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제] 정수영의 도전
본문
정수영
1949년생으로 어렸을 때 온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한국 국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뇌성마비 장애우인 그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27세에 「희망의 집」에 입소했다. 이후 국적으로 인한 연금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국민연금의 국적차별을 없애기 위해 1992년 「재일외국인 연금차별을 없애는 모임」을 결성해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도전인 동시에 싸움인 나의 자립생활
지금의 사랑, 옛 사랑
희망의 집에 온지 9년, 기본적인 생각 자체에는 변함이 없지만 최근 의욕은 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희망의 집 자체도 그렇고 나 자신도 그렇고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것을 어떻게 나 나름대로 해결해 나가야 할 지가 과제인 것 같다.
지금은 그때 그때 매순간만을 충실히 살아가려고 한다. 공부할 때에는 공부만, 운동할 때에는 운동만, 놀 때에는 노는 것만을 열심히 충실히 해 나가고 싶다.
예를 들면, 지금 나는 사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옛날의 사랑방식과는 다르다. 옛날의 사랑은 어떻게 하면 함께 지낼 수 있을까였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과 식사할 때나 이야기할 때에 그 순간 순간을 충실히만 지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 이 정도로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라는 자신의 기분에 자신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자기의 기분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드러내지 않고 억누른다는 것은 젊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뒤섞여 지금 나의 마음은 조금 뒤숭숭한 상태이다.
요즘의 뇌성마비는 무정의형(athetotic)보다는 강직형(rigidity)이 많은 것 같다. 나와 같이 무정의형 뇌성마비는 생활하는데 정말 힘이 든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너는 움직임이 적고 필요없는 곳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심장에 부담이 가서 수명이 짧아진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머니는 “너 보다 일찍 죽고 싶지 않다”는 말도 자주 하시곤 했다.
그 말을 듣고 이전에는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 나 보다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순서니까 당연하지’라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장애 자녀를 가진 부모로서 당연한 생각이 아니겠느냐는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부모의 심정을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고, 나 자신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이제까지는 무엇이든지 어머니에게 의지하고 부탁했었고 어머니는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어머니가 아프셨다. 그 때 처음으로 이제부터는 내가 어머니를 위해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도와줄 수 있는 것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억지로 집에 가지 않고 어머니가 한가할 때 한 번씩 가는 것이다. 어머니는 종종 “언제 데리러 가면 좋겠어?”라고 전화를 하지만 나는 “지금 바쁘고 할 일이 많아서 당분간 갈 수 없어”라고 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말해두면 어머니는 당신 자식이 열심히 살아가는구나, 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 가면 어머니의 최대 걱정은 화장실문제와 마음대로 외출을 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지금은 유니본(대소변 처리도구)이라는 장착기로 대신하고 있고, TV조작도 간단한 스위치로 혼자서 가능하게 되었다.
집에 있으면 어머니는 자주 “심심해 보여서 불쌍하구나”라고 말하지만,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끔 하고 싶다. 어머니에게 걱정끼쳐 드리지 않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효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투표도 할 수 없는 신세
선거철이 되면 솔직히 말해 지금도 괴롭다. “투표에 참여하시죠?”하고 질문받을 때 손을 들 수 없는 것이 분하다. 얼마 전 어느 주민에게 “왜 투표를 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내 한 표 정도야 아무런 영향도 없어”라는 말을 들었다. 나처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한 표를 소중하게 행사할 수 있었으면 싶다.
같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고 생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이 있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 나는 국적을 억지로 일본으로 하려는 생각은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가 한국인인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응원하지만, 일본과 대결을 하게 되면 곤란할 때가 많다.
한국 국적으로는 좋은 곳에 취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조카들은 일본 국적으로 바꿨다. 그러나 부모나 누나 동생이 국적을 바꾸지 않은 것은 귀찮은 것도 있지만 자신이 한국인임에 자긍심을 갖고 있기 때문인 듯 하다.
국적문제에 대해서는 풍속, 역사, 언어 등과 함께 더 많이 공부하고 배우고 싶다. 그리고 자신의 국적에 대해 자랑할 수 있도록 되고 싶고, 나아가 과장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본과 한국과의 가교역할을 하고 싶다. 또한 선거권, 연금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설령 작은 목소리에 지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주장해나갈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컴퓨터
지금 나는 워드프로그램에 푹 빠져 있다. 워드로 문자를 활용하기에는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체력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문장을 만들고 자기 나름대로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자체가 무척이나 재미있고 기쁘다.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시간에는 모든 것을 잊게 해준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잊고 열중하게 된다.
지금은 나만의 전용 컴퓨터를 갖고 싶다. 그리고 컴퓨터를 활용하면 어떠한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차있다.
나는 글씨를 쓰지 못하는 사람이 컴퓨터나 워드에,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휠체어에 많은 돈을 투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손이 될 수 있고 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계에 구속받아서는 안되겠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고안해 가는 것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성장해 나가는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이 장애우면서도 장애우가 싫었다. 자원활동을 하는 ‘세상을 여는 다리’라는 청각장애우 그룹사운드를 만났을 때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 어렸을 때 집 근처에 청각장애우가 있었는데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가 때때로 이상한 소리를 낼 때 나는 무척 무서웠었다.
하지만 세상도 많이 변했다. 장애우를 만나게 되면 옛날에는 피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많아졌다.
희망의 집에서 자원활동위원을 담당하게 되면서 여러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늘었다. 자원활동자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불쌍하니까 도와주어야 한다는 기분으로 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지만 점점 좋은 방향으로 변하여 서로 같은 인간으로서의 인간관계를 넓혀갔으면 싶다.
그러나 나는 장애우니까 노력해야 된다는 말은 정말 싫다. 1986년에 NHK에서 희망의 집이 방영되고 나서 자살을 생각하다가 그만둔 사람도 있었다지만, “저런 사람들도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고 있는데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장애우들을 특별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자연스러운 만남 속에서 당연한 존재로서 우리 장애우들과 우리들이 하고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비쳐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그리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만남 속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아직 나는 지금부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곳에서 일생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나이는 마흔 전이다. 이대로 만족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만족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뭔가 씁쓸하지는 않을까. 설령 인생의 마지막을 여기에서 보낸다 하더라도.
얼마 전 ‘휠체어를 타고 거리에 나가는 모임’의 한 사람이 시설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자유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시설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 있는 사람의 하기 나름으로 일반 집에서처럼 지낼 수 있다고 반론했지만, 역시 자기만의 가정을 가지고 싶다는 꿈을 좀 더 쫓고 싶다.
9년간 이곳에서 생활해오면서 실감한 것은 집단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구속받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자기생각만 해서는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수면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반해 모임활동, 토론 등 단체활동도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인의 자유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생활방식을 터득해나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적인 과제이다. 나는 여기에 와서 여러 선생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왔고, 주민여러분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지금부터는 내가 자원활동 담당을 해오면서 발이 넓어진 것을 활용하여 자원활동 모집 등 도움을 줄 수 있는 쪽으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말해주고 싶은 것은 물론 나를 포함하여 “좀 더 어른이 되자”는 것이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10년이 지나고 나서 절실히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나는 지금부터다!
제2부 거북이의 자립 - 정수영의 자립의 길
광명의 시대로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45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남겨진 많은 기억들은 내 뇌리에 치마주름처럼 새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때 그때마다의 새로운 만남들은 나의 길을 안내해주고 밀어주고 지탱해 주었다.
1945년 5월 29일 호흡기능이 정지되면서 가사상태로 세상에 나온 저는 아주 약한 맥박의 고동에 의지하면서 생사의 사선을 넘나들었다.
숨이 끊어질 듯한 미약한 생명을 필사적으로 방어해준 사람이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할머니다.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고 보자”라고 강하게 염원한 덕분으로 알고 있다.
막 태어난 나의 몸을 화롯가에서 체온을 유지시키면서 필사적으로 숨을 쉬도록 해주신 할머니의 재주로 꺼져가는 생명에 불을 지피게 되었다. 뇌성마비로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게 된 나를 묵묵히 지원해 준 것은 이렇게 가족 한사람 한사람의 힘이었다. 그리고 특히 할머니는 저를 가장 많이 귀여워해 주었다. 등에 업고 많은 곳을 보여주고 데려다 주신 분도 할머니이며 생일을 꼬박꼬박 챙겨주신 분도 할머니였다. 이런 할머니의 애정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자랐다.
한신대지진이 일어난지도 벌써 1개월이 지났다.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규모가 컸다고 말할 수 있는 이번 지진은 효고현의 남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5천명이 넘는 생명을 앗아갔고, 지금도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피해자 한사람 한사람이 고난을 극복하려고 필사적으로 분발하고 있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힘들겠지만 힘을 모아 잘 헤쳐나가기를 바란다.
특히 걱정되는 것은 재해지역에 살고 있는 장애우나 노인들이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도 재일한국인이면서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다. 그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국적에 의한 연금차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중에 그가 무사히 잘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안심했다.
나에게 있어서 자립이라는 것은 도전인 동시에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남들과 같이 보통 평범하게 생활하고 싶은 것이다. 이를 위한 자립정신이 나와 나를 둘러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원래 서로가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나의 자립생활을 위해 도와주고 계시는 분 중에는 몸이 약한 사람도 있다.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서만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그 분에게는 가벼운 일만 도움을 받고 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역할은 다양하게 있다. 말벗이 되어줄 사람, 식사 케어를 해줄 사람, 이동을 위해 운전을 해줄 사람, 함께 외출을 해줄 사람 등을 찾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벌써 각자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봄, 벚꽃이 만발하는 가운데 친구들은 가슴에 큰 희망과 꿈을 안고 익숙해진 교정을 뒤로했다. 친구들의 표정은 밝게 빛나고 있었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름다운 표정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런 세상살이에 굴하지 않고 강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나고야시의 쇼와구에 있는 중앙종합복지전문대학교에서는 2년 동안 3회 실습이 있다. 실습의 제3단계는 학생들이 우리 장애우 한사람 한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장애우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실습을 실시하고 있다.
졸업식이 끝나고 돌아갈 무렵, 반갑게도 작년 나를 담당해준 사람을 만날 수가 있었다. 내심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매우 기뻤고, 무엇보다도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떠한 큰 산이 놓여있어도
나의 자립체험도 벌써 8개월째를 맞이하고 있다. 요즘 들어서 조금 안정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쨌든 어머니에게 이해를 구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 자립체험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는 부정적이었다. 만일 어떠한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 어머니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나와 어머니는 자립생활에 대한 생각을 각각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타인으로부터의 도움은 될 수 있으면 받지 않으려고 하고, 나는 되도록이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자립생활의 필요성을 반드시 어머니에게 이해를 받고 싶다.
그런데 나의 자립체험을 도와준 자원활동자들 사이에서 결혼에 골인하는 커플이 생겼다.
그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었던 내가 두 사람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매우 기뻤다. 이러한 것을 어머니께서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결혼하는 커플이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것도 나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하고 반가운 일이었다.
자! 자립을 위하여 분발해나가자. 어떠한 큰 산이 놓여있어도.
나는 얼마 전부터 자립체험을 시작했다. 그 때까지 나는 시설에서 18년간 생활했다. 주변에는 민가가 전혀 없고 세상과는 격리된 곳이었다.
시설에서 생활하면서 싫었던 것은 입소자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사무적인 일부 직원들의 태도였다. 그러한 직원들도 처음에는 희망과 이상을 품고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느 새인가 사무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왜일까.
문제는 시설 그 자체에도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설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첫 번째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에 구속받으면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생활이 당연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일생을 시설에서 생활한다는 자체에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시설에서 일생을 보낼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설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한편으로는 장애상태나 주변사람들의 충고 등을 생각할 때 어렵지 않을까라는 고민도 함께 했다.
장애우의 해방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상담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자립체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과 도움이 없으면 시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사람들로부터 “나가고 싶으면 혼자서 무엇이든지 스스로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든지, “케어가 필요한 주제에”라는 말을 들을 때면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맞는 생활을 시도해보려고 하고 있다. 어려움과 고난이 따르더라도 시설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는 분명히 좋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의 의사결정으로 행동하거나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쉬어가는 코너〕
山씨의 시집!
꿈의 세계
푸른 창공으로 새가 되어 둘이서 날아요.
(1979. 8. 9)
홀로된 휠체어
휠체어 한 대가 한쪽 복도구석에 휑하니 놓여있다.
그 휠체어가 중얼거리고 있다.
이런 나에게 타주는 사람은 없을까. 다른 모두는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하지만, 난 홀로 되어 외롭다.
나처럼 홀로된 휠체어가 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언젠가 반드시 나에게 타주는 사람이 나타나겠지.
하지만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
(1983. 6. 15)
달력
나의 침대 맡에는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달력이 하나 걸려 있다.
이 달력을 보면서 나는 매일 인사를 한다. 이 달력은 나에게 있어서 보석과 같고 연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별(헤어짐)
사람들은 다양한 이별을 경험하는 동안에 고독을 느끼게 되고 성장하여 나간다. 하지만 진정한 이별은 마음과 마음의 이별이다. 이 이별만큼 슬프고 외로운 것은 없다. 그러니까 나는...
글/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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