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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들을 믿지 못할 이유-죽을 인간은 어떻게 죽지않는 신보다 더 훌륭할 수 있는가

홍윤기의 철학 단상(4)

본문

  지금은 누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니이체라고 하는 정신장애우가 (지금 같았으면 니이체도 장애우 카드를 발급받았을 터인데 그가 살았을 당시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다) 지금부터 꼭 100년 전 “신은 죽었다”고 한 마디 해서 유럽을 벌집 쑤신 듯이 소란스럽게 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신은 있다 없다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의 주요 관심사에서 아예 제껴졌다. 하지만 요사이 백년을 제외한 근 반만년 동안의 인간 역사를 보면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신을 믿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던 기간이 더 길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인간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접촉할 수 없다면서도 꼭 존재하는 것처럼 믿겨진 신같은 존재자가 어찌 인간의 머리 속에 떠오를 수가 있었던가?

  지금까지 끌어온 필자의 따분한 얘기를 눈썰미 있게 살펴온 독자라면 이른바 철학이라는 것의 시작이 그 옛날 전적으로 신이 맡았던 영역을 침범하는 일과 꼭 일치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우주의 이치’를 알아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철학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 우주에 대해서는 이미 ‘신화적 사고에 의해 확정된 진리’가 있었다. 그 진리는 다음과 같은 두 명제로 표현할 수 있다. 즉,

  “우주는 신이 처음 만든 것이다.” (신에 의한 우주 창조론)

  “그 뒤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과 인간의 모든 일 역시 신들의 조화(造化)이다.” (신에 의한 만사 지배론)

  전 세계에 흩어진 모든 민족과 인종의 신화나 설화를 광범하게 모아보면 우주라는 것이 우선은 ‘만들어진 것’이고, 또 ‘그것을 만든 주체가 신’이라는 식의 이야기 뼈대 자체가 놀랍도록 똑같다.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이 우주를 만드는 재료에 대한 통찰 역시 똑같다는 점이다. 즉 이 우주는 그 뒤 어떤 경로로 각기 다른 사물이 생겨났든지 간에 모두 ‘흙(土)과 물(水)’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땅과 바다(또는 강)’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우주창조의 과정이 인간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그 인간에게 호흡이 불어넣어지고, 바로 그 순간 호흡과 ‘바람(風)’이 자연스럽게 연관된다.

  이런 구도에서 ‘인간 창조에는 항상 우주 창조의 절정에 해당’된다. 즉 인간의 창조는 ‘우주의 창조에 동원되었던 모든 재료들이 가장 압축적으로 집약적 결과’로서 ‘생명의 등장’을 가장 극적으로 표출시키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사고방식으로는 왜 인간이 우주 안에서 중심적인 존재자로 부각되어야 하는지를 해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꼭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원시인들은 자신들이 자연을 통해 경험한 범위 내에서 생명은 유독 인간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님을 철저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현재의 미국의 백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정복되고 침탈되기 이전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으로서 지금은 아주 부당하게도 ‘아메리카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그 땅의 토착민들은 스스로를 대지에 영원히 안겨 살아가야 하는 여러 생명의 한 가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생명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두드러진 지위를 누리는 것은 이 인간의 생명이 우주의 생명을 이루는 모든 재료들을 집약시킴으로써만 나타나는 이 우주생명의 최고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현대인의 누에 아주 야만스럽게 보이는 사냥도 원시인에게 있어서는 공격적인 잔인함의 불필요한 발로라기 보다는 이 우주가 발하는 생명의 기운을 자기 몸 안에 받아들이니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순환의 한 고리로 이해되었다.

  어쨌든 우주와 인간의 생성에 관한 한 신화적 사고는 흙과 물과 바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불로 확인되는 ‘우주의 기초재료들을 신의 제적활동과 결부시켜 궁극적으로 생명현상을 도출’하는데 본질적인 면모가 있었다. 그런데 초기 철학자들이 발휘한 사고는 바로 이 우주의 기초재료와 삼라만상의 생명현상 사이에서 그 연결 고리가 되는 신의 제작활동을 배제시키고 ‘생명현상을 이 우주의 기초재료에 내재한 이법(理法)의 소산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신화적 사고와의 충돌이 볼가피한 상황을 야기시켰다. 바로 이 점이 이른바 철학 집단들을 지역별로 할거하는 고대 공동체들과 대립시키는 원인 된다.

  고대 그리스의 경우 우리는 그저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속 편하게 얘기하지만, 실은 그 각각의 신화들은 ‘폴리스’라는 지역공동체로 발전한 소규모 혈연공동체의 기초였던 각 부족의 정치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혜의 여신 아테네를 섬기는 아테네 폴리스와 전쟁의 신 아레스를 숭배하는 스파르타 왕국 사이에 평화란 언제나 한시적일 수 밖에 없었으며,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에 마음이 뺏겼던 트로이는 그리스 여러 나라들로부터 ‘이지메’를 당하다가 거의 십자군 원정에 맞먹는 대규모 침공을 당해 기원 전 일천 년,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역사의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트로이의 처지를 요새 말로 ‘왕따’ 라고 하지 아마!)

  이런 정황 속에서 왜 우주의 기초재료와 생명현상 사이의 연결고리로 각종 신(神)들을 등장시킬 생각을 했는지는 그 당시 신화를 창작하거나 기록했던, 예를 들어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와 같은 이들과 직접 현장 인터뷰를 할 수 없으니 정확하게 알 도리는 없다. 하지만 온당하게 추측할 수 있는 점은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다음의 두 명제로 정리 할 수 있다.

  ① 무엇보다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생명들’은 생명체마다 길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그 어떤 경우에든 사멸할 운명, 즉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일정 기간에 국한된 유한성’을 불변의 속성으로 한다는 점이다.(사멸의 필연성과 생명의 유한성)
  ② 그러면서도 ‘인간’은 다른 유기체와는 달리, 비록 문명권마다 나타나는 정도와 양상은 현격하게 차이나지만, 즉 ‘자신이 생명체라는데 대한 자기의식, 즉 자신은 살고자 하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생명체’이다. 즉 인간은 여러 생명체들 중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자신이 생명체임을, 그것도 유한한 생명체임을, 아주 강하게 자각하는’ 독특한 생명체이다.(인간 생명의 자의식성)

  생명체라고 해서 모두, 유한한 자기 생명과 절대적으로 대비되는 무한존재로서의 신을 표상하지는 않는다. 소나 말과 직접 의사소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긴 하지만, 짐승들이 선천적으로 종교적 심성을 가졌음을 확인했거나 아니면, 아싸시의 성인 프란체스코나 도통한 고승을 제외하고는, 짐승의 신심을 일깨운 설교나 설법을 행한 예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신’이라는 관념의 발생 내지 그 자각은 ①이 기술하는 바 생명의 보편적 상태가 인간에게서 아주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②의 상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추정해도 별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유한성의 자각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다못해 가상적 차원에서라도 무한성과의 대비를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간은 자신의 경험권 안에 무한성을 체험할 수 있는 단서를 접하게 된다. 자신이 그 안에서 태어나 의식을 갖게 된 자연이나 인간의 환경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환경, 즉 고대인에게는 우주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주변 세계는 자신의 태어남이나 죽음과는 무관하게 계속 존립함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

  인류학과 종교학에서 행해진 다방면의 합리적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원시인이 왜 그런 주변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의 배후에도 ‘세계를 만들어낸 (또는 창조한) 신’이라는 제작자의 이미지를 투사했는지는 그 이유가 불분명하다. 단지 무엇인가가 새로운 것이 나타나려면 만들어내는 것 이외에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는 그의 생활체험, 그리고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인간이 만든 그 어느 것보다도 자연의 것이 더 완벽하고 위력적이었다는 자연에 대한 공포 체험이 인간의 사고로 하여금 초인간적 창조자내지 지배자를 상상하게 했다고 빈약하게 추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에도 원시인들이 신을 직접 만나봤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식으로 고대인의 사고를 이해하려고 들면 참으로 희한한 사태에 마주친다.

  무한성은 당연히 유한성의 자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생겨난 무한한 존재자, 즉 신의 직접적인 모양새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어떤 점을 유한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지각했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가령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유한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무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자 또는 끊임없이 생명을 만들어낸다고 믿어지는 제우스를 신으로 생각할 것이다.

  밤에도 사냥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숭상하는 것은 환한 달빛이 동물들이 숨은 곳을 밝혀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고대 신화적 사고의 또 다른 측면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런 다양한 신들이 실은 어떤 한 개인의 신이 아니라 ‘그 신의 숭배를 중심으로 결속된 부족 공동체의 정체성과 존립방식을 이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신들은 철저하게 각 부족공동체를 집단이기주의를 대변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의 만남은 대체로 평화 속에서의 공존보다는 긴장된 대립과 질투로 얼룩져있다. 이것은 곧 신들의 질서가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보다 훨씬 열등함을 반증한다. 이에 콜로폰 출신으로 그리스 반도 전체를 방랑하며 여러 도시국가들, 즉 폴리스들 사이의 반목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신화들의 허구를 신물이 나도록 목격한 음유시인 크세노파네스는 현대적인 감각에 비추어 보더라도 조금도 뒤지지 않는 신랄한 어조로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허구를 폭로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당시 그리스 교육의 교과서였던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를 다음과 같이 비꼬고 있다.

  “처음 베움은 모두 호메로스를 따른다지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신들이 하는 짓이라고 그려 놓은 것을 보라. 수치스럽지 않은 일이 있으며 인간들 사이에서라면 벌받지 않고 지나갈 일이 있는지. 도둑질, 간음, 그리고 사정없는 사기.
  ...

  그러면서도 이 죽게끔 운명지워진 자(=인간)들은 신들이 탄생에 의해 창조되며 자기들 나름의 옷가지, 목소리 그리고 육신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소나 말들에게도 두 손이 있어 사람들처럼 두 손으로 그려 예술작품을 만들게 한다면, 말들은 신을 말처럼 그릴 것이며, 소들은 신을 소처럼 그릴 것이고, 각 종자가 저마다 지니는 형체에 따라 그 신들의 육신을 그려낼 것이다.”

  이런 불온한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작자를 각 공동체에서 그냥 놔뒀을 리가 없다. 당연히 얼마 전이라면 그야말로 국가보안법감이지만 이방인에게 그런 법을 적용할 수는 없는 터라 할 수 없이 당시로서는 사형 다음의 극형에 해당하는 추방령을 내려 사방에서 쫓기는 몸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자연철학자들의 통찰은 그리스 반도 각지의 흩어져 폐쇄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당시 그리스 부족들의 지역감정과 거기에 얽매였던 신화전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신화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광대한 세계의 체험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은 그 출발점서부터 이른바 초보적인 세계화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런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서 크세노파네스는 우상으로 전락하여 인간들의 눈을 가리웠던 신에 대한 숭배보다는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지해 이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진리에 보다 가까워지리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역설하였다.

  “진실로 신들이 있어 죽게끔 운명지워진 자들에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죽게끔 운명지워진 자들이 오래 찾아 헤매면서 보다 나은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글/ 홍윤기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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