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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테마에세이] 내 추억 한 자리엔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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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봄이 되면 / 어린 시절 어머님의 말씀 /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 보이는 곳에서 / 보이지 않는 곳에서 /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 항상 봄처럼 꿈을 지라…….’ 

매년 그 계절 그 시간이 되면 ‘추억’이란 이름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는 법이다. 아득한 그 거리의 여운이나 미련, 지워지지 않는 누군가의 생일 즈음, 무슨 기념일이나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순간 같은……. 사사로운 일까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듯이 마음에 담아두던 기록들이 계절마다 낙엽처럼 떨어져 내린다.
시인 조병화 님의 시 ‘해마다 봄이 되면’의 한 구절처럼, 여름의 문턱에 다다를 때마다 나는 하나의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향수를 앓듯이 시간의 흐름을 남모르게 느끼게 된다. 대학 시절, 매년 가을마다 막을 올리던 학술제 형식의 공연 행사가 생각나는 것이다.
독일을 상징하는 여신상(女神像)의 이름인 게르마니아(Germania). 우리의 축제 명칭은 ‘게르마니아’였고, 그 단어는 지금까지도 많은 동문들에게 하나의 상징처럼 가슴에 새겨져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작은 독일’을 우리의 마당에 불러들이는 행사였다고 할까? 귀에 익숙한 독일 민요와 흥겨운 민속 무용, 독일어로 무대에 올리는 원어 연극, 우리 노래를 바꿔 부르는 번안 가요, 학술 세미나 개최, 독일 문화 전시회 등 다채로운 면면들이 캠퍼스의 가을을 수놓곤 했다.
‘솔솔 부는 봄바람 쌓인 눈 녹이고…’, ‘노래는 즐겁고나 산너머 길 나무들이 울창한 이 산에…’, ‘웬 아이가 보았네 들에 핀 장미화 갓 피어난 어여쁜…’ 같은 곡들이 독일 민요였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낯익게 부르던 노래가 우리 곡이 아니었다니. 당혹감만큼의 반가움이 교차하기도 했었지.
‘10월제’, ‘뮌헨 페스티벌’, ‘맥주 페스티벌’ 등 다양하게 불리는 그들의 가을 축제를 접할 때마다 느껴 보던 넉넉함과 여유스러움, 그것을 우리 또한 간접적으로나마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전공에 맞는 독문학도가 되었고, 보이지 않는 정신적 영향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게르만 정신’이 무엇인지를 행사 준비를 통해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새내기 시절에 같이 강의를 듣던 불문과 학생들과 비교하는 것도 당시엔 재미있는 일이었다. 부시시하고 푸릇푸릇한 입학생들은 첫 방학을 계기로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독문과와 불문과생들은 대표적인 표본으로 얘기되곤 했다. 여름방학이 지나면 불문학과 여학생들은 웨이브진 머리에 눈에 띄는 화장과 블라우스 같은 정장 스타일로 바뀌지만, 독문학과 여학생들은 질끈 묶은 생머리에 세수만 하고 나온 듯한 맨얼굴, 티셔츠와 청바지 그대로였다. 그 정도는 방학을 지날 때마다 심해지곤 했었지.
하나의 언어가 인간과 집단에게 주는 정신적 지배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4년 내내 청바지와 운동화로 캠퍼스를 오가던 독문과생들은 졸업 사진을 찍을 때서야 제대로 된 화장과 정장을 처음 선보이는 게 보통이었다. 나름대로 꾸며입고 나왔다지만, 어딘지 모르게 남의 옷을 입고 나온 듯한 어색함과 부자연스러운 화장은 서로의 놀림감이 되곤 했었지. 그렇게 킥킥거리며 웃음짓는 동안, 문득 캠퍼스의 4년이 모두 흘러가고 있음을 갑자기 느끼는 게 졸업 준비생들의 연례행사와도 같았다.
“사회에선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지만, 대학에서는 결과보단 완성을 향해 움직이는 과정이 훨씬 소중한 체험으로 남는다. 방학에도 학교에 나와 뜨거운 햇살에 그을리면서 발성 연습을 하고 대본을 외우며음악에 맞춰 율동을 익히던 과정, 지금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돌아간다면 어색하지 않게 같은 행동을 해낼 것처럼, 우리 동문들에게는 값진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물론 독재 정권의 억압 속에 쓰러져 가던 동료들을 외면하면서까지 행사를 강행한 건 아니었다. 투사와 비(非)투사의 구별도 없던 시절, 수업 거부와 최루탄의 포연 속에서  해방과 민주화를 모두 함께 부르짖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흘러가는 젊음의 한 페이지를 무언가로 기록하고 싶다는 아쉬움과 욕망에 들끓었었다. 가장 아름다워야 할 젊음의 시간이 투쟁으로 점철된 채 끝난다는 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0명 내외였던 독문학과 학생들 중 무려 120여명이나  행사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요즘의 잣대로 본다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갈수록 개인주의로 바뀌는 지금의 대학 분위기로서는 수긍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취업 준비에 바빠야 할 4학년생들까지 참가해서 작년 재작년에 직접 뛰었던 자신의 체험을 가르치고 격려하던 모습은 우리로선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강의실에서 배우지 못한 인간적인 유대감이 자연스레 생겨났고, ‘게르마니아’라고 새긴 티셔츠를 똑같이 입고 다니면서 우린 꿈과 젊음과 내일을 얘기했다. 시대의 아픔을 토로하고 독일 민족 정신의 장단점을 비교하며, 그들의 정치 사회 문화가 왜 그 높이까지 올라가 있는지를 이 땅의 현실과 비교하는 동안 행사 준비는 무르익곤 했다.
몇 년간 기획과 총연출을 담당하면서, 나는 개개인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투입하고 그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100명에게는 100가지의 재주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A를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B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C를 맡는 게 가장 합리적인 인물도 있듯이, 무조건 무대에 오르고 단상에 서는 것만이 행사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연극 배우가 있으면 그만큼의 스탭이 있어야 하고, 번안 가요를 하려면 번역을 담당할 학우도 필요했다. 무대 세트 설치는 군복무를 마친 예비역 선배들이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고, 평소 유난히 튀는 화장으로 말이 많았던 동료에겐 분장을 맡겼다. 사진 촬영에 푹 빠져 학과 생활을 소홀히 하던 동료에겐 영상 담당을,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어울리지 못했지만 꼼꼼한 성격이었던 여자 후배한테는 행사 진행 기록을 전담시켰다.
공연의 성공 여부는 둘째 문제였다. 우리는 돈을 위해 활동하는 사회인이 아니었기에, 없는 돈을 모아 막걸리 한 통에 목을 축일 줄 아는 대학의 낭만과 체험이 중요했다. 민속 무용팀이 노래패와 연극팀한테 기본적인 무용 동작을, 노래패는 다른 동료들에게 독일 민요를 가르쳐 주며 우리는 한 걸음씩 하나가 되어갔다. 맡은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는 책임 의식, 자기 하나로 인해 동료들한테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집단 의식을 찾아가는 동안 학술제와 공연은 무대에 올려졌고, 술잔을 부딪치며 긴 시간의 노력과 고생을 털어버리는 뒷풀이와 함께 모든 과정은 일단 정리되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었다. 다시 강의실로, 도서관으로, 투쟁의 현장으로, 각자의 동아리와 동문 모임에 열중하는 모습으로 모든 참가자들은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우리가 원하던 것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자신감을 북돋았고, ‘게르마니아’ 셔츠를 입은 이들은 캠퍼스 내 어느 자리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로 부각되는 게 일상과도 같았다.  통기타 한 대만 있으면 언제든지 합창을 했고, 눈만 마주치면 단골 주점으로 직행하며 끈끈한 유대감을 이어갔다. 80년대가 끝나고 졸업할 때까지, 졸업한 이후에도 그 행사의 전통은 후배들에 의해 이어지면서 매년 가을에 날아드는 초대장을 기다리는 선배로 우리 모습을 바꾸어 갔다.
그로부터 십 년, 이젠 ‘게르마니아’ 학술제의 존폐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된다는 후배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학부제로 바뀐 캠퍼스, 공동의 의식보단 개인의 사생활이 우선되는 사고 방식, 첨단의 인터넷 열풍이 몰아치는 분위기 속에서 그 행사에 참가하겠다는 사람조차 찾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우리가 오비(OB·졸업생)게르마니아를 한 번 해볼까?”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졸업생들 모임 때마다 진지하게 던져지는 동안, 캠퍼스의 문화는 너무나도 크게 바뀌어진 것이었다.
80년대 학번의 졸업생들에게 ‘게르마니아’는 하나의 휴식 같은 암호로 간직되고 있다. 추억의 한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우리만의 쉼터 같은 그 무엇. 지금도 아무 때나 전화벨을 울려대는 사람들은 바로 그때 그 얼굴들이다. 사회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각자의 자리에 살아가면서 아저씨 아줌마의 모습으로 변했다지만, 한 자리에 모이기만 하면 그때와 똑같이 낄낄거리고 정겨운 욕설을 쏟아내면서 건배와 함께  불러 보는  우리만의 공통 분모 ‘게르마니아’…….
시간이 지나가는 탓일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사진첩을 뒤적이는 동안 훌쩍 변해 버린 내 모습을 새삼스레 느낀다. 그리고 마음 안에서나마 그 무대를 다시 한번 만들어 본다. 기타를 안고 앉아 그때의 번안 가요를 부르고, 아직도 암기하고 있는 당시의 연극 대본을 읊어 보며 창 밖을 멀리 바라다본다. 그 얼굴들은 잘들 지내고 있는지, 아이들은 잘 크고 사업은 잘 되고 있는지, 건강은 여전한지를 헤아리던 내 손길에 수화기가 쥐어진다. “오늘 저녁에 맥주 한잔 할까? - 오케이!”
‘추억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되새겨진다. 누구에게나 그런 추억 한 가지씩은 존재하지 않을까? 힘들 때마다 찾아가서 쉴 수 있는 휴식처처럼, 한숨도 나오지만 입가에 미소를 띠게 만드는 힘도 가지고 있는 향수의 공간..... 내 추억의 한 자리엔 언제나 "게르마니아" 가 있다.  더불에 지금 내 곁에 함께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도 다름 아닌 그때 그 얼굴인 것이다.

 

글/ 채지민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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