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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 이문열의 "아가" 장애우의 문제 제대로 다루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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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가 이문열 씨는 3년간의 공백을 깨고 ‘아가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출간했다.
그동안 이문열 씨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문제작으로 논쟁을 불러 일으키곤 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아가’는 지난 3월 발표되자마자 중앙일간지를 통해 평론가들이 잇달아 비평을 게재하고 있는데, 전작 ‘선택’에 이어 또 다시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페미니즘이 아닌 장애우관이 문제다

논쟁의 초점은 이문열 작품에서 엿보이는 사라져간 공동체와 전통적인 질서체계에 대한 향수, 가부장 제도하의 남성의존적인 여성관에 대한 비판에 있고, 이러한 관점은 결국 현대의 합리적인 가치체계와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논의의 초점은 주로 페미니즘에만 모아지고 있으나, 실상 ‘아가’를 꼼꼼이 읽어보면 장애우관에 있어서 더욱 많은 논쟁거리를 내포하고 있다. 평론가 최혜실 씨도 조선일보 칼럼에서 ‘아가’는 장애우와 비장애우를 제도적으로 구분하는 근대의 논리를 경직되게 적용하면서 과거의 공동체를 미화하고 있다며 오히려 논쟁의 방향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장애우 문제에 있으며 누군가가 이 문제를 들고 나와야 한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아가’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아가’는 ‘아름다운 노래’ 와 ‘아기’라는 중의적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지능이 낮고(7세 정도의 정신연령)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당편이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주제는 당편이 해방전후 마을로 편입되면서부터 95년경까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질곡으로 같은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중년 남성의 회고를 통해 그려지고 있는데 장애우 문제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특유한 입담이 이문열답다. 당대의 대작가가 반세기에 걸친 한 장애우의 삶을 변모하는 사회상에 대비시켜 정리해낸 것은 범상치 않은 일로써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놀라운 작업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아가’가 말하는 장애우문제에 대한 해석과 관점은 장애우 운동 차원에서 바라보는 관점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 물론 작가의 작품세계를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되지만 근본적인 해석에 문제가 있다면 작가의 다음 작업을 위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문열 씨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작품에 개입시키고 있는데   ‘아가’에서는 그런 경향이 비교적 적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작가 이문열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간혹 가다 독특한 해석을 들며 문제의식을 번득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도 일반 대중의 보편적인 사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의 작위적인 세계관에 지나친 확신마저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양파껍질론’을 바탕으로 한 장애우문제의 해석이다. 즉 고향의 부락 공동체의 구성원은 양파의 횡단면(동심원들의 겹)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동심원의 맨 바깥 원은 문둥이의 오두막과 거지의 움막집, 백정의 도살장, 그 안쪽은 미치광이로 불리는 심신상실자와 백치, 생산능력이 없는 중증의 불구자, 또 그 안쪽은 반편이로 불리우는 심신미약자, 박약자 또는 정신이 온전한 신체장애자, 마지막으로 바보로 대표되는 지려천박자들이나 둥이, 쟁이라는 가벼운 편집증후군의 순서로 배치되어 가장 중심의 몸과 마음이 모두 성한 사람들의 원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 양파껍질론이다. 당편이는 세 번째 동심원에 해당된다.
뒤이어 작가는 산업화의 역사는 바로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외곽으로부터 구성원들을 걷어낸 과정이라고 말한다. “예전에 그들은 우리 곁에 있었고 우리와 함께 세상을 이루었다. 그때는 누구도 그들을 우리와 다른 별난 사람으로 여기는 법이 없었고 더군다나 그들이 격리되거나 소제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그들은 우리 곁에서 하나 둘 사라졌다. 정신병원과 각종 수용소, 재활원, 보호소 같은 시설들이 그들 중 생산 능력이 없으면서 사회의 미관을 편의만 해치는 이들을 먼저 골라 데려갔다.”
이러한 대목들은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에 있어 전통질서를 바탕으로 하는 과거의 공동체와 장애우의 관계를 미화하는 듯한 혐의를 짙게 풍기고 있는데 이는 자칫하면 전통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장애우에 대한 편견이 산업화와 공동체 해체 과정에서 갑자기 발생된 문제처럼 오인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가정의 붕괴라든가 상하질서의 해체에 있어서는 맞는 해석일지언정 보편적인 장애우 인권의 발달과정으로 보면 전혀 맞지 않는다.
당편이에 대한 회상에서 이는 더욱 명백해진다. 당편이는 외모자체부터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기괴했고, 실수투성이에 제대로 하는 일조차 없다. 공동체에서의 당편이의 유일한 기능이라면 기묘한 말버릇과 행동으로 재밌거리를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힘든 일상사에 지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작가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 어려운 시절에도 그들을 부양하기 위해 추가된 부담을 마냥 힘들어하지 않은 것하며, 그들 환유의 특성이 우리 삶에 끼치는 여러 불편이나 혼란을 웃음으로 참아 넘긴 것도 어쩌면 그게 우리가 그들에게 해주어 할 당연한 보상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 당편이가 어느 순간부터 잊혀져가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당편이가 거듭된 학습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게 되고 마른고기 영감과의 동거생활로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찾게 됨으로써 과거에 당편이를 특징지웠던 상징들이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마른고기영감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당편이는 마을을 등지고 그렇게도 싫어했던 장애우수용시설로 찾아가게 되는데 이는 공동체의 해체로 당편이가 맺고 있던 인간관계의 사슬이 하나 둘 떼어졌기 때문이란 것이다.

 

‘아가’가 유포하는 ‘반편이’ 라는 비하어

그런데 과연 과거 공동체 내에서 당편이에 대한 편견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당편이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조롱은 조롱이 아니라 오히려 끈끈한 정이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행복을 얻었는가? 결코 아니다. 당편이에 대한 관심은 단지 동정이었을 뿐이고 당편이의 존재는 무생물에 지나지 않았다. 당편이의 역할에  대한 설명도 개똥도 약에 쓰일 수 있다는 식의 상투적인 사고방식에 다름아니다. ‘당편이밥죽’이라 일컫는 개죽과 흡사한 먹거리, 사람 사는 곳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은 숙소, 마을 사람들의 조롱, 당편이의 여성성을 모독하는 낯부끄러운 장난들이 어떻게 미화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작가는 “놀림이나 빈정거림이 악의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며 가학이나 부정의 의지가 없는 악의는 진정한 악의가 아니다. 고향사람들은 당편이를 놀리고 웃었지만 누구도 학대하거나 그 존재를 지워버리려 들지는 않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감상적인 해석이다.
당편이는 실은 처음부터 공동체의 일원에 통합될 수 없었으며, 누구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한 기억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당편이에 대한 기억만은 어느 순간 사라져갔다는 것은 당편이가 결국은 영원한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으며, 단지 특이한 생김새와 거기에서 빚어지는 이미지들로만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성과라고 하면 문중마을에 전래되는 민담을 소설을 빌어 되살려냈다는데 있다. 몇 가지는 당편이의 에피소드를 빌어 나타나고 있는데 하필이면 그 에피소드란 것이 저자거리에서 떠돎직한 낯뜨거운 음담패설로 당편이의 성을 우스갯거리로 삼고 있다. 최근 정신지체인의 성폭력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하는 시점에서 유쾌하지 못한 대목이다.
또한 기존의 장애우를 다룬 소설들이 장애를 희화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 ‘아가’에 등장하는 당편이, 황장군, 마른고기영감, 고리 백정의 앉은뱅이 아들 등 등장하는 장애우마다 희화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작가는 그 동안의 상위모방의 긴장에서 벗어나 하위의 삶을 다루려 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이데올로기라든가 페미니즘 따위의 논의의 보편화를 차단하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특수성을 지닌 여성을 모델로 도입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작가의 의도가 애당초 장애우의 문제를 해석하는 데 있어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가’는 한 여성장애우의 삶을 통해 장애우의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제기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작품 전개과정에서 장애우들에 대한 지나친 인물희화와 여과없는 거친 표현, 저자의 감상적인 장애우관은 적잖은 실망을 안겨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 문제점들과는 상관없이‘아가’는 발간 4일만에 초판이 매진되는 등 연일 대히트를 치고 있다. 이러한 영향력 덕분인지 ‘반편’이라는 듣기에도 외람된 비하어가 유행하는 기현상마저 벌어지고 있다. 신문, 잡지, 방송 심지어는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문학평론가의 평이 전 독자들의 독후감이건간에 "아가" 와 관련된 글에는 반편이라는 말이 공식용어로 통용되고 있다.  이문열 씨는 한국이 자랑하는 대작가 일 뿐 아니라 대중성에서도 2백3천만부라는 천문한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할 만큼 영향력이 큰 작가이다.  그런만큼 "아가" 가 일으키는 반향이 반가우면서도 우려가 된다.

글/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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