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지민의 테마에세이] 그때 그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본문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내 손에 꼭 쥐어 준 너의 전화 카드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고맙다는 말 그 말 한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런 이을 나는 늘 동지라 말했는데.....!
홀로의 발길을 길가에 옮겨 놓을 때마다, 힘들고 어렵기 만한 그럴 때마다 입가에 묻어 흘러나오는 노랫말이다.
통칭 ‘민중가요’라고 부르던 노래 중에서 최초로 공중파 방송의 심의를 통과한 곡으로 더 많이 알려진, 바로 〈전화카드 한 장〉이다. 그 노래를 누가 만들었고 누가 불렀다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끊임없이 내 입술과 마음에 그 선율이 맴돌고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 곡의 노랫말이 남겨 주는 아득한 여운 때문일 것이다.
집은 없다 해도 자가용 한 대는 굴려야 한다던 사고 방식이 문제시되던 시절이 있었다. 핸드폰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심리적인 공황이라도 터질 것처럼 모두의 손길에 이동전화기가 한 대씩 쥐어져 있는 요즘, ‘전화카드 한 장’에 담긴 의미를 계속 간직하며 지내기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 역 등지에서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무심결에 깜짝 놀라야 할 만큼, 핸드폰은 이미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컴퓨터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생각과 생활의 틀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듯이. 내게 고마웠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너무 쉽게 잊고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아쉬웠을 때마다 가장 작은 도움을 통해 큰 희망을 선물해 주던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을까. 옛 주소록과 탈색된 명함들을 뒤적거리며 이름마저 희미해진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웠을 때, 내 손에 지하철 정액권 한 장을 쥐어 주던 이들. 주머니 속 동전만을 헤아려야 했을 때, 나를 불러내서 얼큰하도록 몇 잔의 술을 채워 주던 친구들. 완전히 탈진해서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던 순간에, 내 소총과 군장을 대신 메고 부축해 주던 구릿빛 전우들. 대안도 없이 헤매던 내 영혼을 뜻밖의 편지 한 장으로 감싸 주던 얼굴들. 그리고 그렇게 도와 주며 서로를 격려했던 순간순간의 그 체온과 마음들…….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때 그 학교에 가지 않았고 그 학과를 전공으로 삼지 않았다면, 다른 대학에 지원했거나 또 다른 입시를 준비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 사람들이 모여 있던 그 동아리에 들지 않았다면, 교통 수단을 전철이 아닌 버스로 했었다면, 그 교수의 강의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 환승역에 내리지 않고 지나쳤더라면 모든 게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의 시대 상황이 군부독재 치하가 아닌, 지금처럼 여유롭고 자유스러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젊은 학생들이 고문당하고 노동자들이 분신하며 민주화를 갈망하던 사회가 아니었다면, 외국상표 찍힌 옷은 아예 입을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던 경직성이 아니었더라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와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대신 댄스곡을 흥얼거릴 수 있는 시대 분위기였다면 진정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고등학교가 아닌 다른 고등학교에 갔더라면, 그 중학교나 그 초등학교에 배정되지 않고 다른 지역의 학교에 몸을 담았었다면 어떤 인생이 됐을까. 첫사랑의 아픔이 그 얼굴 아닌 다른 얼굴이었다면, 나의 사춘기 또한 그런 환경 아닌 다른 속앓이의 내용으로 들끓어 올랐을까. 그 노래에 미치지 않았더라면, 그 일에 몰두해서 파고들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시간의 나는 진정 무얼 하고 있었을 것인가…….
역사에는 ‘만약에(if)’가 없다고들 한다. 그렇게 되어질 운명이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흐름이었다는 얘기이다. 과거는 운명이지만 현재는 선택이고 미래는 색깔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공간일 뿐, 우리는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오늘과 같은 내일을 반복하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무관심’과 ‘타성’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채로 말이다.
날씨가 추워질 때면 길거리의 리어카 천막 속으로 기어 들어가 어묵 하나를 집어먹는다. 입김으로 뜨거운 국물 표면을 불어내면서, 군것질 아닌 그것으로 점심을 대신 때운다. 돈이 있든 없든 간에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랜 버릇으로 굳어져 버렸다.
가만히 생각을 돌이켜 보면, 언제부터 그 버릇이 생겨났는지를 가늠해 낼 것도 같다. 지금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지만 그 후배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 상대적으로 주머니에 천 원짜리가 한 장 더 많았던 나는 언제나 라면 한두 개를 끓여 작업실 구석에서 허기를 함께 때우곤 했다. 식빵 한 봉지로 대여섯 명이 냉수와 함께 식사를 대신하던 젊은 날의 기억들……. 무언가를 만들겠다고 정신없이 지내던 시간들이 보다 선명한 색채로 눈앞에 떠오른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대중적으로 화려해져서 옛 기억을 잊어버린 듯한 이들을 제외한, 마음 가까웠던 나머지 얼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쏟아붓’던 그 동료는 어떻게 됐을까. 물감보다 더 진한 코피를 쏟으며 밤을 새우던 그 화가 친구는 계속 붓을 잡고 있을까. 고교 시절 내 삶을 정신적으로 지배했던 그 친구는 이 땅 위에 있는 걸까. 보고 싶은 얼굴들 모두는 도대체 어디에 잠겨 있기에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인가.
오래된 연락처로 아쉽게 수소문해 보지만, 아직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 또 한 번의 한숨을 내지르곤 한다. 그때 그 사람이 아니었고 그 얼굴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어디에 있을지도 가늠하지 못할 진득한 의미들이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다. 당시의 신세를 갚을 만한 능력은 아직 없다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언론에 광고를 낼 바 아니라면, 이젠 그 얼굴들을 찾는 작업에 진지하게 몰두하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얼굴들 속에 내 삶의 소중한 일부분들이 조각처럼 나뉘어진 채로 간직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풍든 숲 속의 두 갈래 길에서 가지 못한 길을 바라보아야 하는 프로스트의 시 한 구절처럼, 내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삶의 조각들이 그들 가슴 안에 새겨져 있기에 이젠 그들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놓쳐 버린 게 무엇인지, 내가 망각하고 있는 게 어떤 것인지, 진정한 나의 길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손길을 더해야만 그 방향으로 내 시선을 돌릴 수 있는지를 더 늦기 전에 알아내야만 한다. 더 늦기 전에, 정말로 더 늦어지기 전에 말이다.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를 하라고 / 내 손에 꼭 쥐어 준 너의 전화 카드 한 장’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고 / 고맙다는 말 그 말 한 마디 다 못하고 돌아섰’기 때문에, 이처럼 무심하게도 그 사람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나는 그저 나의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 그런 입으로 나는 늘 동지라 말했’던 까닭에, 내 삶의 발길들이 그처럼 아프게만 전개됐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편지 쓰는 일마저 컴퓨터에 밀려나 하찮은 노동으로 치부되는 지금, 그리운 옛 사람들의 주소를 편지봉투에 하나씩 옮겨 본다. 잊혀진 얼굴들에게 오래된 사연을 보내고 싶다. 마주 볼 거리에 있지 않다면 글이라도 마주 대할 수 있도록,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내 생활의 기록이라도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며 새롭게 주소록을 정리해 본다. 이미 오래 전에 바뀌어 버린 연락처라 해도 그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내 가슴 안에서 그 얼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
버릇처럼 만나고 헤어지던 습성이 쌓여졌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게 무엇인지를 떠올리지 못하게끔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업무상으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만나고 술 몇 잔 비우다가 헤어지고……. 그렇게 반복해서 자기 일에 매달려 있다가 또 연락해서 마주앉아 잠시 떠들다가 각자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보이고, 잠들고 나면 또 하루가 시작되면서 어제의 그 자리에서 어제의 ‘나’를 덧없이 반복하기만 하고…….
이젠 한 번쯤이라도 일상의 틀을 깨 보고 싶다. 새 천년이 시작됐다는 게 만병통치약은 아니기에, 이제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작업으로 나의 나날을 이어가야 할 일이다. 다시 한 번 되씹어 보련다. 그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진정 나는 무엇을 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어느 자리에서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 그때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사람과 타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다시 만날 누군가가 생겨난다면, 내 입가에 묻어 있는 노랫말의 마지막 대목을 전하며 두 손을 맞잡고 싶다. 보고 싶었다는 한 마디와 함께, 잊혀진 채로 지워져 있던 내 삶의 조각들을 다시 맞춰 보고 싶다. 그것이 더 아파지는 과정이 될지라도, 설령 그것 때문에 더 큰 상처와 쓰라림을 반복하게 될지라도 이제는 찾아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싶다. 진정으로 보고 싶은 그 얼굴들을 마주 대하고 싶다. 더 늦기 전에, 더 늦어지기 전에 마지막 한 대목을 영혼의 고백으로 전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전화 카드도 사야겠어 / 그리고 네게 전화를 해야지. 줄 것이 있노라고…….’
글/ 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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