉면관은 집 근처에 있는 냉면 전문집으로 둘째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곳이에요. 이 주변에서는 냉면관이 꽤 유명한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네요. 며칠 전 생일을 맞이해 꽉 찬 18살이 된 둘째 아이, 한국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3학년이니까 대학입시 때문에 정신이 없을 때가 아닌가 싶지만, 둘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자유인이에요.
3년 전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에 안 가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걱정이 태산이었죠. 진학 대신 뭘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개그맨’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요즘 세상에는 개그맨도 스펙을 따지고, 옛날처럼 형편이 어려워 예능의 길을 걷는 사람은 드문데 갈 길이 참 멀다 싶었어요. 그렇게 해서 아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코미디 기획회사 ‘요시모토’의 개그맨 양성소 NSC라는 곳에 입학하여 일 년간의 프로그램을 수료했어요, 사실 학비도 그리 싸지는 않았지만.
수료한 다음에도 눈에 보이는 변화는 아무것도 없이 일 년 또 이 년이 지났습니다. 뭔가 진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가장 고민이 많을 테고, 만만치 않은 사회 장벽을 실감하고 있겠죠. 하지만 무작정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려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일과를 꾸려 보라고 권하며 시작한 게 냉면관 아르바이트였어요. 그렇게 일 년간은 아르바이트 중심의 시간을 보내는 것 같더니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고 하니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아르바이트가 목표는 아니니까 하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본인 마음이죠.
“많이 힘들었니? 조금씩만 일하면 되는데 너무 무리해서 부담이 컸나 보네?”라고 수고를 달래 주었죠. “얼마 전 개그맨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 뉴스 봤는데, 너도 알고 있니?” ‘R-1그랑프리’라고 개그맨의 개그 겨루기 대회가 열렸는데 시각장애인 하마다 유타로라는 28세 남성이 우승을 따내서 큰 화제를 모았거든요. 둘째가 다녔던 요시모토 개그맨 기획사 소속이라기에 알고 있냐고 물어본 거죠. 그리 자신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는 둘째 아이. “알고는 있어요.” “그 사람은 자신이 시각장애로 겪는 많은 경험을 개그로 바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 “직접 아는 사이가 아니니까 글쎄….”
하긴 동기 수료생만도 삼백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기획사만 같다고 해서 뭘 알겠어요. 일본 코미디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저는 그리 개그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편이에요. 일본에서는 ‘희극’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어 역사가 오래된 ‘락쿠고(落語)’라는 것도 있고, 두 사람이 짝이 되어 하는 ‘만자이(漫才)’라는 만담도 있는데 이게 가장 일반적이지만 그리 끌리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하니 최근 화제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보곤 하죠. 그런데 큰 개그대회에서 시각장애인 개그맨이 우승했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졌어요.
하마다라고 하는 이 시각장애인 개그맨은 오사카에서 가까운 고베시 출신으로 개그맨이 된 지 5년이래요. 태어날 때부터 약시로 왼쪽 눈은 완전히 시력이 없고, 오른쪽 눈은 명암이 판별될 정도라고 하고요. 졸업 후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개그맨의 길을 걷기로 결심, 자신의 장애를 오히려 웃음으로 바꾸는 ‘무장애 개그맨’이라는 캐릭터를 살려 작년부터 주목을 끌기 시작했는데, ‘NHK 신인 개그맨 대상’ 결승에 진출하여 이목을 집중시켰고, 드디어 유명한 개그대회의 우승컵을 거머쥐었어요. 그의 개그가 궁금해져 인터넷에서 공연 동영상을 찾아 봤죠. “개그맨이 되기 위해 요시모토라는 회사에 들어왔더니 시각장애로 언제나 눈앞이 깜깜한데 장래마저 껌껌해지는 것 같았어요”라는 말에 객석이 웃음바다가 되더라고요. 일상생활에서 겪는 어려움, 학창시절의 체험담에 유머를 섞어가면서 풀어내는 그의 개그가 아직은 장벽투성이인 이 세상을 씩씩하게 살려는 그의 모습과 더불어 도처에 깔려 있는 사회의 모순을 접하면서도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의 모습까지 겹쳐져 웃게 되더라고요.
3,795명이 출전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 믿기지 않지만, 시작장애인이 아닌 개그맨으로서 우승할 수 있어서 기쁘다는 그의 소감을 들으며, 장애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통해 세상의 모순을 비꼬며 비웃을 수 있는 데까지 일본 개그의 수준이 향상되는 계기가 되기를, 그리고 일반적인 장애의 편견을 넘어 웃음의 지평을 넓혀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흰 지팡이를 짚고 등장하는 그를 옆에서 부축하며 활동보조인으로 무대에 등장한 동료 개그맨은 ‘예선에서는 떨어졌지만 활동보조인으로 결승 무대에 올라올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라며 웃음을 자아내더군요. 좋은 일이 있으면 그냥 웃겠지요, 하지만 어려움을 겪을 때도 웃으며 살아야 그 험한 고개를 넘어갈 수 있잖아요. 웃음을 찾는 일, 선사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새삼 멋져 보여요. 그리고 어떠한 장애가 있더라도 그것을 겪어내며 살아내는 삶 하나하나에 진정한 웃음이 살아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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