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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페미니즘과 장애우

“여성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본문

지난 2월호부터 9월호까지 번역연재되었던 ‘정수영의 도전’은 지난달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정수영 씨는 재일교포 뇌성마비 장애우로 어려서부터 한국인이자 장애우로서 이중의 차별을 실감하며 자라났고, 중증장애우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우 연금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은 그런 혜택을 못받을지라도 다른 교포장애우에게만은 그러한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1992년 8월 「재일 외국인 연금차별을 없애는 모임」을 결성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수영의 도전’은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자립생활에 대한 도전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글을 번역 연재 해주신 이채식 씨는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직업재활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장애우계에서는 일본통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채식 씨는 이 글이 자립생활을 꿈꾸는 국내 장애우들에게 용기를 주기를 바라고 재한 외국 장애우들은 차별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소감을 밝혀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이채식 씨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아울러 정수영 씨의 앞날에 갈채를 보냅니다.

이번호부터는 힐리어 바바라(Hillyer Babara)가 저술한 ‘페미니즘과 장애우(Feminism And Disability)’를 새로이 번역연재합니다. 1993년 오클라호마 대학 출판부에서 초판이 발간된 이래 최근까지 계속해서 개정판이 나오고 있는 이 저서는 페미니즘 관련 저작 중 손꼽히는 저서입니다. 특히 이 저서는 페미니즘과 여성장애우 문제의 접목을 시도한 최초의 책으로 이 분야 작업으로는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연 것으로 여겨지며 페미니즘 발달과 장애우 인권에 있어서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저자 힐리어 바바라는 현재 저명한 페미니스트 이론 교사이며 중복장애를 지닌 딸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페미니즘과 장애우’는 딸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한 주목할 만한 저작으로 여성장애우들과 여성 캐어제공자들에 관계된 문제들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체에 대한 자각, 사회와 상호관계, 노동, 자연과 과학기술 사이에서 가정된 이분법, 주종관계, 회복 프로그램들. 언어의 문화적인 기준, 독립, 보조, 즐거움, 엄마의 책임에 있어서의 방법과 그리고 극한적인 비탄 이해하기에 대해 설명하고 비교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기꺼히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내용이 펼쳐질 것으로 장담합니다. 앞으로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목차
 

1. 제니퍼에 대한 생각, 1979
(Thinking About Jennifer, 1979)
2. 새 이론을 향한 기록들
(Notes Toward a New Theory)
3. 언어와 일대기
(Language and Biography)
4. 생산성과 보폭(Productivity and Pace)
5. 비탄(Grief)
6. 어머니 비난하기(Mother-Blaming)
7. 부정과 정상화
(Denial and Normalization)
8. 통과( Passing )
9. Nature and Technology
10. 간병인과 의견 차이
(Caregivers and Difference)
11. 종속과 독립
(Codependence and InDependence)
12. 회복 프로그램(Recovery Programs)
13. 제니퍼와  나를 생각하기,  1992
(Thinking About  Jennifer  and Me, 1992)

 

  제니퍼를 생각하며, 1979

 

여성학을 가르치면서 나는 ‘인간이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여성의 경험을 연구하면서 나는 어머니의 자아개념이 때때로 어떻게 딸의 자아개념을 없애 버리는지도 인식하게 되었다. 여성의 역할을 분석하면서, 나는 장애우를 포함한 다른 소수집단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 중 어떤 일을 하면서도, 나는 딸 제니퍼를 생각한다. 나와 그녀와의 관계에서 정치적인 중요성을 명확히 규명할 수 있게 될 때, 곤경을 세련되게 헤쳐나가는 사람이라는 내 자신에 대한 평가가 그녀를 힘들게 하지는 않는지, 장애를 가진 소녀로서 겪고 있는 힘든 점으로부터 나 자신이 배운 여성의 경험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여성이며, 장애우인 나의 딸 제니퍼

제니퍼는 14살이고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의 두려움은 현실적인 것이다. 여자아이가 한 여성이 되고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페미니스트의 약속 ─ 그녀가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될 수 있다 ─ 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제니퍼에게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다른 대부분의 소녀들보다 더 두려운 일이다. 제니퍼는 육체적·정신적으로 장애가 있고 남성·여성이 배워야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녀의 능력을 넘어서는(그녀의 희망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지만) 것이다. 그녀는 좌절하고 분노하며 두려워한다.
제니퍼의 어머니인 나도 마찬가지로 좌절하고 분노하며 두려워한다. 페미니스트 지식인인 내가 발전시킨 분석의 일부분으로도 제니퍼와의 관계를 정의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10살 때까지만 해도 제니퍼는 어머니와 딸이 자매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내 자신의 이해와 매우 잘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언니 메건과 한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고 발달이 늦어 메건만큼 완벽하게 신체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했지만, 두 아이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나가가고 개별성을 발달시키며, 아동기를 통해 가능한 성장을 하며 세상에 도전해 나가는 다른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발달과정에 있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그 둘이 나와 같은 여성이 될 것이고 나의 페미니스트 작업이 둘의 여성성(womanhood)을 더욱 잘 드러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아이들이 성차별(sexist)을 받는 사회에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왔지만 그들에게 여성이라는 것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을 줄 수 있으리라는 나의 능력을 확신했다.
 10살 때, 제니는 이름이 부여하는 힘을 아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는 선언과 함께 이름을 제니퍼로 바꿨다.
그녀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어른스런 이름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나의 페미니즘 이론과 일치된, 그녀가 보여준 마지막 의사표시였다. 그와 함께 그녀는 다른 아이들이 배우는 것을 배울 수 없고 나나 그 자신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여성들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해하고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깨달음은 더 늦었다. 나에게 그녀가 가진 삶의 한계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제니퍼 자신이었다.
10살 때 그녀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는 축구선수가 될 수 없다고 말하자 그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그녀는 여자아이들도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제니퍼는 장래희망이 투우사였다. 13살 때인 작년에는 체육선생님이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그녀는 계단을 올라갈 수 없었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를 무서워했고 그 공포는 현실적인 것이었다. 투우와 평균대에 대한 꿈도 실현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그녀의 꿈을 꺾지 않고 나의 모성애 속에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 여성에 대한 나의 믿음의 기반을 흔들리게 할 생물학적 결정론에 관계없이 이러한 사실들을 나의 페미니즘에 어떻게 융화시킬 수 있을까? 제니퍼가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은(그리고 내가 지금도 알고 싶어하는 것은) 몸이나 마음이 불완전할 때 온전한(whole) 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의 신체상태는 신뢰할 만하지 않다. ; 이것은 많은 여성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모두 최근까지 이와 같은 상황을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고 너무 쉽게 생각해 왔다. 이러한 신청교도적 윤리는 제니퍼를 좌절시킨다. 그녀는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가 글을 쓰거나 테니스를 치거나 신발끈을 묶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이어트, 운동, 화장하는 법에 대해 배운다면 어른이 되는 것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쓰여 있는 소책자를 주었을 때, 그녀는 그 책자를 창문밖으로 던져 버렸다. 나는 이러한 행동에 주목하고 싶다.

 

여성으로서 자아정체감을 갖는 것

 

나는 여성들이 공감(empathy)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정서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이 여성문화의 강점들 중 하나라고 믿는다. 내가 제니의 엄마 노릇을 하는 것 중에서 그 부분이 우리 둘 다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제니퍼는 자신의 감정들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나는 그녀를 대신해 그녀의 감정을 말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때로는 그녀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경험들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가 딸 노릇을 하는 큰 장점이기도 했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어서 감정들을 보통 억압한다. 제니는 정서적인 수준에서는 거의 완전하게 기능을 발휘한다 ; 그녀는 내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무엇인가를 보충해준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그 다음 단계인 제니퍼가 어른이 되는 일을 돕는 힘겨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의 상호의존성은 전통적인 결혼처럼 이분법에 너무 비중있게 근거를 두고 있다 ; 이성적인 / 정서적인, 독립적인 / 의존적인, 약한 / 강한, 수동적인 / 공격적인. 물론 그녀는 자유로이 그것을 넘나들어야 하고 그녀가 하는 것처럼 우리 둘다 그것에 개의치 않는다.
심리상담가, 많은 절친한 친구, 훌륭한 도서관의 도움으로 나는 정서적인 자아를 회복하고 온전(whole)하게 될 수 있었다. 이 친구들 중 몇몇이 자매이자 딸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 노릇을 하고 딸 노릇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더 적절한 개념을 확립할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의 이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제니퍼는 자아의 인지적인 부분을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었다. 그녀의 지성은 사실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한다 ; 지성의 전달체계는 그녀의 근육을 조절하는 신경과 마찬가지로 기능을 잘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어찌 해 볼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과, 그렇다고 아이에 머무를 수도 없는 자신에 대해서 좌절하는 제니퍼의 모습을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지켜보면서, 나는 다른 여성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내 자신의 희망은 그들이 성인이 될 능력이 있고 배울 수 있으며 각자 성장할 수 있다는 자각을 지녔다는 긍정적인 믿음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전통적인(traditional)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여성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여성의 경험에 가치를 두었으며 ‘남성처럼’ 생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검토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니퍼처럼 자신의 삶을 자아 외부로부터만 점검할 수 있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몇몇 여성들은 진실로 영구적으로 연약(weak)하다. 페미니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희망의 대부분은 잠재적인 강점을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애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성이 인식에 대한 잠재적 힘이 있다고 개념화하지 못하면 여성으로서의 자아정체감을 갖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만약 우리가 지금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거나 지금은 아니지만 심각한 장애를 갖게 될지 모르는 여성들을 사랑한다면, 이러한 사랑이 여자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연약한 존재나 애완동물처럼 사랑하는 낡은 방식들과 어떻게 다를까. 이 질문은 또한 아이들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도 암시하는 바가 있다. 만약 어린이들의 권리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인식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인식력을 개발하도록 북돋울 수도 있고 성장잠재력에 근거하여 그들을 차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니퍼의 역할을 장애가 있는 나의 딸로, 나 자신의 역할을 그녀의 어머니로 한정시켜 감상에 빠지게 하고 나의 양육방식과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본성 사이에서 영구적인 정체 상태로 만드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들에 분개하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성모마리아로 기르기(madonna─mothering)는 더 어리고 더 수동적인 아이들에게 필요한 태도이다. 그리고 내 자신이 수동성과 의존성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여성들에 대해서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어렸을 때 ‘장애가 있는’ 예쁜 여자아이의 의료와 교육 문제에 고상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역할 연기(role─playing)는 우리 둘 다에게 보상을 주었다. 나는 나의 강점으로 존경받았고 아이는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둘의 성숙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녀가 자신을 돌보는 방법과 그녀가 이 일을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resources)을 찾아야 했다.
우리 사회가 장애우에게 제공하는 더 훌륭한 방법들조차도 제니퍼의 어머니이자 페미니스트인 나를 힘들게 했다. 아이는 자신을 홈리스처럼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에스컬레이터에 대한 공포심 같은 것은 현실적인 것이었다.
 우리 사회는 부양받는 사람(dependent people)이 있는 가정에 대해 전통적인 핵가족에 근거한 두 가지 주요한 모델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는 더욱 자연스러운(즉  덜 제도적인)  결혼이다.
그리고  결혼을 제도(institutional)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제니퍼 같은 여성이 그녀를 돌보아 줄 수 있는 멋진 남성과 결혼하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의 결혼에서 부인은 남편과 동료관계가 되지 못하고 만약 결혼이 행복하지 못하다고 증명되더라도(심지어 학대받는 경우에도) 그 결혼을 정리할 수 없다. 우리는 여성 자신을 위한 선택을 유지하는데 자신을 지탱(support)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지만, 장애가 있는 몇몇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지탱(support)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실제로 보호작업장에서 정신지체인은 카페에서 서빙하거나 공장에서 조립하는 일 같은 신체적인 기민함을 필요로 하는 몇몇 일들을 할 수 있고, 신체적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통신판매나 사무실 업무 같은 정신적이고 언어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에 대한 통상적인 해결책은 더 어린아이에게나 적합한 부모의 보호이다. 최근 의식있는 시설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바뀌고 있다.

 

여성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클라이언트의 정서적인 욕구(need)와 함께 때로는 성적 욕구도 인정하고 클라이언트를 어린아이처럼 다루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훌륭한 케이스 워커들은 장애를 분류하는데 있어 정형화를 피하고 그들이 돕는 사람들의 개별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몇몇 기관에서는 실제로 정신지체인의 결혼을 장려하기도 한다. 부양받는 사람들을 어린아이처럼 다루는 것보다는 분명 진보한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결혼은 제도로서의 결혼이 가지고 있는 단점에서 특히 부양받는 아내들(dependent wives)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남편들도 제니퍼처럼 TV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정신이나 정서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혼을 통해 전통적인 성역할이 십중팔구 강화될 것이다.
장애에 의한 낙인을 피하려 했던 기관은 성역할에 의해 장애우를 정형화시킬지도 모른다.
더구나 장애우를 위한 훌륭한 자원들의 많은 부분이 전통적인 성역할을 유지하고 성을 억압하는데 노력하는 교리를 가진 종교종파들에게서 후원받고 있다. 이러한 조직은 클라이언트를 온전하고(whole) 개별적인 인간으로 대우하는데 공헌했을지는 모르지만 종래의 보수적인 사회적 역할을 강화함으로 “정상상태(normality)”를 확고히 하고 있다.
물론 제니펴가 보호받고 양육받으며 가능하다면 사랑받고 결혼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나도 안심할 것이다. 또한 나는 이 아이가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지적인 영역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보호받으며 다른 사람과 잘 조화를 이루기를 원한다.
그러나 기대에 차서 실제적인 계획을 해 보았지만, 나에게 매우 중요한 대답임에도 나 자신이 답할 수 없는 아래의 질문들로 되돌아왔다. 점검된(examined) 삶의 가치를 믿는 내가 자신의 삶을 점검할 수 없는 여성들과 어떻게 관련을 맺을 수 있을까. 여성으로 성인이 되는 것(growing up)에 대한 어려움을 아는 나는 전적으로 성인이 되지 못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엄마 노릇이란 아이를 독립적인 존재로 양육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아이의 엄마 노릇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장애를 보는 사회적 시각이 무시(neglect)에서 동정심(sentimentality)까지 다양한 범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성역할에 따라 정형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론을 제기할 것인가. 무엇보다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내가 사랑하는 이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나는 위의 질문 중 어느 것 하나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이 질문들이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여성의 특질(femininity)이 불리함에 처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중의 굴레를 겪고 있는 여성장애우(disabled woman)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 기초가 되는 작업이다. 페미니스트 이론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여성들의 능력에 의존하는 한 이론은 정신지체여성들의 상황을 다룰 수 없다. 우리가 결혼이나 다른 분야에서 여성의 의존성에 관해 논쟁할 때 의존(dependency)을 피할 수 없는 개개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제도 속에서 가능한 ‘일반적으로(normally)’ 살려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인(normal)” 여성의 삶이 종종 여성장애우의 존엄성에 적합하지 못한 모델로써 압박감을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니퍼에 관해 이해한다는 것은 위의 질문들이 보여주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욱 기쁘며 더욱 더 복잡하다. 물론 제니퍼는 복합적이고 역동성을 보여 주는 한 개인으로 다른 장애가 있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똑같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여성이 되기 위해 분투할 때, 나도 이러한 질문들과 싸운다.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해답을 준 몇 개의 응답이 없다면, 나는 개인이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페미니스트 엄마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나는 제니퍼를 생각해야만 한다.

 

번역/ 이수지(여성장애인번역모임)

 

작성자이수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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