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순택의 사진이 사람에게]청계천 흐림
본문
한때는 정겨운 빨래터이자, 연날리기 놀이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던 청계천은 1920년대 일본에 의해 복개가 시도됐다. 일본은 청계천의 오염 때문에 전염병이 나돈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겪으면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 하려는 야심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대경성 프로젝트"를 짜고 1936년에 밑에는 지하철, 위에는 고가도로를 놓는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데 이어 1937년에 청계천 상류인 광화문 사거리∼광통교 구간의 복개를 진행했다.
그러던 것을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1958년부터 복개공사를 재개하고, 박정희 정권이 1963년 12월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어 1966년 "불도저"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현옥 서울시장이 청계고가를 건설하면서 청계천은 지하의 하수와 지상의 도로, 그 위의 고가도로라는 오늘날의 3층 구조를 갖추게 됐다. 일본의 시나리오가 그대로 적중한 셈이다.
청계천 주변은 그 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서민들의 질퍽한 삶의 애환이 소통하는 "광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청계천로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래상가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과 상품의 오고감으로 바빴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가장 싼값의 물건 뒤에는 가장 싼값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개발독재 시절 청계천 주변의 영세공장들은 저임금 고강도 노동의 신음터였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평범한 요구를 위해 제 몸을 불살랐던 청년 전태일 역시 청계천의 노동자였다. 그 스스로가 "또다른 전태일"이었던 청계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운동의 기수가 된 "청계피복노조"가 꾸려지고, 군사독재를 긴장시킨 가열찬 투쟁이 벌어진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때문일까? 1990년대만 해도 청계천과 동대문 인근은 전민련, 전노협, 민가협, 전국노점상연합회 등 굵직한 운동단체들이 자리를 튼 "재야1번지"였다.
사람이 넘쳐나고, 물건이 넘쳐나기에 청계천에서는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의류시장 외에도, 전기전자, 카메라, 헌 책, 골동품, 보석, 공구상가들이 구름처럼 모여있기에 "운집"이란 말이 딱 맞다.
한때 "청계천 전기수리 기사들만 단합하면 인공위성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으니, 그 나름의 자신감도 만만찮았던 듯하다.
그러나 이 청계천의 풍경도 조만간 사그라들 운명에 놓였다. 대신 "맑은 강이 흐르는 생태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한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주장"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한편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개발독재 시대를 대표했던 건설회사 "현대건설"의 회장님을 지낸 이 시장의 별명 "계엄사령관"에서 1966년 김현옥 시장의 별명 "불도저"가 연상되는 건 왜일까? 하긴 짓는 것도, 부수는 것도 "불도저"가 해야 할 일이긴 하다.
이 어설픔들...
청계고가 철거를 한 달여 앞둔 5월의 막바지. 차 없는 청계고가 위를 걷는 행사가 짧은 시간동안 열렸다. "곧 있으면 차량통제가 끝난다"는 경찰의 다그침에도 아랑곳 않고 한 노인이 의족과 지팡이에 기댄 채 청계천의 마지막 향수를 느끼며 느리게 걷고 있다. 노인은 끝내 경찰차에 "모셔져" 앞쪽으로 "옮겨졌다".
빠름아, 빠름아, 느림이 좀 놔두면 안되겠니?
노순택 / 다큐멘터리 사진가. imagepress.net 편집장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