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민의 테마에세이] 시는 제 마지막 도피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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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을 열어 가장 좋은 옷을 꺼내 봅니다
거울에 비춰 보며 앞뒤 살피고
색상은 어떤지
내게 잘 어울리는지를 어색하게나마 따져 봅니다
머리를 몇 번 더 빗고
면도도 깨끗하게
손등엔 향기 좋은 로션까지 발랐습니다
저를 아는 친구들이 이해 못하듯
생전 제가 하지 않던 행동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찾아 주길 애원하는 날이면
그 흔하던 전화벨 소리도 찾아들지 않더군요
만날 사람이야 있겠죠
여기에 가면 그 사람이 있을 테고
저기에 가면 저 사람
단골 주점 어딘가엔
언제나 반가운 척 대해 주던 얼굴도 있을 테니
서둘러 움직이기만 하면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몸 담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날이 오면
어김 없이 저는 혼자만의 길을 찾아 걷게 됩니다
늘상 걷던 길이면서도
왠지 처음 걷는 타지他地인 양
두리번거리는 시선 속에 발걸음을 옮깁니다
아는 얼굴 하나라도 마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오가는 사람들 둘러보지만
마주치는 낯선 눈길 다가오면
무엇인가에 들킨 듯 성급히 고개를 돌립니다
누군가 제 이름 부를까 두려워
골목으로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왜 이렇게 걷고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헤아리지도 못하며
누구를 보고 싶다는 건지
시선은 왜 던지고 왜 피하는 건지
오늘의 끝은 어디며
무엇을 향하려 했던 건지를 따져 보려 애쓰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답은 없었습니다
촉촉하게 비 내리는 오후 다섯 시를 지날 때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선
이 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그리움으로
성급히 약속 정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다른 약속 정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이 사람 저 사람을 묶어두겠다는 듯
다이얼 누르는 손길은 떨리기까지 했죠
사실은 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괜한 센티멘탈이나 허튼 낭만을 찾은 것도 아닙니다
마음에 내리는 비는 언제나 눈물로 맺혀 떨어졌기에
울지 않아도 될 밤을 만들고 싶어
적적한 소음 속에 버릇처럼 몸을 담아오곤 했습니다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인사
똑같은 화제로 울고 웃으며 다투다가
똑같이 늦은 밤 교통 편을 걱정하며
제각기 뛰어다니길 몇 날 몇 일
그렇게 흘러간 몇 달과 몇 년
이젠 그 이유를 찾아 보고 싶습니다
찾아야 할 누군가가 있었던 건지
못내 남겨지는 미련의 조각 살아 있다는 건지
왜 그 길을 걸어야 하고
사람들을 찾으면서도 왜 피해야만 하는지
무엇 때문에 술잔을 놓을 수 없으며
담배 연기는 언제까지
내 공간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야 하는 것인지
어쩌면 제 자신을
스스로가 견디지 못한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보듬고 감싸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라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눈물을
그 날과 같은 손등 위에 떨어뜨릴 수 없어
헤매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답이라도 있었다면 진작 정리를 했겠죠
아니,
어딘가 해답이라는 게 있을 수 있었다면
진정 존재할 수만 있었다면
그것을 찾으려는 여행 길로
남겨진 생의 나날 견딜 수도 있었을 겁니다
허나
언젠가부터 멈춰 버린 마음의 시계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실의 그리움과
잔인한 한숨만 안겨 주며
저의 밤들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꺼내놓았던 옷들을 다시 옷장에 걸고
손등에 묻힌 로션의 흔적마저 세수와 함께 지워내며
거칠게 돋아난 수염을 거울에서 바라보다가
휑하니 꺼진 눈동자의 흔들림 확인하는 것으로
조금 남은 술병 마개 열어 입가를 태워 봅니다
숨막히도록 타오르는 담배 연기를
또 다시 방안 가득 채우고 채우다가
눅눅한 체취 그대로 남아 있는
그 이불 위에 다시 드러눕고
불면의 밤 견딜 준비 마치고 시작해야 하는……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깊은 어느 곳으로부터
느낌으로만 느낄 수밖에 없는 근원으로부터
저의 흔들림은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제 현실이 그렇고 그러그러하다고
이렇게 적어놓는 것 이외의 해결책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털어 낼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을 적는지도 모르면서
심장 가득 압박하고 있는 무언가를 털어낼 대안은
오로지 이것밖에 제겐 없었습니다
詩는 제 마지막 도피처였습니다
사방 벽으로 둘러싸여 위안도 없는
어둡고 차가운 돌 바닥의 동굴이었지만
그래도 내일의 호흡 남겨져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게 만든 건
제 삶에서 詩밖에 없었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옷장을 열고 기웃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발에 묻은 흙과 먼지의 고향 찾아
또다시 그 길을 걷게 될지도
혹시나 아는 얼굴과 마주쳐
모처럼의 웃음꽃 터뜨리게 될지
아니면
잠가버린 제 방의 문 열리지 않은 채로
며칠이 지나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 피부에 로션의 향기가 다시 묻게 될지
습한 염습殮襲의 향내가 덮이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을 켜서 이 어둠을 벗어나야겠다 느낄 때서야
비로소 저의 자리가
지하 몇 미터의 밀폐된 나무상자였다는 실감을
뒤늦게 받아들이고 통감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간직하고 싶습니다
이유도 원인도 알지 못한 방황이었지만
깊은 밤
본능처럼 끄적거리던 몇 글자의 기록이 없었다면
그렇게 내버리고 버려온 독백의 흔적들마저 없었다면
진정 저의 호흡은 오래 전에 지워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라는…… 그 사실을
잠자리 뒤척이다 일어서고
다시 드러누웠다가 눈 깜박이기를 몇 시간째
문득 떠오른 몇 마디를 적기 위해
예정에 없던 넋두리가 길어졌던 모양입니다
어떻게든 잠에 들어야겠습니다
적고 싶었던 그 한마디를
마지막 빈자리에 적어놓는 것으로
남긴 것 하나 없던 하루
그것이라도 남겨놓았다는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감춰 두고픈 현존이자 생존이었기에
詩는 언제나 제 마지막 도피처였습니다
더 이상 피할 수도 없는
더 이상
침묵할 수도
침묵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던.
글/ 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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