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의 부활을 꿈꾼 작은 거인 "미셀 페트루치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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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페트루치아니 |
1999년 1월 6일 프랑스는 단 한 사람, 당대 최고의 재즈피아니스트였던 미셀 페트루치아니 의 별세를 애도했다. 그는 국제적인 재즈 학교를 프랑스에 설립하는 꿈을 접은 채 36년간의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는 지난 20년간 가장 파워풀한 재즈 피아니스트였고 정력적인 빠른 템포의 연주, 뛰어난 기교로 청중들에게 지금까지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열정과 흥분을 선사했다. 또한 그가 남긴 열 두 장의 앨범은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쟈크 시락 프랑스 대통령은 장례식에서 "열정적인 예술, 용기있고 음악의 천재였던 페트루치아니는 자신을 바치고 재즈를 부활시켰다"고 찬사를 바치며 페트루치아니야말로 모든이의 표상이라 칭했다.
체형의 불리함을 딛고 재즈피아노 거장으로 발돋음
미셀 페트루치아니는 칼슘 부족으로 뼈가 골절되기 쉽고 성인 체격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골형성 부전증을 안고 태어났다. 다 자란 키와 몸무게가 단지 3피트 (90센티)와 65파운드 (약 29.5Kg) 이였고 일생 동안 수많은 뼈 골절을 당해야 했다. 부러지기 쉬운 뼈로 인해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무대 위로 옮겨져야 했고 페달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페달과 발을 연결하는 특수장치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불쾌한 과정들은 연주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지칠 줄 모르는 활력과 열정으로 연주했다.
그는 1962년 12월 프랑스 오랑쥬에서 이탈리아인 아버지 앙투안 페트루치아니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즈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클래식 피아노와 음악을 공부했던 그는 일찌감치 뛰어난 재능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소장한 재즈음반을 자연스럽게 접했는데 말을 알게 되면서 재즈곡을 흥얼거리고 음반으로 들은 곡을 곧바로 재현할 만큼 재능이 특출했다.
어려서부터 집밖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또래 친구들이 바깥에서 노는 동안 많은 시간을 피아노 연습에 몰두했다. "나는 하루에 다섯 시간 혹은 여섯 시간 피아노 앞에 서있었다. 여러 해 동안을 그렇게 했다고" 그는 말한다. 학교도 다닐 수 없어 가정에서 모든 교육을 대신했지만 3개 국어에 능통했고 수학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음악 이력은 가족밴드의 일원이었던 형 필립, 루이를 따라 장난감 드럼을 연주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네 살 때 텔레비젼에서 재즈의 거장 듀크 앨링턴의 연주회를 본 것을 계기로 재즈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 그가 처음 맛보았던 것은 좌절이었다. 아버지가 처음으로 사준 피아노가 장난감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자신의 피아노 소리에 실망했다. 그는 그것은 내가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소리가 아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인근 군기지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한 영국 군인이 잊고 있던 낡은 피아노를 집으로 가져왔다. 미셀의 연주력이 향상되면서 일곱 살 때는 아버지가 친분 있는 의사로부터 더 좋은 피아노를 가져왔다.
8년 동안 그가 사용한 피아노는 재즈피아노가 아닌 클래식 연습용이었다. 그는 8년 동안 고전음악을 공부했지만 즉흥연주를 좋아했고 자신만의 음악을 작곡하기 위해 재즈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연주를 목격하고는 다시 한 번 한계를 느껴야 했다. "그의 손가락은 벅스 버니의 만화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내가 그처럼 훌륭해지지 못할 것이란 것은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재즈 연주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그만큼 그에게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의 음악 경력 초기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열 살 때 알게 된 재즈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였고 곧 그의 연주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대신 바흐, 드뷔시, 라벨, 모차르트와 바르토크에 대한 사랑은 보류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훗날 우상이었던 빌 에반스와 비견되는 연주가의 반열에 오른다.
나는 천재를 믿지 않는다 열심히 연주할 뿐이다
최초의 데뷔는 13세 때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열린 연례 야외 재즈 페스티벌에서였다. 그 해의 게스트였던 트럼페티스트 클라크 테리의 피아노 반주자로 미셀이 천거됐지만 클라크는 그를 단지 어린 아이라고 생각했고 필시 누군가가 놀리는 것이란 표정을 지었다. 주변에서 박장대소하며 놀려대는 동안 클라크는 혼을 집어들고 놀림에 응답하듯 "농담 투우 음악"을 연주했다. "그 때 나는 "블루스를 연주합시다"라고 외쳤다. 내가 1분 동안 연주하자 그는 내게 손을!이라고 외쳤다. 그는 나를 껴안았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페트루치아니는 무대 위에서 연주를 계속해야 했지만 가운데 세 손가락은 힘차게 움직였다.
이미 그는 프랑스 도처 그리고 유럽 페스티벌에서 직업적인 연주를 하고 있었다. 16세 때 파리로 이주했고 1980년 형 루이를 포함한 트리오와 함께 첫 앨범 플래쉬를 발표했다. 이제 스타의 반열에 근접한 그는 미국인 알토 색소폰 주자 리 코니츠와 듀엣을 이루어 프랑스를 순회하며 연주했다. 파리는 음악적으로 젊은 재즈 스타에게는 이상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파리 생활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 약물과 수상한 여자들과 함께 지냈다. 그러나, 나는 행운이었다. 콘돔을 던져 버렸다."
그는 18세 때 뉴욕으로 갔다. 항공권을 구입할 돈조차 없을 정도로 궁핍한 상태였다. 뉴욕의 연주 활동에서 충분한 돈을 벌자 다시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그곳에서 뉴멕시코 태생인 두 번째 아내 어린다를 만났다. 그 때 또 하나의 중요한 인연 테너 섹소폰 연주자 찰스 로이드를 만났다. 그는 유행에 뒤처졌다는 평가에 연주를 중단하고 재즈 현장에서 오랜 동안 사라진 상태였다. 찰스로이드의 제안으로 페트루치아니는 퀄텟(4중주)을 구성했다.
이후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여기저기에서 호평을 불러일으켰고 3년간 세계를 횡단하며 연주했다. 그들은 1982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 출연 우수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83년 LA타임즈는 페트루치아니를 "올해의 재즈맨"으로 선정했고 이탈리아 정부 문화성은 "최고의 유럽 재즈 음악인"으로 선정했다. 프랑스도 이에 뒤질새라 명성 높은 "장고 라인하르트상"을 수여했다. 1984년 그의 솔로 앨범 "100 Heart"는 프랑스판 그레미상 "그랑프리 드 디스크 - 프릭스 보리스 비앙상"을 수상했다. 이후부터는 각종 국제 대회에 참여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자신의 어쿠스틱 키보드와 아담 홀츠만의 신시사이저와 결합한 퀄테트를 이끌었다. 특히 1986년에서 1994년 사이에 세계적인 재즈 레이블인 블루노트와 7장의 앨범을 냈는데 그는 블루 노트가 재즈의 부활을 내걸고 재탄생하면서 전속 계약을 체결한 최초의 뮤지션이었다. 프랑스는 1994년 그의 이런 활동에 대한 치하로 레종 도뇌르 훈장을 서훈했다.
그는 사망 시까지 솔로로 빈번히 순회 공연을 했고 90분 혹은 그 이상 오래 지속하는 연주를 자주했다. 가장 최근의 앨범작업은 프랑시스 드레퓌스 레이블과 함께 해왔다. "나는 천재를 믿지 않는다. 나는 열심히 연주하는 것을 믿는다. 일찍부터 나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내 앞에는 해야할 일을 위한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다. 결국 나는 75세가 되었을 때 내 임종의 책을 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약속했던 수명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1999년 1월 6일 맨하탄의 베스 이스라엘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유가족으로 아내 어린다와 두 아들을 남겼다.
미셀 페트루치아니 내한 공연, 민망했던 에피소드
페트루치아니가 내한 공연을 가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제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내 재즈팬들에게는 지명도가 낮은 편이었다.
그의 내한공연은 97년 11월 24일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열렸다. 국제문화교류협회라는 단체가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정보에 따라 마침 일본에서 공연중이던 그를 급히 섭외해 이루어진 공연이었다. 급조된 공연인 만큼 민망한 헤프닝들이 벌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과연 어떤 사건이 벌어졌던 것인지 당시 팬들의 경험담을 통해 재연해 본다.
그날 공연은 주최측이나 공연장측이나 준비가 무척이나 허술했다. 우선 골절의 위험이 많은 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페트루치아니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못한 채 손수 피아노 높이를 조정하고 애를 쓰며 의자 위로 올라서야 했고 팬들은 주최측의 배려 부족에 눈살을 찌푸렸다.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연주해야 할 피아노는 공교롭게도 줄 서너 개가 끊어져 있었다. 연주를 마친 후 그는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고 토로했다. 게다가 스피커는 어디가 이상이 있는지 터졌다 먹통이 되었다를 반복했다.
장소 선택도 문제가 있었다. 일반 공연장과는 달리 객석이 좌우로 죽 길게 늘어서 있어 관람자들이 마음 편하게 관람할 수 없었다. 한 팬은 연주자나 관객이나 고문받는 느낌의 망신살이 뻗친 연주회였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그런 여건 하에서도 1시간 30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진행된 열정적인 공연은 사소한 불만쯤은 한번에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연주하는 동안 그는 다소 고통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셔츠는 물론 겉 양복까지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공식 연주가 끝나자 팬들은 전원 기립박수로 앵콜을 청했고 현악 4중주와 어우러진 베사메무초로 한국 팬과 이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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