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민의 테마에세이]18년 전 2월 그리고 지금
본문
"어울려 지내던 긴 세월이 지나고, 또 다시 우리는 세상으로 나왔네. 친구여, 그대 가는 곳 사랑 있어 좋으리. 마음에 한가득 사랑 담아 가소서……."
아마 이 노래는 그 당시에 막 알려지기 시작했던 곡이었을 거다. 고교 졸업식을 전후해서 모두가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는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구나.
"학력고사"라는 절대적 잣대 안에 우리가 묶여 있던 시절이었지. 누구는 1등급, 누구는 5등급, 어느 누구는 10등급……, 학업 석차를 묶음으로 나타내던 그 "등급"이라는 말은 개개인의 인생까지 결론짓는 절대자인 양 우리들 머리 위에 군림했던 게 사실이다.
갈 만한 대학 그리고 원하던 전공에 대한 고민과 갈등은 매일처럼 우리의 두뇌를 마비시키곤 했지. 그러면서도 캠퍼스라는 상징성과 성인이 된다는 해방감을 앞세우며, 숨막히던 현실을 남몰래 위로하곤 했었다.
책임질 방법도 모르는 사소한 일탈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조금씩 스스로의 사회화(社會化·socialization)를 만들어 가고 있었지. 그래, 우리는 기성세대가 가르쳐 주지 않던 이 사회의 존재 법칙을 스스로 깨우치려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캡틴 큐", "나폴레옹", "삼바 25" 등의 제품명으로 떠오르는 그 시절의 추억을 너 또한 기억할 수 있겠지? 우리는 몰래 그 술들을 마셨었다. 물론 부모님의 눈을 피해, 선생님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말이다.
왜 그랬을까? 술이라는 게 꼭 필요하지도 않던 청소년기였는데, 왜 우리는 술 몇 병과 담배 몇 개비에 그렇게도 열광하며 기뻐했을까? 우리한테는 "1등급"이니 "6등급"이니 하는 성적의 잣대가 너무도 우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꿈을 얘기하고 싶었지. 미처 털어놓지 못했던 장래희망이 무엇이었는지, 서로가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지, 가족의 의미라는 게 진정 무엇인지, 타오르던 이성에 대한 관심과 성(性)에 대한 호기심 등, 그 모든 것은 우리들에게 학업보다 더 알고 싶던 절실한 내용들이었다.
짝사랑에 대한 열병 역시 빼놓을 수 없겠지. 우리는 17세의 어린 나이가 아니라, 17년만큼 살아온 인생의 최대 고비를 견디며 그 모든 욕망들을 나름대로의 눈치 속에 억누르고 있었던 거다. 금지할수록 깨버리고 싶은 욕구와, 지시 받는 만큼 거부하고 싶었던 수많은 이유들 - 그건 나이가 좀 들었다는 지금의 관점으로 무시해버릴 만한 일이 절대 아니었다고 나는 믿는다.
선생님의 수업 내용보다는, 수업 내내 여기저기에 떠돌던 3류 외설잡지가 더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곤 했지. 문법 공부보다는 팝송가사 외우는 게 더 즐거웠고, "국민교육헌장"보다는 감수성을 건드리던 시 한편이 더 가슴에 남겨졌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쓸쓸하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한 게 아마 그 무렵이었겠지.
다른 어떤 재주가 있다 해도, 1980년대의 대한민국에서 청소년들을 평가하던 절대가치는 무조건 학력고사 점수였다. 개개인의 특기를 헤아리기 이전에, 340점 만점에서 몇 점을 받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값어치가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 구분되어지던…….
하지만 친구야!
우리는 그런 토양 속에서도 헤르만 헤세를 얘기했었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임마뉴엘 칸트의 인식론이 어쩌고, 니체의 초인철학이 우리네 인생에 어떤 값을 전해 줄지에 대해 밤늦게까지 개똥철학을 떠들곤 했다.
그래, 개똥철학이었지. 그 어린놈들이 뭘 안다고 인생의 깊이나, 삶과 죽음의 철학에 대해 논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솔직히 고백하련다. 그 당시의 내 모습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살아 본 삶이 그 이후엔 없었다는 것을.
어느 날이었던가? 너하고 늦은 밤까지 대화를 나누고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밤 11시가 조금 넘었던 시간이었다고 기억되는구나. 나는 집에 오자마자, 집안의 절대군주였던 아버지한테 거의 죽을 만큼 혼난 적이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밤늦게 싸돌아다니다가 이제야 집에 왔다고.
내가 나만의 인생을 선택하게 된 건 아마 그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에게 내 운명을 맡기지 말자고, 내 인생은 내 이름 석 자의 의미로 살고 싶다고. 아니,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대학에 간 선배들이 왜 공부는 안 하고 데모를 하는 건지, 보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화염병을 왜 던져서 최루탄 냄새를 거리 위에 남겨야 하는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 대통령을 왜 물러나라고 외치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몰랐고 그저 궁금하기만 했다.
그래, 그 이후부터 내가 집안의 틀을 벗어나, 인생의 꿈을 마음껏 떠들 휴식처를 만든 건 우리의 대화 공간밖에 없었다. 대학에 간 이후에도 우리는 열흘이 멀다하며 만났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구나. 호출기나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인데, 어떻게 정확한 약속을 정하고 그만큼 자주 만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얼마 전 네가 보내 준 편지 내용과 같이, 지금은 골치가 아파 언급하기도 힘든 주제를 가지고 우리의 토론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 서로 마주앉은 술자리에선 썩은 세상을 몇 번이나 뒤집었다가 뜯었다가 재조립하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했었지. 만남의 반가움마저 사치라는 듯, 우리는 늘 마주앉자마자 그 날의 본론으로 직행하곤 했다.
이상과 현실의 편차는 너무나도 컸다. 도저히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을 만큼이었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술잔을 다시 채워서 입 안으로 털어 넣곤 했었다. 시간마저 많지 않음을 절실하게 느꼈기에, 한마디로 "치열함"에 몰두했던 것이지.
절대로 썩은 기성세대처럼 되지 말자는 각오를 반복하고 또 되씹어대던 우리였는데……. 그랬던 우리가 이젠 그 기성세대의 나이가 되어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볼펜으로 꾹꾹 누르며 쓰던 편지가 아니라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인터넷을 넘나드는 첨단 시대인데, 그때의 기억을 자꾸 불러내는 일이 무슨 소용 있을까 싶기도 하구나.
내가 군대에 갔다 오고 뒤이어 네가 군 입대를 하는 바람에, 우리의 공백은 긴 시간을 비워놓아야 했었지. 그 이후로 네가 어디쯤에 근무한다는 소식을 희미하게 듣곤 했지만, 눈앞의 현실이라는 게 먼 길을 찾아갈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만들기만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재회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정확히 십 년이 걸렸구나. 인터넷이라는 문화가 아니었다면, 정말 그것마저 없었다면 앞으로 십 년을 더 보태야 이루어질 기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야!
나는 그 당시와 똑같은 마음으로 너를 부른다. 너와 내가 각자의 자리에서 전혀 다른 삶을 지탱하고 있다 해도, 우리의 만남은 변한 게 없는 그대로의 모습일 거라 믿는다. 정겨운 욕 몇 마디만 주고받으면, 우리는 당시의 그 마음으로 일순간에 돌아가 앉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
사사로운 핑계를 앞세우며 너를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한 건 정말 후회로 남겨진다. 이젠 자기 인생의 얼굴에 책임마저 짊어져야 할 마흔의 나이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재회의 기쁨에 들떠서 환호성을 지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간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벌써부터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간 벗들의 소식이 줄을 잇는 걸 보니, 우리의 나이도 인생의 반환점을 훌쩍 지나친 느낌이 씁쓸하게 들곤 하지.
그래도 살아 있음으로 인해 이렇게 재회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황홀한 기쁨이냐! 그냥 크게 웃고 싶구나.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 펴고 아주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지르고 싶을 뿐이다.
네가 지금 잠시 외국에 나가 있다고 했지. 귀국이 언제쯤인지 얘기해라. 우리가 즐겨 찾던 대학 시절의 단골집이 지금도 계속하고 있더군. 거기에 같이 가서 우리의 십 년 공백을 말끔히 지워버리기로 하자.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는 이유가 뭘까. 그 날의 만남이 미리부터 기대되는 까닭인 모양이다. 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작가의 인생인데, 내 마음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을 정도가 됐군. 그래, 긴 얘기가 뭐가 필요하겠냐. 이 한마디면 더 할 말이 없는 것이겠지. "허허허, 자식, 정말 반갑구나!"
채지민 (시인·소설가)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