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문의 영화이야기] 새롭게 여는 21세기, 영화같은 세상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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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누구나 좋아한다. 영화에서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 꿈과 희망이 살아있고 사람과 사람이 가까이 있는 "영화같은"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21세기의 아침이 밝았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어제나 오늘이나 크게 달라질 것이 없고, 20세기를 보내고 새로운 세기를 맞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매일의 연속일 뿐이다. 그래도 오늘보다는 내일, 올해보다는 내년, 지나간 시간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희망을 걸며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은 좀 더 따뜻하고, 살만한 세상을 기다리는 마음때문일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 몇 년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IMF 사태로 불리던 경제위기는, 가난을 벗어나 세계의 선진국가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다고 자부하던 국민적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새삼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한국경제의 상징처럼 위용을 자랑하던 유수한 기업들이 충격파를 일으키며 쓰러졌고, 그 여파에 휩쓸린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린 채 한숨을 쉬어야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기반이 그렇게도 허술했는가에 대한 자탄에서부터 매일매일의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사정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떤 모습으로든 걱정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루하루 사는게 "전쟁"이라는 말을 실감해야 했고, 실속없는 오만함과 흥청망청이 얼마나 뼈아픈 대가를 요구하는 일인가도 절감해야 했다. 그래도 허무하게 쓰러질 수는 없다며 필사의 노력으로 경제위기 극복에 나선 국민의 노력으로 먹구름이 걷히는가 싶었지만 불안한 위기감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작심 3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새해 벽두에는 나름대로 한해를 설계하고 이런저런 덕담을 주고받는 것이 예년의 모습이었지만 21세기의 시작을 여는 올해인데도 그런 말을 찾아보기 어렵다. 너나없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뻔히 아는 처지에 까딱하다가는 괜한 빈말이 되기 쉽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갈수록 답답해지는 것도 사람들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든다. 덕담조차 아끼며 조심스러워 하고 있는 것은 그런 마음들을 말없이 전하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근래 겪어보지 못했던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서 한해를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21세기가 열리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설레는 가슴으로 기다려 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찬바람 부는 현실은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허탈함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숨을 많이 쉬면 쉴수록 한숨 쉴 일이 더 많이 생기고 웃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결국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 우리 사회를 누르고 있는 가치관의 혼돈, 서로가 믿지 못하며 불신을 쏟아내고 있는 여러 가지 주장과 행동들, 남이야 어떻게 되던 나만은 손해보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증적인 이기심같은 것들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당장 여러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제위기도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며 이를 풀 수 있는 묘책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아보자고 해야 할까. 그렇게까지 오늘의 세상이 무너졌는가. 실제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각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여유로움은 어느때보다도 절실하다. 용기와 희망까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현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원하는 결말을 볼 수 있다는 부분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연애든 사업이든 주변 사람과의 갈등이든 결국은 원하는 대로 마무리한다.
바로 "해피엔딩"이다. "나뭇꾼과 선녀"니 "심청전", "춘향전"같은 옛날 이야기들의 끝은 한결같이 "......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 더라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통해 온갖 고생을 견디며 고난을 이겨낸 주인공이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믿는다.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옳다고 믿는 것, 그렇게 되어야 바른 세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믿음과 행복한 위안을 이어받은 것이 바로 영화이다. 영화는 세상의 구석구석을 비추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그리는 세상과 사람은 실제 현실과는 다르다. "영화적인 현실"로 모습을 바꾸기 때문이다.
영화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대략 1915년 무렵이다. 189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첫 대중 상영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이후 20여년 정도가 지나는 동안 영화제작자들은 관객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를 주의깊게 읽어냈고 그것을 다음 영화에 담았다. 영화 길이가 너무 짧으면 뭔가 허전하고 너무 길면 지루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적당한 길이로 골라낸 것이 1시간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상영시간이었다.
그러나 제작자들이 더 눈여겨본 것은 영화의 내용이었다. 온갖 고난을 이겨낸 뒤에 맞는 따뜻하고 행복한 마무리에 관객들은 더 열광했다. 영화가 산업과 문화로 성장하던 무렵의 세상은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변화, 전쟁의 공포 같은 것들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짓눌렀다. 유럽은 유럽대로 미주나 아시아는 또 그대로 마찬가지였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커졌고 사회주의 이념이 대안처럼 나오기도 했다. 배타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나치즘같은 전체주의가 횡행하는 시대의 혼돈을 겪어야 했던 것도 그때이다. 사람들은 가난과 차별이 없는 세상, 법과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세상을 꿈처럼 그리워했다.
어떤 난관에도 꺾이지 않는 주인공, 험한 풍파를 뚫고 나가는 신념과 용기, 마침내 차지하는 성취와 승리.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영화 속에서는 가능했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해피엔딩이 주는 편안함과 여유는 무엇보다도 큰 힘이었다. 관객들은 그 속에서 현실의 고달픔과 불안을 달랬고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극장은 힘든 현실에서 도망쳐 숨는 도피장소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나누어주는 학교가 되었고 영화는 교사가 된 셈이었다.
오늘의 우리 상황이 그때와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서로 격려하고 마음의 용기를 나누는 일은 필요하다. 마음에 드는 영화 한편을 보면서 새해다짐을 하는 것을 어떨까. 고난을 견디고 이겨 나가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은 오늘의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견디며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테니까.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 새롭게 열리는 21세기는 영화같은 세상이 되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영화의 주인공같은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글 : 조희문 상명대 영화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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