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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테마에세이] 떠나야 할 시간을 안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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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Friends,
I have been fortunate to draw Charlie Brown and his friends for almost 50 years. It has been the fulfillment of my childhood ambition.
Unfortunately, I am no longer able to maintain the schedule demanded by a daily comic strip, therefore I am announcing my retirement.
I have been grateful over the years for the loyalty of our editors and the wonderful support and love expressed to me by fans of the comic strip.
Charlie Brown, Snoopy, Linus, Lucy… how can I ever forget them ….

(지난 50년 간 찰리 브라운과 그의 친구들을 그리게 된 것은 행운이었고, 어릴 적부터 꿈꿨던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젠 더 이상 일일 연재물을 그릴 여력이 없어 은퇴를 발표한다. 변함없이 뜨거운 지지와 관심을 보여 준 독자와 신문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찰리 브라운, 스누피, 라이너스, 루시… 나는 이 친구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스누피’의 작가 찰스 슐츠가 작품 활동 중단을 알렸던 지난 해 연말의 작별 인사였다. 비록 77세의 고령에다 대장암을 치료하고 있고, 일일 연재를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건강 상태가 안 좋았음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의 은퇴 선언은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과 아쉬움을 던져 주었다.
50년…… 그 세월의 깊이에 우선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늘 우리 곁에 정다운 모습으로 존재하던 스누피와 친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은 낯익은 무언가와의 작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실감을 우리에게 안겨 줬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의미를 두고 싶은 부분은 그토록 유명했던 작품의 연재를 스스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작가 자신의 결단, 그것이었다.
세계 75개국 3,000여 신문에 40개 언어로 연재되던 작품, 더욱이 연령과 국경을 초월하며 최고의 사랑을 받던 작품을 자신의 뜻에 따라 접어두겠다고 결정했다는 사실 - 그건 보통의 각오가 아니고선 이뤄질 수 없는 중대 결단이었을 것이다. ‘가족과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던 그는 은퇴 선언을 한 얼마 후 자택에서 잠자고 있던 중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마치 그렇게 다가올 자신의 운명 모두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떠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비록 그것이 슬픔이 되더라도, 그 운명 때문에 신을 원망한다 하더라도, 떠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떠난다는 것은 어려움만큼이나 박수를 보내 줘야 할 일이다. ‘세계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임무를 마치고 자신의 본업인 목수로 돌아갔던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퇴임 후엔 운전 면허를 따서 전국 여행을 다니고 싶다”며 편한 웃음을 보여 주신 김수환 추기경님.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을 때 아름답게 물러선 ‘국보급 투수’ 선동렬과 미국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등.
떠나야 할 개인적 이유가 있었다 해도, 마지막까지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추한 모습 보이는 이들보다 그들이 아름답게 보여지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때를 놓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엔 많이 있다. 순간의 선택이라 해도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믿어질 땐 과감히 마침표를 찍을 줄 아는 마음, 그것은 진정한 용기로 기록되며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전해 주게 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봄 한철 / 격정(激情)을 인내한 /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 분분한 낙화…… / 결별(訣別)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 지금은 가야 할 때.’ 이형기 님의 시 「낙화」를 통해서 우리는 떠나는 이와 보내는 사람의 마음을 한 편의 영상처럼 읽을 수 있다. 「목마와 숙녀」에서도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떠나갔지만, 남겨진 이들은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작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비록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이고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운다 해도, 떠나야 할 때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을 붙잡아선 안 될 일이다.
이별은 순간이고 그 여운은 영원을 휘어잡는다. 조금 전까지 바로 곁에서 따스한 의미를 안겨 주던 존재가 말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 미련과 적적함은 타인에게 투영시켰던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하며 자신의 모든 걸 뒤돌아보게 만든다. 얼마나 그 사람이 내게 소중했는지, 얼마나 큰 위안을 그 얼굴로 인해 얻어왔는지를 비로소 느끼게 된다는 것 - 그것이 바로 떠나감의 뒷모습이자 ‘이별’이라는 그림자가 남겨 주는 마음 아픈 선물인 것이다.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늘 곁에 있으면서도 ‘당연히’ 곁에 있으리라고 무심하게 넘겨버리는 나날이 늘어만 갈 때, 자연의 법칙은 우리의 망각을 깨버리며 소중한 ‘그것’을 거두어 간다. 그때서야 그 빈 공간을 뒤늦게 확인하며 발버둥쳐 보지만 이미 늦어버렸음을 인정해야 할 뿐, 아무것도 어제를 오늘로 바꿔 주지는 못한다. 살아가면서, 한 살씩 더 나이를 늘여가면서 배우게 되는 진실은 우리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한계가 눈앞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라 생각된다.
가끔씩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허망한 손놀림이라 해도 그렇게 바늘을 덧없이 돌리면서 오늘을 어제로, 어제를 그날 그 자리로 되돌리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걸 이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아쉬움에 젖어 있을 때, 우리는 남겨진 의미들을 하나씩 헤아려 보게 된다. 내게 남겨진 소중함이 얼마나 곁에 있는지, 내가 모르고 지나치던 사이에 모두가 떠나가 버린 것은 아닌지, 혹시라도 혼자 남겨진 채로 세상은 벌써 저 먼 곳으로 떠나가 버린 것은 아닌지….
모든 일에는 그 일에 맞는 시간이 있다. 그 순간이 아니고선 맞이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 앞에 우리는 늘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그 말 한마디를 다하지 못했기에 남겨진 생을 ‘사랑했다’는 여운만 되씹으며 견뎌야 하는 것처럼, 또한 ‘보고 싶다’는 사연 한 장 건네지 못한 미련 때문에 평생의 일기장을 ‘그립다’는 표현 하나로 채워 가야 하는 것처럼.
“나는 다르게 살고 싶지 않아. 그리고 누구와도 나를 바꾸고 싶지 않아.”
〈생의 한가운데〉 주인공 니나는 그렇게 외치며 자기 인생에 몰입해 간다. 그 말은 누구나 해 볼만한 쉬운 표현 같지만, 실제로 그것 이상 어려운 언어는 별다르게 존재하지 않는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겠다는 결심을 내린다는 것, 그리고 마음뿐이 아니라 직접 짐을 꾸리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는 결단을 실천한다는 것……. 그 동안 우리는 무엇 때문에 떠나지 못했고 무엇 때문에 주저앉아 있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무엇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들었는지, 그 무엇이 떠나려는 내 발길을 붙잡고 있었는지, 무엇 때문에 떠나지도 못하며 어제만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지도 이젠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 된 듯하다. 절반을 넘기고 있는 인생에서 남겨진 절반도 지나온 어제처럼 지내야 하는지, 아니면 지나왔던 과거를 그대로 재방송하는 뒷걸음질로 미래를 소비해야 할 것인지의 선택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달려 있다.
‘너 때문’이 아닌 ‘나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라 반성하는 것으로 새로운 내일의 시간은 시작될 것이다. 그걸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오늘의 ‘나’하고 작별하는 일이다. 떠나야 할 때를 느꼈을 때, 그 생각이 단순한 생각만으로 되씹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주어진 운명이라 굳어져 갈 때 결단의 발걸음은 시작되어야 한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한다는 걸 통해 너를 또한 위하게 되는 상생(相生)의 선택을 이젠 내려야 한다.
찰스 슐츠가 얘기했듯이, ‘찰리 브라운, 스누피, 라이너스, 루시… 이 친구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는 작별 인사를 누군가의 이름으로 대신하며 내 일기장에, 나의 편지 속에 지금부터 옮겨 적어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의 이름이 들어가게 될지, 내 이름은 누구의 기록 안에 담겨지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의 빈 공간을 느껴 줄 이를 찾아 그들 곁에 내 호흡을 이젠 담아두어야 한다.
언젠가는 이 지면에서도 내 이름이 사라지고 그렇게 잊혀지게 되겠지만, 그래도 기억 한 구석에 새겨줄 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오늘을 정리하고 내일을 그려 본다. 그렇게 어제를 되돌아보며

 

글/ 채지민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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