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문의 영화이야기] <D-13>, <어둠속의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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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3
1962년 10월16일. 미국 정찰기가 쿠바에 건설 중인 소련제 핵미사일 기지를 발견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브루스 그린우드)은 동생인 국무장관 로버트 케네디(스티븐 컬프),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보좌관 케네스 오도넬(케빈 코스트너)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해 대책 마련에 나선다.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과 소련의 충돌로 자칫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당사자인 미국과 소련은 물론이고 이를 지켜보는 세계 여러 나라들은 숨을 죽이며 촉각을 세웠다. 미국의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에 밀린 소련은 결국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했다. 미사일기지 발견에서부터 사태의 마무리까지 13일 간은 길고도 긴 "역사적인 날들"이었다. 은 그때 미국의 백악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좀더 정확히는 케네디 대통령이 어떻게 사태를 수습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 인물을 영화의 소재로 다루는 경우는 흔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장의 판도를 바꾸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개과정을 그린 <사상최대의 작전>이 나 유태인 학살을 막기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쉰들러 리스트>,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진실을 추적한 , 대기업의 환경오염에 맞서 끈질긴 추적을 벌인 끝에 사상 최고의 배상금액을 받아내는데 성공한 에린 브로코비치 아줌마의 실화를 보여주는 <에린 브로코비치>,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침공을 재현한 <진주만> 같은 영화들은 실제 상황을 다룬 경우 들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사건의 전개과정과 결과가 드러난 경우들이다. 새로움과 흥미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만큼 재미가 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제작자들은 지나간 사건에서 소재를 찾아내고 관객들은 새삼스럽게 반응하는 것은 진솔한 인간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 전하는 감동같은 것들이다.
은 그런 영화들의 연장선 위에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결국 "미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어떻게 해서 그 일을 할 수 있었는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보고에서부터 각 분야 관계자들의 서로 다른 판단과 주장이 엇갈리며 노출되는 권력 내부의 긴장 그리고 결국 사태가 마무리되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을 재현하는 영화적 구성은 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최종적인 결과란 그저 얻은 것이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얻은 귀중한 승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삶에서도 순간의 판단이나 선택이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위기의 순간순간 무엇이 최선인가를 고뇌하는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영화를 보노라면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하는 것은 국가의 위기가 아니라 그 위기를 수습한 인물이 누구인가라는 점에 더 많은 무게가 실려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태를 관장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다. 자신의 책상 위에 놓아둔 "신이여, 당신의 바다는 넓지만 제 배는 너무 작습니다"란 문구가 암시하듯 영화 속 케네디 대통령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결국 최선의 판단력으로 사건을 수습하는 "미국인들의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흔히 미국영화들이 소재나 구성, 역사적 해석 등에서 지나치게 미국적 시각을 반영하므로서 과도한 미국주의를 앞세운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며 그 시대를 이끌었던 인물의 진실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사이에 두고 "하자"는 주장과 "안된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지만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리든 긍정하면 할수록 긍정의 역사는 확산되고, 부정할수록 부정의 역사 또한 넓어진 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에서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진실을 파고 들었던 변호사 역할을 맡았던 케빈 코스트너는 케네디의 친구이자 충실한 보좌관으로 사태의 진전을 감당하는 역을 연기하므로서 케네디 대통령과의 남다른 인연을 보여주고 있다.
추천 비디오 - 어둠 속의 댄서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옛날 시골의 어느 이발소 액자나 관광지 기념품점의 나무 조각 속에서 자주 보던 이 말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가슴에 사무치듯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의 댄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절망의 연대기라고 할만큼 슬프고 가슴아픈 사연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미국 워싱턴주의 어느 작은 마을, 남자 아이 하나를 키우며 발버둥치듯 살고있는 "셀마"의 처지는 산 넘어 산이다. 점점 시력을 잃어 가는 아들에게 밝은 세상을 찾아 주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지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공장에 다니며 힘겹게 일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지만 두꺼운 안경을 끼고도 동서남북을 가리기 어려운 그의 가물거리는 시력은 공장 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다.
경찰관인 빌은 셀마 모자에게 집을 빌려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도움을 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지만 아내의 사치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있는 처지다. 살림이 거덜난 처지인데도 돈이 없다면 아내가 멀리 떠날까 노심초사하던 그는 셀마가 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엿보고는 마음이 흔들린다. 셀마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자제력을 잃은 그는 결국 돈을 훔치고 만다.
빌이 자신의 돈을 훔쳐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셀마는 사무실로 그를 찾아가 돈을 돌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돈을 훔친 사람이 순순하게 돌려줄리는 만무한 일. 결국 옥신각신 하던 끝에 셀마는 빌에게 총을 쏘고 만다. 그 총소리는 셀마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천둥소리로 바뀐다.
이 영화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전위적 실험성을 앞세우는 작가주의 감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관객이 본다면 <어둠 속의 댄서>는 그야말로 파격이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모습은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진부한 영화"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추상화를 그리던 화가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사실적 인물화를 그리는 경우처럼 세상살이의 무게와 그늘은 영화의 중심 소재로 떠오른다.
멜로 드라마의 단순성에 변화를 주는 것은 뮤지컬의 병설이다. 셀마가 가슴 속에 꿈처럼 지니고 있는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희망,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마음으로 흥얼거리는 노래와 춤을 멜로드라마와 함께 엮은 것은 현실과 몽환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의 심리를 상징한다. 또한 시력이 떨어질수록 세상으로부터 밀려나는 주인공을 받쳐주는 구원의 지팡이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전체척으로 관객의 감상에 부담을 줄만큼 난해하거나 복잡한 수준은 아니다. 영화연출의 인위성을 배제하며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강조하는 "도그마 선언"까지 외쳤던 감독이 스스로 그 기준을 내던지며 전통적인 영화제작 방식을, 가정 보수적인 양식에 대입한 것은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긍정하며 희망으로 그들을 위로하는 대중영화의 가치에 대한 새삼스러운 인정인지 다양성을 실험하기 위한 또다른 전략인지는 애매하지만 작가주의의 독창성과 대중영화의 보편성이 기묘하게 어울린 경우인 것만은 분명하다.
글/ 조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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