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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지리산 편지

정도상 지음 / 신국판 / 240쪽 / 미래M&B 펴냄 / 8,500원

본문

“너희들은 여기서 쉬고 있어. 나 혼자 올라가서 휘 둘러보고 올테니까.”

날은 더웠다. 평소 술 한잔만 마셔도 빨갛게 달아오르던 후배의 코끝은 이미 햇볕에 그을려 탐스럽게 익어버렸고, 몸살기가 있다던 녀석은 그 반대로 하얗게 질려 탈진 직전이다. 건강한 대한남아로 현역 군복무를 마친 나. 작은 물병에 물을 채워 노고단으로 향하는 등산로 계단을 홀로 올랐다. 뒤에서 쳐다보는 후배들에게 들킬까봐 후들거리는 다리에 팍팍 힘을 줘 가며 올랐다. 노고단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 벼락이 떨어졌다.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노고단으로 오르는 그 짧은 길 초입에는 자연보호를 위한 안식년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물샐틈없이 보초를 서고 있지 않은가. 그날 우리는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의 가사를 바꿔 ‘노고단은 우리를 오지 말라 하더라’고 노래 부르며 숙소로 돌아왔을 게다.

유일하게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문명을 일구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면서 지구 위 온갖 생명의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인간. 그 인간이 자연을 둘러보겠다고 거만하게 내디뎠던 발걸음은 이렇게 거부당하고 있었다. 개인적 경험에 너무 거창한 의미를 갖다 붙인 것 같아서 민망스럽다. 어쩔 수 없다. 나야 태어나서 지금까지 삭막한 콘크리트 숲속에서만 살아왔으니 자연의 사소한 거절에도 쉽게 상처받고 물러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니까.

이런 사정은 그 산골에 탯줄을 묻은 소설가 정도상에게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아 적잖이 안심된다. 하지만 그의 상심은 나의 그것과는 무게와 깊이가 달라보인다. 그의 발걸음이 찍힌 지리산 자락들과 그 안에 오롯이 안겨 있는 산사와 고택들. 겉만 핥아보고 달다 쓰다 뱉어버리는 가볍고 형식적인 맛보기가 아니라 속속들이 숨겨진 진국을 두번 세번 곱씹어보고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으로 흡수해버리는 진지함을 택했기에 그의 책 역시 단숨에 읽어내려 가면 곤란하다.

‘운서’. 지은이가 지리산 자락을 밟고 서서 속절없이 띄워보낸 편지의 수신자. 그의 존재가 실제인지 허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공개된 그 편지는 우리 안의 수많은 운서들에게 족히 한 갑자는 넘는 반성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새마을을 부르짖으며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자던 선글라스의 키 작은 대통령은 결국 농촌의 피폐화와 공동화를 선물했고, 관광자원의 개발이라는 허울좋은 구실은 산허리를 잘라 자연의 경계를 갈랐으며, 윤택해진 생활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은 나무와 풀 대신 썩지 않는 쓰레기만 심어놓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속도, 속도. 뒤쳐지면 죽는다는 살벌한 구호 속에서 한 발 딛고 주변을 살피고 두 발 딛고 자신을 돌아보는 자연의 순리는 패배자의 투정처럼 남아버렸다. 이제 그 속도의 두려움을 파괴력을 알아챘지만 제어해 줄 브레이크는 파열되고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종착역도 지나쳤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방법은? 지은이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다음 생에 나무나 풀로 태어나는 것. 미친듯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에서 뛰어내려 그 자리에 붙박힌 채 아낌없이 주고 소멸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어리석은 꿈을 품어보는 것.

여름의 시끌벅적한 휴가에 맞춰 대량으로 쏟아지는 여행기와 답사기 속에서 이 책을 선뜻 골라낼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대상으로 삼고 그 곳에 이방인의 신분으로 다가서는 대신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인간의 첫 마음을 때론 강경하게 때론 조심스럽고 부끄럽게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은이가 지리산에서 보낸 편지들은 일단락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땀을 훔칠 새도 없이 백두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길 참이다. 백두산에서 띄우는 편지. 그 안에는 또 어떤 반성과 성찰의 고백들이 담겨 있을까. 다시 한번 내 물병에 물을 채우고 일상사 모든 미련을 뒤에 남겨둔 채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팍팍 줘가며 그 길을 따라나서고 싶다. 이번에는 결코 ‘한계령’의 곡조에 ‘오지 말라 하더라’는 가사를 바꿔 불러가며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으리라.

 

글/ 이우일 (웹진 ‘부꾸’ 기자) www.bookoo.co.kr

 

작성자이우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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