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2월에서 3월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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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바둑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남쪽 바닷가 비자림 근처에 사는 할아버지 집에 있었어.
할아버지는 바둑판을 만드시는 분이거든. 맞아. 난 바로 할아버지 손에 의해 태어난 바둑판이야. 평생 그 일만 하셨으니까 할아버지가 만든 바둑판은 셀 수도 없이 많아. 그래도 곁에 두고 아끼는 건 나 하나 뿐이야. 할아버지는 나를 아주 특별히 여기시지. 나를 본 사람들이 아무리 졸라도 할아버지는 “돈을 받고 파는 물건이 아니라오.”하면서 고개를 저으셨어.
겨울 한복판에 있던 찬바람의 변덕에 사람들이 덩달아 종종 걸음을 치는 세밑이었어. 대학교에서는 이번에 치른 입학시험의 합격자를 발표하기 시작했지. 말씀은 안하셨지만 할아버지도 간절히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어. 하루면 몇 번씩이나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다시 놓아 보고 수화기를 들어 귀에 대보고는 하셨으니까.
하지만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전화는 좀체 오지 않았어.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더니 아주 일손을 놓고 전화기 옆에 붙어 앉으셨지 뭐야. 마침내 할아버지는 수화기를 들고 숫자를 꼭꼭 눌러 대는 것이었어.
“내다. 어떻게 됐냐?…… 그러냐…… 알았다……”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한참 동안 망망히 펼쳐진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 보셨지. 그리고는 늘 닦고 또 닦아서 얼룩 하나 없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나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어. “처음 겪는 어려움이라 상심이 클 게야. 맡아 놓은 일이 바빠서 가 볼 수도 없고...... 대신에 네가 가 줘야겠다.”
할아버지는 나를 튼튼한 상자에 꼭꼭 싸더니 택배 회사에 연락하셨지. 물론 특별히 조심해서 다루라는 당부도 함께. 그렇게 난 이곳으로 오게 됐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정을 붙이지 못할 것 같아. 할아버지처럼 나를 애지중지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집 식구들은 아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걸. 내가 도착했을 때 아줌마가 열어 보고 상자가 벙긋이 열린 상태로 한쪽 구석에 처박아 놓더니 끝이야. 할아버지 봤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그나마 다행이 바로 유리창 앞이라 햇살을 함북 받을 수 있다는 게 좀 위안이 되지만. 밝은 햇살을 받고 있으면 선명히 드러나는 내 몸의 실금에서 정말 피가 도는 것 같거든. 하여튼 난 몹시 기분이 상하지만 이 집 분위기가 너무 엉망이어서 당분간 그냥 참아 주기로 했어. 이 집 식구들은 참 이상해. 이 집에는 아저씨, 아줌마, 큰아들 대성이, 막내 지성이 이렇게 네 식구가 사는데 말이야. 말 안하고 누가 오래 견디나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고. 아저씨만 아침에 출근을 하고 아줌마는 안방에, 대성이는 가운데 방에 꼭 박혀서 한나절이 돼도 꼼짝을 않거든.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지성이만 안달이 나서 안방이랑 가운데 방을 번갈아 기웃거려 보지만 결국은 소리나지 않게 조심조심 요즘 유행하는 팽이나 돌리며 혼자 논다니까. 지성이가 팽이에 톱니 같은 플라스틱 줄을 끼워 드르륵 잡아당기는데 아줌마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어.
“뭐 하는 거야? 너도 형처럼 되고 싶어서 그래!”
아줌마는 대뜸 호통부터 쳐 대지 뭐야. 그 바람에 조준이 빗나간 팽이가 비그르르르 돌면서 내 위로 툭 떨어졌어. 아유, 난 몰라. 맨들맨들한 내 얼굴이 곰보가 됐나 봐. 그런데도 나한테는 아무도 신경을 안 쓰네. 할아버지라면 나부터 살피실 텐데… 할아버지 손길이 너무도 그리워. “얘! 너 가서 두통약 좀 사와.”
쳇, 아줌마는 또 두통약 타령을 하며 지성이 들을 밀어 내보내고 있잖아. 이 집 식구들은 두통약을 밥보다 더 좋아한다니까. 밥은 거르면서도 두통약은 꼭꼭 챙겨 먹거든. 두통약을 먹은 아줌마는 “배 고프면 냉장고에서 뭐 꺼내 먹고 시간 맞춰서 학원 가.”하고는 도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어. 매사가 귀찮다는 표정이야. 다음엔 가운데 방에서 대성이가 나왔는데 덥수룩한 수염에 꾀죄죄하기가 꼭 노숙자 꼴이라니까.
“혀엉! 뭐 먹을래?”
지성이가 먹던 과자 봉지를 쭈볏쭈볏 내밀었지만 대성이는 대꾸도 않고 아줌마가 남겨 놓은 두통약만 몇 알 삼키고는 휭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어. 또 지성이 혼자 몇 시간을 왔다 갔다, 들락날락, 텔레비전보고, 간식 먹고, 팽이 돌리고… 저녁에 아저씨가 돌아왔지만 말이 없기는 아저씨도 마찬가지야. 10시가 넘었어. 아저씨가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점점 거칠어졌지. 텔레비전을 보던 지성이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제 방으로 들어가고.
아줌마는 물을 마시는 척 자주 방에서 나와 보더니 아저씨 곁으로 다가와 울먹였어.
“여보! 대성이가 아직도 안 들어 와요.”
“그러게 어지간히 좀 하지. 당신이 그러고 있는데 집인들 편하겠어.” 아저씨는 담뱃불을 붙이며 퉁명스레 내뱉었지.
“누가 일부러 그래요? 나도 내 마음을 어쩌지 못하겠는 걸. 당신도 알지요? 내가 그 애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고 기대를 했었는지. 그게 다 허사가 됐으니....... 살맛이 안나요. 내 꿈과 희망이 다 무너졌다구요.”
“당신이 너무 욕심을 부린 거야. 그 녀석 가고 싶다는데 가게 하지 뭐하러 그렇게 고집을 부려. 이제 뭘하든지 저 하고 싶다는 대로하게 해 줘요.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그놈이 더하지.”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12시가 지났어.
“어떡해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좀 나가 봐야겠어.”
아줌마의 안달에 아저씨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지. 잠시 후 엘리베이터 열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아니 이 녀석이! 이게 무슨 꼴이얏!”아저씨의 외침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겠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술에 취한 대성이가 끌려들어왔지.
“아주 고주망태가 됐어. 엘리베이터 안에 널브러져 있지 뭐야.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원…”
“이 녀석아! 어쩌자고 아직도 정신을 못자리고 이래, 이러길! 으응?”
아줌마는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대성이의 등을 철썩 철썩 두드리며 울음을 터뜨렸어.
“그럼 내가 뭘 해! 벌써 졸업은 했고 이젠 갈 데도 없는데. 난 이제 아무것도 할 게 없단 말이얏!”
그 큰 덩치를 들썩이며 대성이도 꺼윽 꺼윽 울음을 쏟아 놓더군. 그래, 대성이는 이번 대학 입시에 떨어진 것이었어.
“아이고, 내가 못살아. 못살아!”
“왜들이래? 세상이 끝장 나기라도 했어?”
아저씨가 뭐라 하건 말건 아줌마와 대성이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지. 그 바람에 잠이 깬 지성이도 나와서 멀뚱히 서 있었고. 폭풍우처럼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다음 날이었지. 한낮이 지나도록 방문들은 굳게 닫혀 있고 집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지. 지성이 조차도 제 방에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저 남쪽 바닷가에 사는 할아버지가 들이닥친 거야.
난 할아버지를 보자 가슴이 콱 메어 왔어. 마음 같아선 그간의 일들을 죄다 일러바치고 싶었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어수선한 집안만 보고도 다 아시는 것 같았어.
“이런 이런… 쯧쯧쯧쯔.”
할아버지는 더는 아무 말씀도 안하고 대성이와 아줌마의 손을 꼭 잡아 주셨어. 그날 저녁 식구들이 다 모이자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지.
“내가 보낸 것 잘 받아 놓았겠지?”
아저씨가 얼른 거실 구석에 내박쳐 있던 나를 할아버지 앞에 갖다 놓더군.
“이걸 너희에게 물려주려는데… 물건이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만이 임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헌데 너희들이 그럴 만 한지. 어디 아는 대로 얘기해 보련?”
“그런 이게 삼백년이 넘은 비자나무로 만들었다는 그건 가요? 맑고 부드럽고 은은하네요”
아저씨가 떨리는 손으로 나를 쓸어 보며 말했어.
“그러냐? 원래 비자나무 바둑판이란 흠이 하나도 없어야 최상품이라고 말들을 하지. 그러나 흠이 있으면 그 가치는 뚝 떨어지고 만단다. 대성이 너는 이걸 어찌 생각하느냐?”
할아버지의 그윽한 눈길을 받은 대성이가 떠듬떠듬 말을 꺼냈어.
“그렇다면 이건 최고품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실금이…”
“그렇겠지? 하지만 이건 앞으로 또 나오기 어려운 최고의 명품이다. 흠이 있고 없고 만을 따진다면 이건 아주 하품일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기준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이 실금때문에 최고의 명품이 된 거야.”
“예에?”
식구들은 눈이 휘둥그래서 할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어.
“이 금도 처음에는 분명 상처고 흠이었겠지. 그런데 이건 그 상처를 치유해 제 살로 만들었다. 이 실금들은 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여 이겨낸 자국이다. 대성이 잘 들어라. 이 세상에 상처가 없는 것은 없느니라. 하지만 자기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니?”
대성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 할아버지는 아저씨 아줌마에게로 눈길을 돌리셨어.
“부모는 자식에게 그저 거름이 되어 줄뿐이다. 자식을 억지로 너희들 뜻에 맞추려고 하지 마라.”
바로 할아버지는 남쪽 바닷가로 돌아가셨지만 소리 없는 봄바람이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것처럼 이 집에는 변화가 생겼어. 우선 말 한하기 게임을 그만 끝내기로 했나 봐. 꼭꼭 닫아걸었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시작했는 걸. 어느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게 보여. 햇살이 유리창에 참 고운 빛 무늬를 그리고 있거든. 곧 하늬바람도 연둣빛 소식을 가지고 와서 창문을 두드릴 거야.
글/ 정진숙(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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