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문의 영화이야기] 친구, 천국의아이들
본문
1. 친구
<친구> 열풍이 거세다. 험한 세상을 쓸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관객들은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극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개봉 한달이 넘었지만 기세는 갈수록 도도하기만 하다. 지금까지 한국영화가 세운 각종 흥행기록은 <친구>의 열풍 앞에 빛을 잃어가고 있다. 작은 부자는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고 하는 말은 이 영화의 흥행을 두고 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친구>는 관객들의 손을 잡아끌며 지난 날로 돌아간다. 1970년대 중반, 세상은 유신정치의 압박으로 어지러웠지만 아이들의 시간은 어른들과 다르게 흐르고 있을 때의 부산. 준석과 동수, 상택, 중호 네명의 친구는 그들의 시간과 추억을 서로 나눈다. 어른들이 없는 집에서 포르노 테입보면서 "저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나" 하며 침을 삼키던 어린시절하며 굵은 점박이 무늬의 교련복을 외출복으로 입고 다니고, 책가방은 빵집이나 단골 가게집에 맡겨두고 수업 땡땡이치며 영화보러 다니고, 껄렁껄렁한 여학생 꼬시느라 열올리던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세상의 쓴 맛을 조금씩 맛보던 사회초년병 시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친구>는 파란만장한 사연으로 엮어낸다.
지금 40대 중반을 지나고 있을 나이의 사람들이 겪었던 지난 세월의 풍경이 옛날 사진첩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관객들이 공감하는 것은 지난날의 풍경이나 주인공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그 위에 어른거리는 현재의 내 모습을 보기 때문은 아닐까. 친구들끼리는 웃고 떠들지만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면 험악하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구박당하며 쥐어 박힌다. 꿈? 미래? 사방이 꽉막힌 감옥처럼 몸과 마음을 옭죄고 드는 현실에서 되는대로 그날그날의 생존을 버텨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하루를 살아도 어깨에 힘주고 건들거릴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할까. 그것이 깡패 노릇이고, 다른 사람 등치며 때로는 죽이기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더 망가질 것도 없는데.....
관객들이 사는 시대는 옛날과 다르지만 영화속 준석이 패거리들이 어쩔수 없이 멱살잡혀 끌려가던 그때의 현실보다 나아졌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마음에 드는 대학에 가는 일은 죽기살기로 덤벼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렵고, 겨우 들어간 대학을 비싸게 졸업해봐야 취업을 보장해주는 데가 어디 있는가. 번듯한 직장에 다닌다며 어깨를 세우던 샐러리맨들조차 언제 자기 자리가 없어질지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일이 다반사다.
30-40대에 다니던 회사에서 강제퇴직 당한채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해야 할지 한숨쉬거나 그나마 받았던 퇴직금을 사업자금으로 밀어넣었다가 이것저것 다 날려버렸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이야기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다. 그렇다고 정치나 경제전반이 제대로 돌아가기를 하나. 들리는 것은 가슴 철렁하게 만드는 소리들이고 보이는 것은 짜증나게 답답한 모습들이다. 처참하게 바둥거리는 영화속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바로 오늘의 내 모습 그대로다. 준석이가 사람죽이는 훈련을 한다며 칼을 꼬나 잡을 때 관객들도 마음 속에 누군가를 떠올리며 칼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친구>의 열풍은 뜨거운 것이 아니라 싸늘한 칼바람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판다. 답답한 현실에 대한 우울한 한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니는 내하고 친구아이가? 친구끼리는 미안한 거 업따 라며 험한 인생을 곁에서 감싸는 친구의 뜨거운 우정이 그립고, "쪽 팔리게 살고 싶지 않다"며 한껏 기개를 세우는 자존심이 비록 건달의 허세라 하더라도 새삼스럽게 부러워하는 마음들을 쓰다듬고 있는 것이란 생각도 해볼만 하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던, 관객들은 그들의 마음을 실어 보내는 것으로 속마음을 드러낸다. 영화를 얼만큼 잘 만들었는가라는 평가는 기술적인 완성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얼마나 관객들의 속마음을 끌아낼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카타르시스와 위안, 비록 그것이 영화를 보는 동안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마음 붙이기 힘든 세상에서 그나마라도 관객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친구>는 동시대의 화두가 될만하다. 하지만 다시한번 되물어보자. <친구>같은 영화가 주목받는 세상이 답답한 것인지, <친구>같은 영화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2. 천국의 아이들
"가족영화"라는 말은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가족들이 함께 보면서 즐길수 있는 영화이고 또 한가지는 가족의 의미와 소중함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들을 뜻한다. 가족들이 함께 보면서 즐길 수 있는 영화는 몇가지 전제를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는 것이란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이 폭력적이거나 성표현이 심한 경우, 대사가 일상적인 수준을 벗어난 거친 표현이 등장해서는 곤란하다. 영화의 내용이 지나치게 어렵거나 구성이 복잡해도 문제가 있다. 영화의 분위기가 어둡고 우울해도 적당치 않다. 모처럼 가족들이 함께 보는 영화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보기에 부담스럽다면 "가족적"인 분위기를 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자면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은 "가족영화"의 모범이라고 할만하다.
가난한 시절의 풍경은 이란이라고 별로 다를 것 없다. 부모는 식구들 먹여살리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지만 살림살이를 확 바꿀만한 대책은 없다. 어떻게든 그날그날을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 삶의 전부다. 지독하게도 가난했던 우리네 보릿고개 시절을 되돌아보게 할만큼 궁핍한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난에 찌들리고 주눅들기보다는 사랑과 희망을 곁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난하지만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어느 가난한 집안의 오빠와 여동생은 잃어버린 신발 때문에 속타는 가슴을 달래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민같은 것들이 향기처럼 피어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오빠 알리는 여동생 자라의 낡은 신발을 수선하러 갔다가 잃어버리고 만다. 아버지에게 신발 한 켤레 사달라고 말하면 되겠지만 오누이에게는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달란다고 선뜻 신발을 사줄 수 있는 형편도 안돼지만,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호락호락 승낙할 성격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네 나이에는 돈을 벌었어" 라며 호통을 치는 아버지가 선뜻 신발을 사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난망이다. 야속해도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 마음이 더 아프다는 걸 오누이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부모인들 자식에게 잘해주는 일에 인색할까, 아이들을 야단치는 것은 부족한 자신을 향한 자책이기도 하다. 그만큼 부모의 속마음은 쓰릴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을 잴만큼의 철이 든 알리는 아버지에게 신발을 사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 한 켤레로 두사람이 신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마침 오빠와 동생의 수업시간이 서로 다르다. 동생은 오전반, 오빠는 오후반이다. 수업이 끝나는데로 부지런히 집에 와서 신발을 벗어주면 그것을 신고 학교에 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오누이의 숨가쁜 이어달리기가 시작된다. 그러면서 오누이는 신발을 찾으려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다. 드디어 잃어버린 신발을 신은 아이를 찾아내지만, 그 아이가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것을 알고는 돌아서고 만다.
그런 오누이에게 놓칠수 없는 기회가 생긴다.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데, 상품이 기가 막히다. 3등 입상자에게는 "운동화"를 준다는 것이다. 오빠 알리는 평소에 학교까지 뛰어다닌던 실력으로 오로지 운동화를 목표삼아 마라톤에 참가한다. 우승? 하려면 해라, 나는 오직 3등이 목표일 뿐이니까. 알리는 3등에 걸린 상품인 신발을 얻어서 동생에게 주기 위해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뛴다. 너무 잘 뛰어 앞으로 나섰다가는 다시 뒤로 처지고 3등 밖으로 밀렸다 싶으면 다시 그 자리를 찾으려 용을 쓴다.
<늑대와 춤을>,< JFK> 등으로 우리에게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제작을 맡은 이 영화는 1999년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 부문에 후보로 올랐었고,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는 그랑프리를 수상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아역배우들의 천진한 연기, 삶을 긍정하며 그래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무리없이 엮어낸 감독의 연출력이 험잡을데 없이 어울린 작품이다. 가난하지만 그속에서 피어나는 가족간의 사랑과 신뢰,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도 너그럽게 감싸는 넉넉함이 가족영화로서의 품격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미국영화가 보여주는 물질적 풍성함과는 다른 맛이 있는 영화다.
글/ 조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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