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한 방, 치킨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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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출연을 결심하다
<다큐 시선> 출연을 처음 제안 받은 것은 올해 초였다. 연극 동아리에서 만나 함께 공연을 준비하면서 친해진, 지금은 EBS의 PD로 일하고 있는 대학교 선배의 연락이었다. 작년 11월, 지원했던 대학원에 떨어졌던 나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모자랄 겨울 방학 내내 연극 연습으로 바빴다. 연습해야 할 부분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는데 공연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온, 공연팀 모두의 똥줄이 타들어가고 있던 2월 중순의 어느 날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는 자신이 이번에 새로 방송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첫 연출을 맡게 됐는데 나와 내 애인이 출연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PD가 돼 일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 둘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마침 기회가 생겨 출연을 제안하게 됐다는 것이 선배의 설명이었다. 부담은 갖지 말고 충분히 생각해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선배는 전화를 끊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방송 출연 요청 연락이 처음은 아니었다. 수능이 끝나고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으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지원한 나는 운이 좋았던 건지 심사 과정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던 건지 덜컥 합격을 하고 말았다. 저 멀리 (지금은 창원시에 통합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경남 마산에서 진행성 근육병을 가진 장애인 학생이 무려 서울대에 합격을 한 ‘사건’은 모르긴 몰라도 휴먼 다큐멘터리 쪽에서는 한 번쯤 써먹기에 적절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지역 신문을 시작으로 몇몇 언론사에서 연락이 왔고 인터뷰가 진행됐다.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갔고 기사를 통해 소식을 접한 몇몇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인간’, ‘휴먼’, ‘사람’ 등의 단어가 포함된 엇비슷한 제목의 다큐 프로들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와 섭외 이유, 촬영 콘셉트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매번 죄송하다는 말로 통화를 끝맺었다. 방송 출연 그 자체로도 부담스러웠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내 모습과 내 이야기가 편집되고 포장되는 것이 두렵고 싫었다.
저녁 연습이 끝나고 애인과 선배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배가 아무리 부담 갖지 말라고 해도 방송 출연은 여전히 그 자체로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애인과 함께 출연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동정 어린 시선이나 듣기 거북한 칭찬은 지금까지 겪어온 것만으로 충분했다. 굳이 TV에 나와서 우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에 부딪히고 긁힐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의 생활을, 우리의 연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전혀 불쌍하지 않고,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으며, 순수하거나 숭고하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애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방송 출연이 아니라 함께하는 하나의 작업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선배의 말도 힘이 됐다. 우리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에 출연하겠다고 말했다.
‘꼽슬과 빙구’의 진짜 모습
촬영은 2월 말부터 시작됐다. 공연을 앞두고 무대 작업과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연습실을 찾은 촬영팀과 카메라 앞에서 쭈뼛거리거나 어색해할 여유가 없었다. 연극 동아리에서 조연출이었던 나는 준비되지 않은 소품이나 무대 작업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러 학교 밖으로 자주 나가야 했는데 카메라는 내가 어디를 가든 바짝 따라다니며 촬영을 했다. 준비했던 공연은 무사히 마쳤고, 첫 촬영 역시 순조롭게 끝났다. 프로그램은 선배를 포함한 다섯 명의 PD가 한 주씩 돌아가면서 방송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우리가 출연하는 편은 6월에 방송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1학기가 개강하고 봄이 찾아오면 본격적인 촬영이 있을 거라고 선배가 말했다. 공연이 끝나고 에너지가 바닥난 우리는 집에서 늦잠을 자고 영화를 보거나 귤을 까먹으면서 남은 겨울을 보냈다.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생각보다 촬영이라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찍는 줄 알았는데,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화장실의 불을 켜거나, 애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도서관 옆을 지나가는 일을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반복해서 촬영했고, 이런 일이 지극히 당연했는지 같은 장면을 되풀이하면서도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스케줄에 따라 선배가 아닌 다른 PD님이 오시거나 우리와 주로 촬영했던 카메라 감독님이 아닌 다른 감독님과 촬영을 했다. 특히 어려웠던 부분은 일종의 설정된 상황에서 하는 대화였다. 꽃구경을 하러 가보자는 작가님의 제안이 있었고 마침 우리도 바람을 쐬고 싶어서 좋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애인이 나에게 즉흥적으로 놀러 가자고 말하는, 근본적으로 연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미리 대본을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적으로도 벅찼다. 3월, 4월에 비해 5월은 촬영 스케줄이 빡빡했다. 거의 매일 촬영을 했는데 보통 아침 일찍 시작해서 밤늦게 끝이 났다. 소진된 체력을 미처 다 회복하기도 전에 다음 날이 찾아왔다. 촬영 차 1박 2일로 부산에 다녀오기도 했고, 부산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온 다음 날에는 수중 촬영을 위해 세 시간 동안 물속에 있기도 했다. 새삼 연예인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다큐멘터리는 ‘꼽슬과 빙구’라는 이름으로 6월 2일에 방영됐다. 방송 전, 가편집본을 한 번 봤었지만 광고가 끝나고 본방송이 시작되자 손에 땀이 났다. 카메라를 통해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미치도록 괴로운 것과는 별개로 ‘꼽슬과 빙구’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가편집본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장면들이 본방송에도 포함이 돼서 좋았고, 자막과 음향 등 최종 편집을 거친 장면들은 대체로 보기 좋았다. 우리가 원했던 만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꼽슬과 빙구’는 무겁지 않았고 또 어둡지 않았다.
느리고 가벼운 주먹질일지라도
‘꼽슬과 빙구’가 방영된 이후에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왔다. 우연히 방송을 보게 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의 연락이 많았다. 우연히 TV를 보다가 내 모습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는 친구도 있었고, 너만 알콩달콩 잘 지내면 되냐는 친구도 있었다. 친척들의 연락도 있었다. 애인과 함께 있는 내 모습이 예쁘고 보기 좋다고 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반가운 연락들이 기분 좋기도 했지만 동시에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래도 언제나 내 편이 돼 주는 사람들이고, 이들의 응원과 격려가 항상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그럼에도 나는 마냥 괜찮을 수만은 없었다. 방송이 끝난 후 동영상 클립이 유튜브에 게시됐고, 사람들은 동영상 아래에 댓글을 달거나 클립을 자신의 SNS에 공유했다. ‘꼽슬과 빙구’를 소개하는 인터넷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인터넷 기사야 하루에도 수백 건씩 올라오고 우리가 실린 기사는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자 또 다른 기사가 올라왔고 이러한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됐다. 인터넷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대부분 우리가 맞서 싸우고자 했던 반응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나와 애인의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불쌍한 모습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아름답지만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보기 어려운 진정한 사랑의 발견이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결국 아픔과 상처밖에 남지 않을 비극이었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위와 같은 반응을 마주하는 일이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스스로는 부족함 없이,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항상 부족하고, 불편하고, 그래서 불쌍한 모습이었다. 무기력을 학습하듯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갔다. 그러나 애인에게까지 그러한 시선이 닿게 되면 견딜 수가 없다. 내 애인은 불쌍하지 않다. 나보다 글도 잘 쓰고 영어도 잘한다. 매력이 많아서 어딜 가든 사랑받는 편이다. 내 애인은 순수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우리는 때때로 아주 속물적이고 또 야한 걸 좋아한다. 짜증이 나는 상황에서는 욕도 한다. 댓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욕을 했는지 모른다. 이런 내 애인이 천사같이 느껴진다면 ‘천사’라는 단어를 완벽하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멋대로 잘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반응 하나하나에 크게 영향을 받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는 반반이다. 내 인생만 놓고 보면 완벽하게 전자에 속한다(물론 그래서 불효자식이자 말 안 듣는 남자 친구이다). 하지만 애인과 함께 있는 나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견딜 수 없이 불편하다. 제대로 한 방 먹이고 싶다. 보란 듯이 애인과 잘 먹고 잘 살고 싶다. 말하자면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것은 체중을 가득 실은 회심의 펀치 한 방이었다. 나는 그 펀치가 멋지게 안면을 강타해서, 사람들이 코피를 흘리고 욕하길 바랐다. 그러나 나의 회심의 펀치 한 방은 사실 매우 느리고 가벼운 주먹질이었다. 여전히 나와 애인은 ‘우리’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나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쓰면서 운동하러 간 애인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둘이서 치킨을 시켜 먹을 거다. 치킨 생각을 해도 썩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걸 보니 글을 쓰면서 또 다시 힘이 빠진 모양이다. 그래도 안 남기고 맛있게 먹을 거다. 보란 듯이 맛있게 먹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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