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귀하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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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미국 영화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심지어 마이애미 헤럴드에서는 ‘마이애미 최초의 명작’, 워싱턴 포스트는 ‘완벽한 영화’라고 발표했지만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정확하게 표현하면 백인 남성들이 보기에 불편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난에 찌든 흑인 소년의 성장영화이며, 흑인 동성애를 다룬 최초의 영화이기 때문에 더욱 불편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바로 2017년 3월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문라이트(Moonlight, 미국, 2016)’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배리 젠킨스) 또한 흑인이며, 원작과 각색 역시 마이애미 흑인들의 체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가히 흑인들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적게 받은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흑인소년의 성장을 다룬 것이지만, 어떠한 스타도 캐스팅 되지 않았습니다. 마이애미의 극빈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마약, 왕따, 가난, 폭력, 동성애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영화 속으로 잠시 들어가 봅니다. 샤이론은 이제 10살입니다. 가장 행복해야 할 나이지만 그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집에는 마약에 찌든 엄마가 있고, 아빠의 존재는 알지도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집단으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텅빈 냉장고와 더러운 욕조가 있는 집은 들어가기 싫은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마약딜러 후안과 그의 여자친구를 만난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지요. 후안은 처음으로 물의 존재를 가르쳐주었고, 스스로를 존중하라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또한 ‘달빛 아래에 서면, 흑인 소년들이 파랗게 보인다’는 후안의 이야기는 영화의 전면에 흐르는 중요한 평등 개념을 암시합니다.
이제 1부에서 ‘리틀’로 불렸던 흑인 소년은 2부에서 ‘샤이론’으로 성장합니다. 여전히 그는 왕따이고 괴롭힘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유일하게 친구가 되어주는 케빈으로부터 사랑을 느끼며 그는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잠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지만 집단 괴롭힘은 여전했고, 그는 이제 자신을 둘러싼 불평등한 세상에 분노하게 됩니다. 찬 물에 삐뚤어진 코를 담그며 그는 리틀이 아닌 샤이론으로 변하게 됩니다. 차가운 물에 얼굴을 씻으며 그는 성장합니다. 물의 의미가 샤이론에게는 매우 크게 작용하는데, 이것은 미국 남부 흑인들의 침례 신앙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한 샤이론은 마약딜러로 살아가지만, 마약에 손대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의 생활을 가꾸며 살아갑니다. 멋진 캐딜락에 목걸이, 귀걸이로 치장한 그는 이제 나름 성공한 흑인입니다.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동성애에 대한 그리움이 겹쳐지면서 옛 친구 케빈과 재회하고 미움의 대상이었던 어머니와도 화해합니다. 그의 인생은 이제 희망으로 가득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희망을 넘어 선 해탈이 보입니다. 담백하면서도 위대한 하루가 그에게는 있습니다. 영화는 희망도 절망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샤이론의 인생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어설픈 희망의 메시지를 모두 제거한 것이지요. 가끔은 교훈적인 메시지가 주는 역겨움이 느껴지는데, 이 영화에서는 전혀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백인들의 말 많고 설명이 지루한 영화에 지친 분들이 보신다면, 더욱 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던 날,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해프닝이 아닌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따른 실수라고 판단합니다. 워렌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가 작품상 발표를 하면서 ‘라라랜드’를 호명한 것이지요. 물론 여우 주연상 카드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해명은 되었지만, 백인들만의 잔치라고 늘 비판받던 아카데미가 흑인들에 의한 흑인들의 영화에 작품상을 주기 싫다는 거절의 무의식적 표현을 실수로 하게 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유 없는 행동은 없는 법이니까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공감(empathy)’이라는 인류 보편의 측은지심을 느끼게 됩니다. 샤이론의 삶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 영화가 왜 불편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편한 것에 익숙해진 우리의 삶은 그늘진 구석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씁니다. 그러나 결코 지나칠 수 없지요. 우리에게는 늘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처럼 희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소외받은 젊은 청춘들에게 이 영화를 권합니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의 많은 샤이론들이 하루를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평등이 넘쳐나고, 최저임금 1만 원과 청년수당이 가득한 대한민국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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