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민의 테마에세이] 진정한 주인공은 조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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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예를 한 가지 언급해야겠다.
한 동안 <변강쇠>류의 영화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인근 고을의 남정네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력을 자랑하며, 여인네들한테는 동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남성들에겐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으로 그려지던 인물이 바로 ‘변강쇠’라는 존재이다.
그런 영화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마을 아낙네들이 극히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연기하는 과정이 길게 이어진다. 그러다가‘옹녀’라는 여인을 만나서 최고의 고수(?)끼리 벌이는 대결 장면이 중반부에서 끝까지 연결된다. 뻔한 이야기 진행이기에 세세한 내용까지 밝힐 필요는 없지만, 이 대목에선 중요한 단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변강쇠가 아무리 정력이 세다 해도, 처음부터 옹녀를 만나 불꽃 튀는 대결을 벌였다면 얼마나 식상한 진행이 되는지를 상상해 보자. 변강쇠의 정력이 세다고 하는데, 얼마나 세고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기준은 무엇인가. 또한 옹녀가 천하의 음기(淫氣)를 지녔다고 하는데, 관객들이 그걸 사실처럼 받아들일 분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그건 바로 수도 없이 쓰러져 가는 영화 속 뭇남성과 뭇여성 들 때문이다. 거의 모든 영화는 유명 인사 몇몇의 이름을 내세우며 흥행에 도전하지만, 그 주연이 주연급답게 존재하기 위해선 그의 곁에 있어야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필요한 법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틀어서 조연(助演)이라고 부른다.
<변강쇠>류의 영화에서 우리는 누구를 기억하는가. 촬영 감독의 이름? 소품 담당 스태프의 얼굴? 아니다. 대강 누구누구의 이미지라고 굳혀진 어느 주연급 배우를 연상하는 게 보통이다. 마치 그 캐릭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인 양 포장된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정력이 그토록 엄청나다는 걸 증명해 낸 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채 스쳐 간 조연들의 연기력에 힘입은 바 크다. 아낙네 역할을 맡은 여러 명의 연기가 없었다면, 주인공의 정력이 세든 말든 알 바가 아닐 수도 있다.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만든 힘, 그것은 바로 주인공 곁을 지나쳐 간 수많은 단역들의 힘이었던 것이다.
어느 광고의 문구처럼, 세상은 ‘더 이상 2등을 기억하지 않는’ 분위기로 우리네 삶을 묶어가고 있다.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의미 없는 세상이라며 우리를 보이지 않게 휘어잡고 있다. 대학도 일류, 마시는 양주도 일류, 자동차와 사는 집도 최고급, 입고 먹는 것도 초일류 제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옹알거림이 널리 퍼지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럴까?
진정한 과학 기술과 첨단 분야를 위한 초일류 정책은 당연히 지속되고 계승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황금만능에 모든 영혼을 저당 잡힌 극소수의 허망한 껍데기 놀음에 전국민이 동참해야 하는 건 아님이 분명하고도 자명한 일이다.
우리 실생활 주변에 천만 원 짜리 금딱지 시계를 찬 사람이 누가 있는가.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저택에서 황제처럼 생활하는 이들이 어디 있는가. 외제차 몇 대를 굴리며 히히거리는 인물들이 우리의 수첩 어느 쪽에 적혀져 있는가. 한끼 식사비에 백만 원을 지불하며 지내는 얼굴을 우리가 직접 만나기라도 한 적이 있었던가.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영웅이 되려 하면 조연은 누가 하는가.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누구든지 앞서 나가려고만 하지, 진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지내는 이들을 경험했던 적이 없지 않은가. 주님을 위해 산다는 이들의 교회 건물은 바벨탑이 되어 갈수록 하늘을 찌르고, 부처님의 자비를 세상에 전파하겠다는 사찰은 구궁대궐이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였지 않은가.
모든 이들에게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라고 떠드는 인사들일수록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모두를 내려다보려 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손을 맞잡자고 외치는 사람일수록, 뒤돌아 서서 혼자 손씻고 외면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속았다고 느끼면서도 한번 더 미련 속에 미대는 버릇 때문에, 우리가 욕하는 이들의 자리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줬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한다면서 최고급 승용차는 왜 타고 다니는가. 민중의 한을 풀어 주겠다고 큰소리치더니 룸싸롱 출입은 웬 말인가. 회의 장소가 필요해서 사용했다는 걸까? 수백억을 횡령하면 보석으로 풀려나고, 생계비 십만 원 때문에 징역을 살아야 하는 이 사회의 흐름은 누구를 위해 흘러가고 있는 걸까.
주인공을 자처하는 몇몇 존재들을 위해 전국민이 조연으로 전락하고 있는 건 아닐까? 조연은커녕 언제 등장하는지도 모를 단역(端役)조차 감지덕지해야 할 입장으로 우리 모두가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한숨 섞어 얘기한다면 끝이 없을 내용이다. 우리가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조연이었고, 다시 한번 살펴보니 단역이란다. 그나마 쥐꼬리만한 출연료마저도 나중에 찾아가라고 한다. 일단 열심히 준비해서 출연할 마음자세를 갖추고 있으란다. 그러면서도 노후 생활을 보장해 줄 테니까, 매달 회비는 꼬박꼬박 내라고 윽박지른다.
누가 누구한테 하는 말인가. 누가 주인공인가. 이 땅의, 이 사회의, 이 인생의, 이 시대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다. 너와 나, 이웃과 친구들, 형제와 자매들, 바로 우리 자신 모두가 진정한 주인이 아니었던가. 누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의 배역을 결정하고 지시한단 말인가.
우리는 주객이 전도되어 있는 모순의 세상에 살고 있다. 주인공임을 자처하고 주인공이고 싶어하는, 자신이 주인공인 줄 착각하고 지내는 존재들 때문에, 엉뚱한 우리 이웃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 고속도로를 거꾸로 달리고도 오히려 큰소리치고, 공금을 횡령하고도 당당하다고 떠들며, 꿍꿍이로 가득찬 얼굴에 웃는 가면을 쓰고도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라 한다.
거꾸로 가는 세상이다. 일단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게 최고인 사회이다. 부모의 직위만 확실하다면 굳이 군대에 갈 필요도 없고, 아쉬울 것 없는 저택에서 유학 생활을 즐길 수 있고, 대한민국 젊은이라면 누구나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취업 걱정 따위를 할 필요도 없이 부모의 기업에 간부로 들어가 앉으면 된다.
가만히 있어도 이리저리 유산 상속이 굴러 들어오고, 적당한 때가 되면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된다. 구태여 열심히 공부하며 밤을 샐 필요도 없다. 무엇이 부러운가.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 본 적이 있을까? 포장마차에 앉아 한숨 짓는 자기 회사 직원들의 쓸쓸한 그림자가 어떤 모습인지 구경이나 해 봤을지 자못 궁금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게 모두 정답일까?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거꾸로 가는 세상이란 걸 한탄할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똑바로 생각하면 모든 게 확실해진다.
주인공을 자처하던 그들의 자리는 사실상 뜬구름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조연이나 단역이라고 쳐다보던 우리들이 진정한 주인공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은 금방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진정 주인공으로서의 생활이 아니라, 주위에서 만들어 낸 거품이었음을 뒤늦게 확인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 전체를 둘러보자. 자기 일에 충실하고 기다림을 간직하면서 작은 일에 감사할 줄 알며 내일을 기원하는 나날, 그것 이상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일까. 사소한 다툼에 원망하다가도 손을 내밀어 서로의 따스함을 나누고, 최선을 다한 결과가 미진하더라도 다음을 기약하며 새롭게 다짐할 수 있는 삶, 그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주인공인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낮출 줄 알고,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타인의 어려움에 뛰어들 수 있는 마음가짐, 그것은 ‘주인공’임을 자처하며 옆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할 현실인 것이다. 그 현실 한가운데에 우리가 있다. 세상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는 건 무엇인가. 그를 위해 내가 잠시 조연이 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최선을 다해 성취를 이뤄 낸 동료들에게 보내는 박수는 무엇인가. 그 날의 주인공을 위해 스스로 관객이 되고 조연이 되며, 함께 기쁨을 누리겠다는 우리의 사랑인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가족과 가정을 위해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조연이 되려 하지만, 결국 주인공은 당신이었음을 모두에게 전해 준다. 진정한 종교인은 자신의 소유를 버림으로써 참사랑과 진정한 자비가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절대자에게 모두가 다가갈 수 있도록 조연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다. 다리가 되어 타인을 걷게 해 준다는 것, 그건 진정한 주인공만이 행할 수 있는 인생의 참모습이다.
주인공이고자 고집하면 단역조차 사치스러운 미물이 된다. 스스로 조연이 되겠다면 누구든지 그를 주인공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 세상 섭리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자세로 어느 자리에 서기 위해 생활하고 있는가. 문득 성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글/ 채지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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