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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읽는 동화] 윤수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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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까지만 해도 윤수 삼촌의 별명은 ‘키에누 리부스’였습니다. 저하고 친한 몇몇 아이들 사이에 통하던 별명이었지만, 아이들은 삼촌을 볼 수 있을까 해서 가끔씩 학원에 가지 않고 우리 집으로 몰려오기도 했어요. 우리는 숙제도 하고 새로 산 스티커 구경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마음은 모두 대문 밖으로 나가 있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삼촌은 항상 밤 열 시가 넘어야 들어오곤 했죠. 그러나 아홉 시가 되기도 전에 아이들은 모두 우리 할머니한테 쫓겨났습니다. 전에 없이 아이들이 들락거리고 늦도록 돌아가지 않자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것이 삼촌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시는 것 같았어요.
 사실 윤수 삼촌이 그 별명을 얻은 지는 한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날은 학원 수업이 없던 토요일 오후였죠. 우리들 다섯 명은 혜진이 고모네 비디오 가게로 몰려갔습니다. <메트릭스>를 보기 위해서였죠. 혜진이 고모는 처음엔 공부나 할 것이지 어린 계집애들이 몰려다닌다 어쩐다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혜진이가 자꾸 졸라대자 하는 수 없이 테이프를 내주었습니다. 여섯 시까지 돌려 달라는 조건이었죠. 우리들은 비디오 가게 건너편에 있는 혜진이네 집으로 갔습니다.
영화 줄거리는 물론 자막을 읽을 여유도 없었어요. 그저 ‘키에누 리부스’의 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죠. 빌딩 옥상에서 총알을 피하는 장면, 네오(키에누 리부스)가 모비어스를 구하러 가는 장면, 공중 충돌 장면들을 비명을 지르면서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언제 또 누구로 바뀌게 될지 모를 일이었지만, 아무튼 그 시간부터 네오는 우리들의 이상형이 되어버렸습니다.
전화가 시끄럽게 울어댔고, 그때까지 여섯 시가 넘은 지 한참 지났다는 걸 아무도 모르고 있었어요. 혜진이 고모였죠. 우리들은 네오를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테이프를 되감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초인종이 울리고 주먹으로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어요. 그새 혜진이 고모가 쫓아온 것이었죠.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네오를 넘겨 주어야만 했습니다.
혜진이 고모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에야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옷과 가방을 챙겨들었어요. 바깥은 벌써 한밤중이었죠. 찻길 하나 건너면 마을버스 종점이 있고, 그 종점에서 우린 헤어져야 했습니다. 횡단보도를 막 건너기 시작했을 때 마을버스 한 대가 들어오
고 있었어요. 버스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고,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도 보였죠. 버스 문이 열리고, 열리자마자 한 남자가 훌쩍 뛰어내렸습니다.
그 순간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어요. 우리들은 가방이 땅에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있었죠. 네오, 키에누 리부스. 바로 그 네오가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어요! 검은 반코트에 착 달라붙는 검은 바지(나중에 알고 보니 청바지), 잘 생긴 이마,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무엇보다도 쫘악 빠진 긴 다리…. 분명 꿈이 아니었어요. 불과 몇 시간 전에 우리의 이상형이 되어버린 네오였죠.
우리들이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과 부딪치고 가방을 밟으며 넘어지고 하는 사이, 네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넋이 전부 나가버린 여자애들 뒤에 서서 네오가 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를 빌고 또 빌었어요. 그 네오는 바로 윤수 삼촌이었기 때문이었죠.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구는 넷이었어요. 엄마, 아빠, 나, 제 동생까지. 우리는 큰길 건너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엄마 아빠 모두 회사에 다니시고, 저하고 동생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 두 곳을 다녀야 해서 할머니 댁에 갈 시간이 없었어요. 일요일이면 아빠는 하루종일 주무시기만 했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가끔 우리 집으로 내려오시곤 했죠.
결혼해서 지방으로 내려간 큰삼촌은 명절날에만 볼 수 있었고, 우리가 그냥 윤수 삼촌이라고 부르는 막내삼촌은 어쩌다 일요일에 가서 보면 자기 방에서 양끝으로 머리와 발만 내민 채로 이불에 돌돌 말려 자고 있기 일쑤였어요. 토요일이면 만화책이나 무협지 등을 빌려 와서 날이 새도록 읽고서 일요일 낮엔 종일토록 그렇게 잔다는 거였죠.
그런 삼촌은 저녁 먹을 때야 일어났습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우리가 와 있는 걸 보고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죠. 어느 틈에 가게로 달려가서 새우깡이며 맛동산이며, 우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과자를 사오곤 했습니다. 우리가 삼촌 체면을 생각해서 몇 개 집어먹으면, 헤죽헤죽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어요.
사실 윤수 삼촌은 멀리서 보면 참 멋있었습니다. 우리 아빠나 큰삼촌이나 할머니가 윤수 삼촌에게 귀에 박히도록 하는 말은 언제나 이랬어요.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 입을 열지 마!”
일 년 전 우리 아빠는 회사를 그만 두셨어요.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아파트를 나와 할머니 댁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윤수 삼촌이 쓰던 방은 엄마 아빠의 방이 되었고, 헌 가구나 선풍기 등을 넣어두던 작은 방은 저와 동생의 공부방이 되었죠. 윤수 삼촌은 할머니 할아버지 방이나 마루에서 자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소파에서 자기도 했어요. 식구가 일곱으로 불어난 것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윤수 삼촌이었습니다.

처음엔 아무도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이들한테 윤수 삼촌 얘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 남자가 너네 삼촌이라고?”
“그렇다니까.”
“너한테 삼촌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는데?”
“언제 묻기는 했니?”
모두들 저를 따돌리려는 눈치였어요. 놀이동산에서 제 어깨에 손을 얹고 웃고 있는 삼촌의 사진을 다음 날 가지고 갔어요. 멀리서 찍은 그 사진은 큰 키, 몸에 꼭 맞는 바지하며,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키에누 리부스와 꼭 같아 보였습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한 번 우쭐해져 보고 싶었고, 대낮에 쓸데없이 동네를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삼촌을 너무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진을 보고 난 뒤에야 아이들이 믿기 시작했죠. 거기다가 어쩌다 일찍 대문을 밀고 들어가는 삼촌의 뒷모습을 혜진이가 본 뒤부터, 저를 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부러움으로 바뀌어 있었어요.
“야, 그럼 너네 삼촌은 운동도 잘하니?”
“말밥이지!(‘당연하지’의 요즘 유행어)”
“애인은 있어?”
“야, 우리 삼촌은 나이가 많아. 아저씨야. 아저씨라고!”
“어머, 얘, 누가 결혼한댔니?”
삼촌은 옷차림은 스무 살이지만 나이는 서른 살이었어요.
“너네 삼촌 춤도 잘 추냐?”
“그렇겠지. 멋있는 남자가 무얼 못하겠냐.”
저희들끼리 자기가 찍었느니 어쨌느니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래도 어쨌든 저는 한 달 동안은 행복했습니다. 포켓몬스터 스티커랑 입체 스티커가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제 책상 서랍에 쌓여갔으니까요. 지난 토요일까지는 말이죠.
그 토요일 하필 왜 그 시간에 제가 그 골목길로 아이들과 지나가게 되었을까. 그리고 하필 왜 그 시간에, 그 밝은 대낮에 윤수 삼촌은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그것은 저의 행복을 시샘한 악마의 짓이라고밖에 단정할 수 없었어요.
모두들 새로 산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서로 비교해 가며 걷고 있는데, 저만치 앞에 마주 오는 눈에 익은 걸음걸이. 백 미터를 걸어간 거리를 줄로 그어 보면 1자로 좌악 그려질 그런 걸음걸이, 바로 윤수 삼촌이었어요. 그 순간 제 심장은 몸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뛰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서로 다른 스티커를 비교하느라 정신이 팔려 자기들의 이상형, 꿈에라도 보고 싶은 네오, 키에누 리부스가 바로 코앞에 걸어오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윤수 삼촌은 재잘거리며 몰려오는 계집애들 속의 조카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저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며 저보다 키가 큰 혜진이 등 뒤로 몸을 숨겼어요. 그리고 그날 따라 삼촌이 선물한 분홍색 모자와 목도리를 하고 나온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땅만 내려다보며 똑바로 걸어오던 삼촌이 아슬아슬하게 우리를 지나쳐 갔죠. 그냥 아무 일없이 지나쳐 버린 거였어요.
삼촌과 지나치고 난 후의 몇 걸음이 왜 그렇게 힘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혜진이가 큰 소리를 냈어요.
“야, 현정아. 이 스티커도 너 줄까?”
제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저를 알아 본 삼촌은 이미 제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요.
“헌…덩…아……!”
눈앞이 캄캄해지고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듯한 다리를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것은 순전히 삼촌에 대한 제 의리 때문이었어요. 착하디 착한 삼촌. 절대로 화를 내는 법이 없는 순둥이. 재단사 보조로 일하며 받는 월급을 봉투째 할머니께 갖다드리고, 그 월급의 십분의 일인 용돈 대부분을 조카들을 위해 쓰는 삼촌. 미안하고 고마운 삼촌, 윤수 삼촌.
저는 별안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 앞으로 네오가 헤죽벌죽 웃으며 걸어왔어요.
“허…허…헌덩아……! 어, 어, 어…어이…가? 사, 사, 사춘이… 떠, 떠, 떠보이… 사, 사…줄게.”

 

오영옥(시인)

작성자오영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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