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민의 테마에세이]
본문
2003년 새해에는
제야의 종은 이미 울렸습니다.
그리고 변함없는 성급함처럼 시간은 유유히 흘러갑니다.
신년 목표를 적었던 종이가 벌써부터 누렇게 퇴색되는 건 아니겠죠.
숲 속의 공기를 심호흡하듯 새해의 상쾌한 느낌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지나온 날보다 남겨진 날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2003년 새해는 웃음 지으며 지낼 일이 참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신문을 펼쳐들고 기분 좋게 덕담 나눌 수 있도록,
저녁 가판대의 내일자 신문 기사 제목을 보며 절로 흥이 나도록,
방송 뉴스를 들으며 한숨보다는 감동 받을 일이 아주 많아지도록
언제나 기쁨에 가득 찬 삶의 언어만으로 한해가 영글었으면 합니다.
2003년 새해는 함께 마주보며 기뻐할 일들이 정말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과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더욱 반갑게 인사 나누고,
연락한 지 오래된 벗들과의 재회가 연이어지며,
풋풋한 추억으로 간직된 지난 시절 누군가의 행복한 소식도 들렸으면,
가족의 건강 그리고 가깝고 먼 곳의 우정과 사랑이 지속되도록
올 한해의 우리 몸에는 활력과 설렘과 포근함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2003년 새해에는 감동 받을 일이 무척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월드컵 4강의 신화를 늘 기억합니다.
골을 넣은 우리 선수들의 환호와 그 기쁨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가 있죠.
새해는 우리의 얼굴에도 그 웃음과 환호가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고 목표가 달성되며,
진실한 염원이 결실을 맺고 사사로운 앙금들이 사라지며
모두의 얼굴에서 성취의 웃음꽃이 듬뿍 전해지기를 정말 기대합니다.
하지만 새해에는 이런 것들이 반드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민족을 분할하려는 세력들의 긴장 조성과 치졸한 지역 감정 조장,
출신 성분을 따지는 학연과 지연과 인맥과 파벌,
황사 먼지와 같은 기득권층의 만행이 사라져서
모두의 가슴에서 해묵은 찌꺼기들이 깨끗이 지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립싱크 같이 입만 벙긋거리며 겉모습만 화려해지는,
앵무새 입놀림 같은 거짓의 문화도 말끔히 청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겐 절대 잊어선 안 될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기회만 좇아 유권자와의 약속을 배신했던 정치철새들이 누구였는지,
이 대지에 두 소녀의 한 맺힌 핏물을 스며들게 만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 모두는 단 한순간도 자존심의 눈을 감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같은 국민의 심장에 총칼을 들이대고도 고개 들고 활보하는 그 얼굴들,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을 해먹고도 나 몰라라 살고 있는 그 인간들,
서민의 작고 소중한 꿈마저 강탈해가는 모리배들이 진정 누구였는지를
우리는 절대 잊지 말고 새로운 응징의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2003년 연말에는 이런 뉴스와 기사가 풍성하게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남북한이 실질적인 민족통일을 위한 대장정에 돌입했다는 소식,
서민경제가 안정되고 부의 공평한 분배가 확실하게 실시된다는 소식,
‘장애우’라는 용어마저 사라질 만큼 모두가 하나로 살게 됐다는 소식,
불치병을 치료할 첨단 의학 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확고한 제도가 완비되고 실시된다는 소식,
노숙자가 사라지고 건전한 소비운동이 정착됐다는 소식,
우리의 젊은 선수들이 세계 곳곳에서 우승도 하고 선전을 벌인다는 소식,
불의를 저지르면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소식들이
신문 지면마저 모자랄 만큼 가득 채워지는 그런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아하는 단어들을 흰 종이 위에 하나씩 적어 봅니다.
‘사랑’, ‘희망’, ‘도전’, ‘성취’, ‘평화’, ‘평등’과 같은 언어들이 이어집니다.
그 말들이 이상향 저편의 신기루가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에 뿌리를 내리는 결실의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지만 갈 길은 아직 멉니다.
주저앉아 한숨지을 시간도, 후회한다고 드러누울 여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아름답게 성취하고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달리고 또 달리며 저쪽 끝의 목표 지점을 바라봐야 할 일입니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조금만 더, 조금 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샴페인을 아무 때나 터뜨릴 순 없습니다.
가장 소중한 얼굴들과 함께 축배를 나눌 그 순간을 위해,
우리는 2003년의 365개 계단을 힘차게 딛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계절이 바뀌다 보면 변함없이 낙엽이 지고 첫눈이 내리겠죠.
캐롤송이 울리며 2003년이 끝나갈 시간은 순식간에 다가올 겁니다.
그 무렵이 되면 우린 무엇을 어떻게 실천한 한해라고 기억해야 할까요?
답은 이미 스스로의 가슴과 마음 안에 적혀 있을 겁니다.
앞만 보고 뛰어가다 지치면
잠시 어깨동무를 할 벗들이 곁에 있기에 외롭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2003년 한해 동안 이 한마디는 절대 잊지 말고 간직하기로 하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네, 그렇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젠 바로 당신, 그대를 위한 샴페인을 함께 준비할 차례입니다.
글 채지민(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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