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읽는 동화] 술래와 풍금소리
본문
그 인형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지닌 인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윤림이가 그 인형을 처음 본 것은 외할머니의 방에서였습니다.
그 헝겊인형은 외할머니의 낡은 반닫이 속에 깊숙히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꼬질꼬질 때가 묻고 얼룩진 그 인형은 외할머니가 간직해온 물건 중 가장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윤림이가 여섯 살 적 외할머니의 반닫이에서 그 인형을 처음 찾았을 때 - 그 놀라운 기쁨은 지금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헝겊인형은 여느 흔한 인형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세월의 강을 건넌 듯 낡고 바랜 것도 그렇지만 서양인형처럼 예쁘지도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헝겊으로 손수 만든 듯 얼굴의 눈, 코, 입은 단정히 수놓아져 있었고 인형이 입은 옷은 솜씨좋게 꼼꼼히 만들어져 정성이 깃들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온 동안 인형의 얼굴 표정은 일그러져 어쩐지 슬퍼보였습니다. 마치 “저를 꼭 안아주세요”하고 나즈막히 속삭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윤림이는 그 헝겊인형이 어쩐지 정이 갔습니다. 외할머니가 없는 빈방에서 윤림이는 그 헝겊인형을 엄마처럼 안아주고 업어주면서 혼자 놀았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돌아오신 외할머니가 방에 들어오셨습니다. 외할머니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윤림이를 보자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윤림이의 등에 업은 헝겊인형을 나꿔채듯 홱 빼앗아 다시 반닫이 속에 깊숙히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붕어 자물통으로 철컥 잠궜습니다.
“할머니 미워!”
윤림이가 울면서 인형을 다시 달라고 떼를 썼지만 외할머니는 도리질만 할 뿐이었습니다.
“윤림아, 그 인형은 안돼! 엄마가 더 예쁜 인형 사줄께.”
“싫어! 싫어! 다른 인형은 싫어! 난 저 인형이 좋단 말야!”
엄마는 윤림이에게 새 인형을 사주며 달랬지만 윤림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후 윤림이는 그 헝겊인형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윤림이는 그 인형에 대한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곳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교내 합창대회 때 윤림이는 피아노 반주를 맡게 되었습니다. 합창 곡목은 ‘고향의 봄’이었습니다. 윤림이는 그 곡을 집에서 피아노로 여러 번 반복해서 연습했습니다.
그 때, 외할머니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윤림이는 그 노래소리만 들리면 할머니가 때때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윤림이는 피아노를 치다 말고 가만히 할머니의 방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외할머니를 본 순간 윤림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꽃님아, 무섭지? 울지마. 곧 포탄소리가 멎을 거란다.”
외할머니는 반닫이 속에서 꺼낸 인형을 품에 꼭 안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그만 나오세요. 숨바꼭질은 더 이상 하기 싫어요. 못찾겠다 꾀꼬리!”
외할머니는 손나팔을 대고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인형을 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꽃님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손을 놓는 바람에 사람들이 땅바닥에 떨어진 너를 밟고 지나갔어! 그래서 내가 아버지 손을 놓쳤던 거야.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았던 거야. 꽃님이 손을 놓았던 거야.”
외할머니는 내동댕이쳤던 인형을 다시 주어 품에 안으며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엌에서 일하던 엄마가 놀라서 달려 왔습니다.
“어머니, 왜 또 이러세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윤림아! 어서 물 한 컵만 가져오렴.”
윤림이가 부엌에서 냉장고 속의 물을 컵에 따라 오는 동안 외할머니는 아기처럼 인형을 품에 안고 누운 채 운을 감고 있었습니다. 외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는 엄마의 눈자위가 젖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할머니가 오래 못 사실 것 같구나.”
엄마는 외할머니께 이불을 덮어 드린 후 가만히 방문을 닫고 나오면서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오랜 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습니다.
“엄마, 꽃님이가 누구예요?”
윤림이가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꽃님이는 외할머니의 어릴 적 이름이란다.”
그러면서 엄마는 외할머니의 인형에 대해 나즈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꽃님이네 집에는 풍금이 있었습니다. 꽃님이 어머니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풍금을 쳤습니다. 어머니가 풍금을 치면 아버지와 꽃님이는 풍금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에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꽃님이가 사는 동네에는 노래처럼 꽃이 피었습니다.
과수원에서는 북숭아꽃과 살구꽃이 피었고 뒷산에는 진달래가 꽃불을 지핀 듯 피었습니다.
바느질 솜씨가 빼어난 꽃님이 어머니의 동그란 수틀 속에는 고향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반짇고리 속에는 무지개빛 고운 색실과 매화꽃이 수놓여진 골무와 바늘꽂이, 그리고 모양이 각기 다른 단추같은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꽃님이는 어머니의 반짇고리 속의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놀길 좋아했습니다. 골무를 손가락에 끼워 인형놀이를 하기도 하고 저고리를 짓다 남은 색색의 조각 헝겊을 가위로 오리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색색의 조각 헝겊을 이어 밥상보도 만들고 꽃님이가 덮는 작은 이불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이불을 덮고 잠이 들면 꽃님이는 늘 고운 꿈을 꾸곤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꽃님이에게 자투리 헝겊으로 인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인형의 눈, 코, 입은 어머니가 꼼꼼히 정성껏 수놓아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형처럼 보였습니다. 동생이 없는 꽃님이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헝겊인형을 품에 안으며 동생이 생긴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어머니는 꽃님이에게도 인형옷과 똑같은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누가 인형이고 누가 우리 꽃님이인지 모르겠구나!”
아버지는 인형을 안은 꽃님이를 번쩍 들어 안아주면서 너털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의 배가 점점 불러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만삭이 된 어머니가 피난대열에 낀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게다가 시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계셔서 어머니는 고향에 남기로 했습니다.
“여보, 꽃님이나 데리고 가세요. 저는 어머님과 이곳에 남겠어요.”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으니 전쟁이 끝나는대로 다시 데리러 오리다. 그 동안 몸조심하고 어머님을 잘 부탁하오.”
아버지는 꽃님이의 손을 잡고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남쪽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꽃님이는 아버지의 손이 참 크다고 느꼈습니다. 꽃님이의 품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인형이 안겨져 있었습니다. 피난대열에 낀 아버지와 꽃님이가 푸른 강물 위에 놓여진 어떤 다리를 지날 때였습니다. 저 멀리 폭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피난민들은 다리가 폭파될 지 모른다면서 서둘러 그 다리를 건넜습니다. 꽃님이가 품에 안은 인형을 떨어뜨린 것은 그때였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진 인형은 사람들의 발에 마구 짓밟혔습니다. 아버지가 꽃님이의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인형은 점점 꽃님이와 멀어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꽃님이는 인형을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꽃님이는 그만 아버지의 손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때 귀를 찢는 듯한 폭음소리가 나면서 다리가 부서졌습니다. 꽃님이는 흙투성이가 된 인형일 안고 다리 난간에 숨어 울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이!”
꽃님이가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메아리만 들려 올 뿐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 후, 이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꽃님이는 어느 덧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십년 세월은 고아나 다름없는 어린 꽃님이에겐 말할 수 없이 모진 술래의 세월이었습니다. 꽃님이는 오랜 세월 동안 술래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 방방곡곡을 헤매었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꽃님이는 우연히 신문에 난 아버지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낸 시집이 화제가 되어 신문에 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꽃님이의 기억에도 겨울 날 이른 새벽 문득 깨어보면 성에 낀 창가에서 아버지가 손을 호호 불며 무언가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신문 기사에는 가족사진도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과 즐거운 한 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꽃님이는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꽃님이가 술래가 되어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동안 아버지는 꼭꼭 숨어 다시 가정을 이루어 살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꽃님이는 신문사에 물어 물어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의 집 대문에는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의 이름이 문패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꽃님이를 보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날 저녁 꽃님이는 아버지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난 네 친아버지가 아니란다. 널 낳아주신 아버지가 학도병으로 끌려가 소식이 없었지. 생각하면 울 민족의 비극이야, 우리 모두 역사의 희생자인 셈이지.”
아버지는 커다란 손을 꽃님이의 가냘픈 어깨 위에 얹으며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꽃님이는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토록 애타게 찾은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니.
‘그래, 그때 내 손을 놓은 건 아버지였어. 친아버지라면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꽃님이는 다시는 아버지를 찾지 않기로 했습니다.
세월은 또 다시 바람처럼 지났습니다.
꽃님이는 시집을 가서 어여쁜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그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족으로부터 꽃님이를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이다가 병원을 찾아갔으나 끝내 아버지는 꽃님이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손에는 북에 두고 온 꽃님이 어머니의 사진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엄마는 엄마의 외할머니 -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어머니 사진과 헝겊인형을 함께 관 속에 넣어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반닫이에서 발견된 낡은 시집도 함께 넣어드렸습니다. 저 세상에 계신 외할머니의 어머니께서 헝겊인형과 사진을 보면 딸인지 금세 알아보시겠지요.
외할머니는 지금쯤 어머니가 수놓은 수틀 속 고향집에서 풍금소리를 듣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글/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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