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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의 영화이야기] 슈렉, 버티칼 리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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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에이션의 경계는 여전히 애매하다. 제대로 만들려면 꼼꼼하게 공을 들여야 하지만 그래봐야 ‘아이들이나 보는 영화’ 쯤으로 대우받는 것이 예사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진짜’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라는 느낌이 앞서는 탓이다. 실물이 존재하는 스타에게 열광하는 분위기와 사이버 캐릭터에 대한 인상이 다른 것과 같은 느낌일 수도 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 영화의 승패는 그 경계를 얼마나 넘어설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드림웍스사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 <슈렉>은 어른 관객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시도하는 야심만만한 도발이다. 애니메이션 영화가 기초로 삼고 있는 아름다운 색체와 동화적인 아름다움을 가볍게 뒤집는 것은 기본이고, 한 겹 접은 농담과 야유까지도 서슴치 않는 재미가 푸짐하기 때문이다.
 
 동화 속의 무대가 될만한 옛날 어느 시절. 성 밖 늪지대에 사는 괴물 슈렉(목소리:마이크 마이어스)은 자신이 사는 곳을 위협하는 파콰드(존 리스고우) 영주와 담판을 지으러 떠벌이 당나귀(에디 머피)와 함께 떠난다. 하지만 도중에 일이 꼬여 불을 뿜는 용의 성에 갇힌 피오나 공주(캐머론 디아즈)를 구하러 가게 된다. 공주는 언젠가 멋있게 생긴 왕자가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슈렉이 바로 그 왕자일 것이라고 믿는 것은 물론이다. 위기의 와중에도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자는 척 누워서 왕자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동화책이 설정하고 있는 상황과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주의 설레임과 기다림은 자신을 구한 영웅이 백마를 탄 왕자가 아니라 엉망진창으로 생긴 괴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한다. 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키스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못난이 주인공 슈렉과 웃기는 당나귀, 완전히 공주병에 걸린 공주(심각한 질문-공주가 공주인척 하는 것은 병인가 아닌가)가 어우러지는 해프닝은 요절복통의 연속이다. <택시 드라이버>나 <매틀릭스>처럼 눈에 익은 영화들의 장면을 능청스럽게 패러디한 대목도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넘어야 할 고비는 웬만한 일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무작스러움 뿐만이 아니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단단한 아성을 상대해야 한다는 점도 들어있다. 어른들은 만화영화를 잘 보지 않지만 어쩌다 본다 하더라도 그 기준은 <미키마우스>나 <도널드 덕>, <백설공주> <인어공주> 정도는 돼야한다고 믿는다. 거의 다 월트 디즈니가 만든 애니메이션 영화들이다. 극장에서 본 경우는 물론이고 텔레비전으로까지 보면서 눈에 익히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쇄뇌는 너무도 굳건하다.

 스티브 스필버그 감독과 함께 드림웍스 영화사를 세운 제프리 카첸버그는 바로 디즈니 영화사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주도하던 핵심 중의 핵심이었지만 정작 그가 상대해야하는 대상은 바로 자신이 만들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비슷하게 만들면 모방이나 흉내에 그치는 것이고 색다르게 만들자면 이미 확보해놓은 애니메이션의 인상을 비껴가야 한다. 들기도 놓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진퇴가 양난이다. <이집트 왕자>나 <개미>같은 영화들은 ‘드림웍스 표’ 애니메이션이지만 디즈니 영화와는 하여튼 달라야 한다는 강박과 그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현실적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슈렉>은 그 작업에 내공이 만만치 않게 쌓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디즈니 영화와의 차별화라는 강박증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듯 하고, 관습화한 틀을 뒤집고 비트는 농담의 천연덕스러움도 재미를 줄만한 수준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동화적 낭만과 판타지를 지키되 그것을 자유롭게 넘어서는 발랄한 좌충우돌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를 떠올리게 하는 동화 속 그림이 계속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그 그림을 부욱 찢어 화장실 휴지로 쓰는 첫 장면의 황당함은 바로 <슈렉>이 내세우고 있는 비장의 전략을 압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슈렉>이 목표로 삼고 있는 대상은 아이들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떨떠름하게 보고 있는 어른들이다. <슈렉>의 농담과 웃음은 어른들과 제대로 한판 붙어 보자며 유혹하는 ‘영화의 페르몬 향기’인 셈이다.

 세상이 편안할수록 사람들은 뭔가 색다른 일을 찾는다. 자극이 강할수록 재미와 희열은 더 한다. 그런 보상이 없다면 수많은 모험과 도전은 정신 나간 사람들의 시간 죽이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험과 도전을 누구보다도 반가워하는 사람의 목록을 만든다면 첫째나 둘째자리를 차지할 사람은 영화제작자다. 괜찮은 모험거리가 있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사람들이니까. 다만 진짜 모험가들과 다른 점은 직접 실행하기 보다는, 그것을 보여주는데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모험을 팔아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티칼 리미트>는 모험영화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두루 갖췄다. 에베레스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 K2의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크레바스, 모험을 사랑하는 가족, 사고에 대한 잔인한 기억,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목숨조차 아끼지 않는 집념과 용기, 돈 많은 사업가의 야심과 오만, 그로 인한 또 다른 위기---.구색이 두루 갖추어지면, 결말 또한 구색에 맞게 예정된 수순을 밟는다. 허왕한 오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뼈저리게 깨달은 후에, 대가를 치를 사람은 치르고 어떻게 해서든 위기는 수습된다. 위기는 여러 사람들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잃었던 연대를 찾아주기도 한다.

 세계 최고의 산악인으로 불리는 아버지 로이스는 아이들 피터와 딸 로이스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암벽 등반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하나의 로프에 매달린 아버지와 아들 딸. 아버지는 가족 전부가 죽을 수 있는 위기라는 것을 알고는 아들에게 로프를 자를 것을 명령한다. 주저하는 아들, 이를 말리는 딸, 시간을 놓치기 전에 실행할 것을 독촉하는 아버지. 결국 아들은 로프를 자른다. 그로부터 3년 후.

 부유한 사업가인 본은 회사 홍보를 위한 이벤트로 세계 최고의 난코스로 불리는 K2 등정을 위해 세계 각지의 산악인을 불러 모은다. 방송 다큐멘타리 리포터로 등반대에 합류한 동생 애니를 우연히 만나는 피터. 그러나 동생은 3년 전의 사고를 잊지 못한 채 오빠를 용서하지 않는다.

 어쨌든 등반대는 구성되고, 전문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강행한다. 결국은 악천후에 휩싸이는 등반대. 자연을 우습게보며 오만을 앞세우는 인간들에 대한 산의 징벌은 냉혹하다. 베이스캠프는 절망에 빠지지만 희미하게 들려오는 조난 구조신호. 누군가 살아있다는 표시다. 동생의 안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던 오빠 피터는 서둘러 구조대를 구성한다. 조난자들이 생존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22시간. 그러나 조난 지점까지의 최고 등반 기록은 27시간.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이 정도의 구색이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명확하다. 영화는 새로운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 예정된 결말을 설정하고 어떻게 그곳까지 도달하는 가에 초점을 맞춘다. 구경거리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도 만만하지는 않다. 눈 덮힌 산에서 악당들과 한판 액션을 벌이는 <클리프 행어>나 K2 등반대의 처절한 사투를 그린 <K2>같은 영화들이 보여주었던 스펙터클과 어떻게 차별화하는가라는 점은 넘어야 할 또 다른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만한 영화’는 한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큰 위안이다. 제작자가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이유이고, 덕분에 관객들은 계속 영화를 볼 수 있으니까. <버티칼 리미트>는 충분히 볼만한 재미가 있다. 비디오로 보기에는 시원한 맛이 덜하다는 사실만 뺀다면.

 

글/ 조희문 (상명대 영화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작성자조희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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