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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테마에세이] ‘지킬 것은 지키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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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무조건 예쁘고 날씬해야 한다. 남자들은 근육질이어야 하고, 만능 스포츠맨에다가 산뜻한 매너까지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내 아기는 무조건 최고로 잘 먹이고 입혀 줘야만 한다. 큼직한 자동차 한 대 정도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집은 내부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가격의 대형 주택이어야 한다.

 

방송 화면을 보고 있으면 가치 기준까지 흔들린다. 휴가는 인터넷으로 예약한 비행기표를 들고 태평양 바닷가로 떠나가야,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란 소리를 듣지 않는다. 여성들은 특정 회사의 신용카드를 써야 여자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도대체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자를 안절부절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요즘의 ‘광고’라는 존재들인 것 같다.

활동적이고 지적인 직장 여성도 누군가로부터 전화 한 통만 받으면,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회사를 빠져나가야 한다. 철저하게 훈련되어 있는 연예인들처럼, 모든 여성들은 긴 눈썹에 일정한 색조의 화장을 해야 요즘 여자답다는 소리를 듣게 된단다. 비누 냄새를 풍기는 세수만 하고 나가면 촌스럽기라도 하다는 걸까?

 

노출의 계절이 다가올수록 여성들은 누구누구와 같은 몸매를 만들기 위해 모든 걸 다 바친다. 그건 남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방송 화면에 나오는 근육질의 남자를 보면, 누구나 그 정도의 근육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긴장하게 된다. 실제 길거리에 나가 보면 비슷비슷한 이웃의 갑남을녀(甲男乙女)뿐인데, 방송 화면만큼은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 만큼의 자극을 계속 던지며 무조건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는 한마디 때문에 전국의 어린이들이 엄청난 혼란을 겪은 바 있다. 자기 전에 껌을 씹어야 한다기에, 오히려 치과 의사들이 반박을 하고 나서기도 했다. 어느 백화점에서 시작된 ‘미시’라는 광고 때문에, 전국의 아기 엄마들이 일제히 다이어트에 들어갔던 건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최신 유행곡과 춤을 부르고 출 줄 알아야 ‘원시인’이란 소리를 듣지 않는다. 유행어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하며, 연예인들의 사생활 얘기는 자기 이력서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개인기’라는 임기응변의 말재주는 한 인간의 사회성을 체크하는 별난 기준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한마디 때문에 신토불이 열풍이 불고, 순진무구하게 지내던 산골 소녀를 광고에 끌어냄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아버지를 잃게 만들었다. 듣기만 해도 귀가 솔깃한 할부 광고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계약금만으로 차를 장만해서 몰고 다니는 건 바로 우리 주변의 경우이기도 하다.

 

무한 경쟁의 광고 공세는 이미 우리들의 판단력을 단순 반응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전화 번호를 반복적으로 학습시킴으로써 무의식 중에 그 번호를 눌러 피자를 시키고, 휴대전화 벨소리를 바꾸게 만들고 있다. 외국 운동 선수들이 나와서 말없이 움직이기만 해도, 우리는 그 제품이 어느 나라의 무엇이라는 걸 기억해 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너무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예측도 못할 만큼 첨단 사회로 진보하고 있다지만, 광고 내용들을 잘 분석해 보면 보다 심각해지는 병리가 엄연히 존재한다. 여자는 더욱 여성다워야 하고, 남자는 보다 더 남성다워야만 한다는 이분법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사는 여성이라 해도 결국엔 남자의 품에 안겨야 하고, 아무리 힘겨운 상황이라도 여자를 보호해야 하는 강인한 존재가 바로 남자라는 암시가 전편에 흐르고 있다. 그 얘기는 결국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는 약자들에게, 또 한번의 소외됨을 느껴야 된다는 역설적인 강요가 뒤따르게 된다.

 

시류에 맞춰 가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발달하는 문명의 혜택을 보다 더 많이 받으려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인터넷이 없으면 못 살았고, 휴대전화가 없으면 불안감을 느껴야 했던가. 언제부터 전국민이 차를 몰고 다녔고, 언제부터 학생들까지 신용카드를 품에 안고 살았던가. 불과 몇 년 사이에 뒤바뀐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면 영원히 도태될 거라고 협박하는 듯한 광고의 암시들은 너무 큰 역작용을 낳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배가 아프면 어머니 손이 약손이었다. 하루종일 뛰어다니다가 집에 와선, 지하수를 퍼서 시원하게 등목을 하면 그만이었다. 요란한 음식이 없어도, 어머니가 차려 주신 공기밥과 된장국에 김치 한 조각이면 진수성찬이었다. 흙먼지 길을 고무신으로 걸어도 교통의 불편함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게 우리네 생활이었고 전부였다.

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커다란 냉장고를 가져야만 우리네 여자들이 행복해지는가? 언제부터 우리 나라 여자들이 냉장고 하나에 행복을 느끼고 못 느끼는, 그런 단순한 존재가 되어 버렸던가. 자기 인생을 가꾸고 내일을 위해 노력하면서 느끼게 되는 기본적인 행복이란 건 광고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잠시 다른 경우를 살펴보기로 보자. 수많은 백화점들이 여성 고객을 불러들이기 위해, 갖가지 화려한 미끼를 내던지고 있다. 그런데 백화점에 절대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같이 생각해 보자. 모든 게 다 있을 듯한 백화점에 과연 무엇이 없단 말인가?

첫째로 시계가 없다. 시계를 보게 되면 귀가나 약속 시간을 떠올리게 되고, 결국 시간에 쫓기다가 쇼핑에 열중할 수 없게 된다. 문 닫는 시간마저도 반드시 닫기 직전에서야 알려 준다는 건 대부분 경험해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창문이 없다. 왜 없을까? 백화점 내부에 들어와 있는 동안에는 모든 물품들을 구입하는 게 가능하다는 환상을 주입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무심코 창문 밖을 내다봤는데, 어깨가 축 처진 중년 남성들의 모습이라도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허리를 졸라매도 모자랄 판에 쇼핑은 무슨 쇼핑이냐고 뛰쳐나와 버릴 게 뻔한 일이다.

또 없는 건 1층의 화장실이다. 각층마다 깨끗한 화장실이 여기저기에 있지만, 1층에는 반드시 화장실이 없다. 물론 일반인들이 들락거려서 공중화장실이 되는 걸 방지하려는 의도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속내를 들춰보면 조금이라도 실내를 더 걷게 만들어서, ‘일’을 치른 뒤에 속 편하게 매장을 둘러보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난데없이 백화점의 경우를 꺼낸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틀에 익숙해져 버린 채로 그런 시설을 당연한 듯이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 예를 들어 은행에 시계가 없고 창문이 없다면 어떨까? 백화점의 광고는 그것에 길들여진 우리를 보다 단순한 호기심을 갖고 오라며, 시도때도 없이 모두를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최고의 대학에서 여학생의 33.3%가 같은 대학 교수와 결혼을 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었다. 33.3%라면 최소한 여학생 세 명 중의 한 명은 교수와 결혼했다는, 정말로 어마어마한 발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조사 당시의 여학생은 단지 세 명뿐이었단다. 결국 그 중의 한 명이 교수와 결혼했다는 아주 단순한 일을 가지고, 대학 당국이 호들갑을 떨며 발표했던 것이다. 권위 있는 대학에서 숫자까지 들먹이며 화제인 양 포장했으니, 일반인들의 반응은 얼마나 호기심이 가득했을까. 대학 당국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이의 심리를 이용한 계획적인 시도였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었다.

물론 역기능이 있다면 순기능도 있는 법이다. ‘질서를 지키자.’고 아무리 떠들어 봐도 ‘소 귀에 경 읽기’였던 우리들에게, ‘지킬 것은 지키자.’라는 광고 한 마디가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심각한 사회 문제인 ‘왕따’ 현상에 대해서 산더미 같은 논문들이 쏟아졌지만, ‘정(情)’을 주제로 했던 광고 한 편이 훨씬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이젠 시류에 휩싸이는 환상을 바라보기보다는, 언제 보아도 정겹고 반가운 광고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오랜 친구 같은, 그런 영상과 메시지는 기대하지 말아야 할까?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정겨운 광고가 많았으면 한다. 빚을 지더라도 구입하도록 만드는 게 광고의 속성이지만, 그런 부작용을 부추기는 게 광고의 효과라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네 삶이 그대로 엿보이는 광고를 보고 싶다. 똑같은 얼굴이 대여섯 편씩 계속 연결되는 지겨움을 제작자들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건 광고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점이다. 어차피 광고를 보고 우리가 구입하는 비용에는 그 광고비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필요 이상의 광고를 하는 제품은 필요 이상의 광고비 때문에, 제품의 품질보다 비싼 가격이 책정되는 게 일반상식이다.

 

장애우를 위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라고 허구한 날 떠들어 봤자 관심도 없던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던 광고가 있었다. 청각장애를 가진 소녀가 등장했던 어느 이동통신 회사의 광고가 기억나실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감동이다. 더 이상 말장난에 우리의 눈과 귀를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


글/ 채지민(소설가)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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