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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자기 결정권이 있다”

[번역 연재 미국 장애우 운동사 (24)] 시설 수용이 아닌 재가 서비스 확대로 인한 새로운 발견들

본문

시설들은 이제 재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였다. 이제 새로운 요양원들로 젊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작업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의욕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미국의 주 정부들도 소규모 시설이나 공동생활가정(그룹홈)에 예산을 책정하는 법안을 제안함으로써 이러한 ‘시설에서의 편중’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제도를 바꾸는 것이 비용의 측면에서도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시설 복귀만 아니라면 다 참을 수 있다”

  장애우를 요양원에서 나와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현재보다 더 많은, 혹은 적어도 현재 존재하는 예상의 재분배가 필요하다. 현재 연방 정부 대부분의 예산은 시설이나 요양원으로 직접적으로 지원되고 있어서 지역 사회 프로그램을 방해하고 있다는 위스콘신주의 발달장애사무소 데니스 하킨스는 불만을 털어놓았다. 위스콘신에서 이와 관련된 예산의 3분의 2는 요양원과 시설의 5천5백명의 입소자들에게 지급되고 있는 반면 전체 예산의 3분의 1만이 지역사회 프로그램에 있는 2만 5천명에게 제공되고 있다고 그는 이야기하였다.

  상원의원인 존 차피는 예산을 소규모 시설이나 공동생활가정(그룹홈)에 제공하는 법안을 제안함으로써 이러한 ‘시설에서의 편중’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차피의 법안은 수많은 절충안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설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시설에 아이들을 맡기고 있는 부모들이 과연 지역사회에 기반한 프로그램이 제공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결국 무산되었다.

  시설들은 이제 재활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특히 요양원에 있는 장애우들과 노인들의 삶의 질의 향상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위스콘신의 발달장애협의회의 제인 위텐마이어는 이러한 변화가 상반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의료보장제도는 궁극적으로 그들이 요양원에서 나가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1986년 휘톤 프란체스코는 1백7명의 장애우를 위한 또 하나의 분리된 시설을 가지고 있는 4백 병상의 요양원을 인수하였다. 이 요양원의 전임 원장은 그들에게 움직일 자유를 제공했지만, 직원들이 시설생활자들을 통제하기는 더 어렵다는 이유로 전동휠체어를 제공하는것을 단념시켰다.

  그러나 연방과 주의 회계감사에서 지적된 것처럼, 이제 새로운 요양원은 젊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작업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의욕적인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고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마리안 프란체스코 요양원 신디아 숙 원장은 설명했다. 1960년의 거대한 시설에서 밖으로 나오도록 하는 것은 좋지만, 위스콘신과 같은 주립시설은 생활프로그램이나 공동생활가정 같은 곳으로 예산이 들어가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마리안 프란체스코와 같이 상대적으로 좋은 시설의 시설장은 이러한 요양원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적당하지 않은곳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떻게 우리가 1백7명의 다른 사람들과 살 수 있는가? 우리는 이 곳을 젊은 사람들이 살기 편한 곳으로 만들고자 하였지만, 이곳은 단지 하나의 시설일 뿐”이라고 숙은 이야기하였다.

  군더슨이 1981년 가을 요양원에서 나왔을 때, 보조금을 지급받고, 목욕하고, 식사하고,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고, 보호작업장에 일하러 가는 것을 도와주는 도우미를 제공받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는 더 이상 그에게 스케쥴을 작성해 주는 요양원의 스텝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도우미와 함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 많이 조정할 수 있었다.


시설과 자립 사이의 행운의 선

  낮은 임금은 높은 이직률을 유도하고, 숙달된 도우미가 되도록 하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규정과 정형화된 훈련은 이 보조자의 기술의 질에 있어서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공인되 도우미나 간호사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하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에, 대다수의 장애우들은 훈련되지 않은 도우미들을 더 좋아했다.

  군더슨은 처음에 욕설을 퍼붓고, 약간 괴팍한 도우미와 함께 살았었다. 그런데 그 도우미는 뇌성마비 장애가 악마의 표시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도우미는 때때로 군더슨을 휠체어에서 내려놓고 아파트 마루에서 기도했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초대해서 군더슨을 가운데 놓고 그에게 붙어 있는 악마를 때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군더슨이 계속 걷지 못하자 그 도우미는 군더슨에게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고 교회에 가는 것도 중단하였다.

  그 다음에 온 도우미는 더 믿을 수 었었으나 정신병력이 있었다. 군더슨은 몇 번이나 괴상하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해야 했다고 나중에서야 털어놓았다. 그 도우미는 군더슨을 나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군더슨에게 녹색 스웨터를 입히고, 초콜렛 우유를 부었다. 그의 뿌리가 영양이 부족하지 때문이라는 이상한 말을 하면서 말이다.

  어떨 때는 군더슨을 부두에 묶여 있는 보트라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침대에 묶기도 했다. 또는 저녁식탁에 요리되지 않은 날고기를 내놓기도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군더슨은 이러한 일종의 테러같은 대우를 묵묵히 참아내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미 이전에 더욱 심한 테러를 요양원에서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라고 할까봐 두려웠다. “나는 어떤 것도 참을 수 있다. 단지 내 자신의 집에만 있을 수 있다면 말이다”는 것이 군더슨의 심정이었다.

  이러한 노골적인 학대 사실은 어느 눈 오는 날 아침, 세상에 알려졌다. 군더슨이 얇은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문밖에 쫓겨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응급조치로 새롭게 고용된 도우미가 사운 보이드인데, 그는 제대로 된 지원을 하는 도우미였으며 군더슨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됐다.

  연방정부에서 제공해준 방 2개 짜리 아파트 -낡은 가구가 포함된-에서 군더슨과 보이드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았다. 보이드는 음식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욕조부터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까지 군더슨의 욕구에 아주 기술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배려하였다. 그는 이러한 모든 것에 전혀 돈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일반 패스트푸드점 요리사보다 음식을 더 잘 만들었는데, 때로 그는 그 지역의 스테이크점에서 매니저로 근무했다.

  군더슨과 보이드는 마치 친한 형제와 같이 생활했다. 그러나 보이드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보이드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병원과 요양원에서 살고 있었다. 보이드는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희미한 기억 -정해진 시간에만 면회가 가능했고, 점점 더 약해지고 병들어 갔으며, 항상 간호사와 깨끗한 병원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그가 9살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군더슨은 한 달에 사회보장제도에 의해 5백50달러를 받아서 살고 있다. 그는 보호작업장에서 다른장애우들과 함께 약간의 돈을 벌고 잇었다. 그는 플라스틱가방에 마분지를 밀어넣는등의 일을 하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거의 일을 하지 않았고, 이 곳에서 군더슨은 많은 시간을 알파벳 빙고같은 너무나 초보적인 어린이용 게임을 하는데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위스콘신주의 다른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고 직무지도원의 도움으로 장애우들이 고용되도록 지원되기는 하지만, 이렇게 시스템이 변화하는 동안 군더슨은 재미없고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보호작업장에서 머물러야 하는 것이 시설밖에서의 요구였다. 보고작업장이 없다면, 군더슨은 그가 요양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짐 맥마흔은 의료적인 미스테리이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드지에서는 쿼터백의 프로파일을 시작하고 있다. 맥마흔은 팔꿈치의 만성적인 건염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미식축구를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긴 머리를 묶을 수조차 없었다 “사실 왼손은 오른손이 게임이 끝난 후 머리가 엉킨 것을 풀기 위해 머리를 빗을 때도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뒤로 땋아 올린 머리를 단지 제대로 놓기 위해서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고 이 잡지는 적고 있다.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이 쿼터백은 팔꿈치가 너무 아파서 필라델피아 이글팀의 룸메이트인 론 헬러에게 자신의 긴 머리를 묶어줄 것을 부탁했다

  장애권리운동의 정의로 보면, 맥마흔의 팀 동료들은 ‘개인적인 지원서비스’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의 팔꿈치가 다치지 않도록 열심히 도와주고 있었다. 맥마흔은 매일 매일의 삶에 있어서 작은 활동까지도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외에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할 수 있었고, 팀을 승리로 이끌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시설에 있는 것과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 사이에 아주 가는 행운의 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때로 이것은 그가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것을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 1993년, 동등한 직업기회위원회의 에반 캠프는 그가 침대밖으로 나오고, 세면장을 사용하고, 씻고, 옷을 입고, 아침을 만들고, 직장으로 나가기 위해서 휠체어에 앉는 것까지 도와주기 위하여 매일매일 하루 3시간을 도와줄 수 있는 개인적인 도우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캠프는 각 필요로 할 때마다 도우미를 요청할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능력 있고, 밝고, 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장애우들을 요양원에서 만났다. 이 위원회 장으로서의 나와 요양원의 일개 환자로서의 나 사이에는 아주 작은 차이가 있다.”

  개인적인 지원서비스는 새로운 것이면서 장애권리운동의 최고의 이슈가 되는 의제이다. 미국의 ADA법은 가게나 식당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차별 대우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고, 고용주들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고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아침에 침대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그러한 보호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활동가 쥬디 휴맨은 개인적인 지원이 바로 이 운동의 ‘주요 시민권적인 이슈’라고 얘기했다.

  도우미들은 장애우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것들을 도와 주었다. 옷을 입고 벗으며, 몸치장을 하고,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하고, 잠자고 일어나고, 휠체어에 타는 등의 일을 포함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숨을 쉴 수 조차 없는 심한 중증장애우의 경우에는 이러한 도우미들이 공기호스를 깨끗하게 유지하여 주었고, 그들이 대소변을 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사람의 장애의 정도에 따라서 도우미들은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쇼핑을 도와주었으며, 정신질환이나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는 장애우를 위해서는 집주인과 흥정을 하고, 계산을 하고, 수표장을 작성해 주기도 했다.


“어, 훨씬 돈이 적게 드네!”

  약 7백70만 미국인들은 이러한 개인적인 도우미들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인식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1990년의 연구에 의하면 단지 11% 86만명만이 이러한 혜택을 보고 있다. 적어도 정부에서는 제공되는 개인적인 지원서비스를 받는 사람 가운데 77%는 60살이 넘은 사람이었다. 지원서비스에 대한 더 많은 접근은 젊은이와 늙은이를 모두 요양원에서 나오게 하고, 주의 재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줄리안 산체스를 방문하는 도우미는 하루에 세 시간을 일하고 15달러를 받는다. 그러나 이 젊은 하반신마비장애우가 자신의 아파트에게 생활하면서 대학을 다니기 전인, 요양원에 있을 때 주에서는 그에게 하루에 80달러의 예산을 들어야했다.

  이러한 예산절감에도 불구하고, 각 주에서는 이러한 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장기간의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 7백만명의 미국인들 중에서 단지 1백50만명 만이 요양원에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집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병자나 장애우를 돌보는 사람 가운데 4분의 3은 돈을 받지 않는 가족등의 관계인데, 주 정부에서 걱정하는 것은 가족들이 이미 무료로 자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까지 예산을 요구할까 하는 것이다. 한 연구에서는 도우미 서비스를 만드는 것의 유용성은 주에서 그들이 요양원에서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낼 때 주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익을 빠르게 다 소진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심지어 장애활동가들 가운데에서도 이런 개인 지원서비스는 예산이 더 많이 든다고 의견제시를 하고 있다. 5억불에서 1백억부에 달하는 예산이 나이, 소득, 직업의 지위, 혹은 장애의 정도나 유형에 관계없이 9백만명의 장애우들에게 지원되어야 한다고 이들은 추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에서는 이제 국민의료보장제도, 사회보장제도, 혹은 연방 정부의 사회적 서비스 예산에서 돈을 사용하여 노인과 장애우를 위한 제한적인 지원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불충분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현재 존재하는 서비스는 독립적인 삶을 위해서는 너무나 부족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잘못된 건강서비스 분야는, 현재 가장 효과적이고 인간적인 시스템보다는 오히려 훨씬 돈이 많이 드는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불과 12개의 뇌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재활센터가 있었다. 그러나 사보험이 이에 대해 예산을 지급하기 시작하자 많은 요양원이 변하게 되었고, 1992년에는 8백개의 시설이 존재하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15일에 한 곳으로 시설이 세워졌는데, 이곳의 이용요금은 하루 평균 1천 69달러였다.

  그러나 의사들과 환자들은 이 센터가지의 효과가 없다고 지적한다. 단지 보험이 이 돈을 내주기 때문에 시설에 다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부자에게서 돈을 빼앗은 것”이라고 예전에 이곳을 운영하였던 의사 케네스 호에슬러는 밝히고 있다. 다른 직원들은 슬픔에 잠겨 있는 가족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그들의 상처입은 관계를 인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생존한 쉐리 와트슨은 이 해결책이 바로 비용이 적게 도는 지원서비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사고 이후, 와트슨은 시간당 1백25달러의 신체적 치료와 시간당 1백50달러 정도의 인지치료비를 그녀의 보험회사에서 지불하는 시설에서 살았다. 그러다 한 달에 25달러를 대고 헬스클럽에 한 시간에 5달러를 내고 글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정교사와 만나면서 급격한 발전이 생겼다. 이러한 재활시설에서의 한 달 비용은 가정도우미를 활용하는 1년치 금액과 맞먹는 것이었다.

  워싱턴의 국립재활병원의 거벤 드종은 지원서비스의 끝은 ‘독립적인 생활모델’이라는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장애우들은 소비자로서 이들에 대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도우미를 고용하고 해고하고 훈련시킬 수 있다. 때로 이 금액을 지원 해주는 정부 당국은 도우미의 임금을 직접적으로 장애우 소비자에게 주어서, 그가 도우미를 고용하는 실질적인 고용주의 지위를 갖도록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드종이 ‘의료적인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러한 프로그램의 연속선상의 다른 극단적인 모습에 가까웠다. 이러한 대부분의 것들은 요양원과 비슷한 것이었다. 장애권리운동은 ‘care'라는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장애우들이 아프고, 도우미의 수동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애권리운동의 개인적 지원은 의료적인 배려라는 모습이 아니라 사회적인 자유-버스 리프트와 가벼운 휠체어와 같은-의한 항목이었다.


우리의 자기결정권을 위하여

  그러나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개인 서비스 프로그램은 수혜자를 독립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환자로 보고 있다. 또 때때로 도우미의 결정이나 프로그램 규칙은 장애우의 판단을 대신한다.

  몬타나의 한 도우미는 장애우가 쇼핑을 하는데 오레오 쿠키를 사는 것을 거부하였다. 또 그 장애우에게 너무 살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결정권’이라는 중요한 원칙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예전부터 장애우를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온정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 도우미는 맥주 6개들이 한 팩을 사는 것도 거부하였다. 휴맨은 어떤 장애우가 술을 원할 때 그것이 좋은 행동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권리주창자들은 도우미가 장애우를 돌보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장애우의 중립적인 확장선상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도우미들은 보조적인 기술의 한 부분으로 비유된다. 단지 불을 켜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컴퓨터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맥주캔을 내려주는 로봇팔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수화 통역사는 이것의 좋은 모델이다. 그들은 통역할 때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는다.

  주에서 이렇게 비싼 예산이 드는 것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동안데, 몇몇 장애우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될 권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레이 캠밸과 빌 어얼은 미시간 요양원에서 그들이 15살이던 1978년에 만났다. 그들은 둘 다 심한 뇌성마비를 갖고 있어서 휠체어를 사용하였고, 특히 레이튼은 말을 하기 위해 음성합성기를 조작해야 했다. 그들은 대학에 가고, 결혼하고, 그리고 자신의 아파트를 갖는 등의 편의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주에서 자금을 제공받아서 하루에 17시간 동안 도우미를 통한 도움을 받았다 1992년에 레이는 딸을 낳았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과 함께 레이는 모유를 아이에게 먹일 수 있었지만 딸을 목욕시킬 수 없었고, 기저귀를 갈아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 주에서는 도우미가 아이를 돌보는 것은 금지하고 있었다. 주에서는 다른 부모들이 그렇게 하듯이 비슷한 서비스가 아이에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이 둘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고, 그래서 정부당국의 사회복지사는 그들의 딸을 다른 집에 위탁하여 키우도록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이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도우미가 이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빌 어얼에게, 이것은 자신이 10대를 요양원에서 보낸 것처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가치를 정하하고, 경시하는 또 다른 사례였다. 어얼은 내 딸의 모습을 보아야 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주의 법률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같이 않다고 해서 우리 가족을 떼어놓지 마시요”라고.

  장애우의 권리에 대해서 글을 쓰는 장애여성 바바라 페이 왁스만은 이 아이를 떼어놓겠다고 정부 당국에서 주장하는 것은 철저한 편견의 한 모습이라고 적었다. 이 2명의 커플이 주를 상대로 싸우는 동안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아이를 돌봐주는 일을 하였다.

  사회학자 이빙 케네스 졸라는 “대부분의 자료 기록에 의하면, 건강서비스 제공을 위한 가장 좋은 곳이 바로 가정”이라고 적고 있다. 즉 장애우들은 가정보호로 돌아가도록 유도되고 있다. 1950년이 되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함께 만성질환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더 오래 살게 되었고, 이들은 병원을 떠나 가능한 한 정상적인 생활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는 소아마비장애를 갖고 있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병원을 떠나서 더 나은 삶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일명 가정지원서비스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오늘날 요양원은 장애권리운동을 통해 점차 개혁되고 있다. 요양시설은 그 크기에 1960년대와 70년대에 급격하게 팽창했는데, 이것은 정신질환과 정신지체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문을 닫기 시작한 때와 일치하였다. 요양원은 1965년에 시작된 노인의료보험(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과 국민의료보장제도(65세 미만의 저소득자와 신체장애우를 위한)에 의해서 수십억 달러를 제공받아서 지어졌다.

  시설을 떠나는 것은 선택이다. 그들은 의료적 모델에 의문을 가지고 최대한 자기결정권을 요구한다. 현재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장애운동이 미국 사회를 형성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중의 하나이다. (계속)

글/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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